26. 설봉고간 평창 2

[評唱 2]

如今人只隨語生解 殊不知 趙州與雪峯相見. 州云 “不可從鼻孔裏入” 雪峯云 “趙州古佛 從此不答話” 已是與他相見. 且道 這裏意是如何. 須是打破面前漆桶 始可入作. 後人不善來風 走向趙州語下作活計 到這裏若是通方漢 必知此二尊宿落處.

요즘 사람들은 말을 따라 지해(知解)를 내기 때문에 조주와 설봉이 서로 만난 것(相見 相見處)을 전혀 모르고 있다. 조주는 말하기를 “콧구멍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고, 설봉은 말하기를 “조주는 고불이다. 이제부터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이미(이것으로) 그들이 서로 만난 것이다. 자, 말해보라! 여기서 그 뜻이 무엇인가?

모름지기 바로 면전에서 칠통을 타파해야 비로소 들어갈(入作) 수 있다. 그런데 뒷사람들은 바람이 잘 불지도 않는데 조주의 말 아래로 달려가 활발하게 계교를 부리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사통팔달한 작가(通方漢, 통방작가)라야 이 두 존숙의 낙처(落處)를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雪峯云 “趙州古佛 從此不答話” 此一句語 如金如玉 難酬其價. 雪峯雖答者僧話 終不去語句裏作繫驢?. 後人多少錯會 妄去中間穿鑿 殊不知本宗猷. 此事若只在言句上 便不深屈古人 所謂玉女已歸?漢去 ??猶在火爐邊.

설봉이 말하기를 “조주는 고불이다. 이제부터는 답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일구어(一句語)가 마치 금과 같고 옥과 같아서(如金如玉) 그 값을 매길 수가 없다. 설봉이 비록 이 스님의 말에 답은 했지만, 결코 어구 속에서 나귀 매는 말뚝(繫驢右)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뒷사람들이 많이들 잘못 알고 망령되이 그 가운데서 어구를 천착하고 있으니, 그 근본 뜻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이 만약 단지 언구에만 있는 것이라고 하면 이것은 고인을 너무 억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소위 “옥녀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는데, 어리석은 사내는 아직도 화로 곁에 있네”라고 한 것이다.

雪竇道 “?中總道 雪峯答他話 便成就下平高 難?作者” 又是錯會 喫雪竇毒藥了也. 此意與法眼話作兩?一般 只?他一手擡一手?. 只如 趙州勘婆子 且道 是勘破不勘破. 且道 雪峯是答他話 不答他話. ?如喆 拈趙州勘婆子話道 “天下衲僧只知問路 老婆要且不知脚下泥深. 若非趙州老人 爭顯功高汗馬”

설두가 말했다.

“대중들이 모두 말하기를 설봉은 ‘이 스님의 물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조주가 긍정하지 않은 것이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말은 설봉을 몹시 억울하게 하는 것이다. 설두는 그렇지 않나니, 못을 끊고 쇠를 자르는 본분존사는 낮은 것을 취해서 높은 곳을 고르게 하기에 작자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앞의 염고를 참조할 것).”

그런데 또 이것을 잘못 알면 설두의 독약을 먹게 될 것이다. 이 뜻은 법안화작양궐화(法眼話作兩右話, 법안이 두 개의 말뚝이 되었다고 말한 공안, 1칙 참조할 것)와 같은 것으로, 단지 한 손으로는 들어 올리고 한 손으로는 내리누른 것이다.

그렇다면, 조주가 노파를 감파했다(趙州勘婆子)고 하는데, 자, 말해보라! 감파한 것인가, 감파하지 못한 것인가? 자, 말해보라! 설봉이 그의 말에 답을 한 것인가, 답을 하지 못한 것인가? 진여 철(廬如喆, 대위모철)이 조주의 감파자화(趙州勘婆子話)를 염해서 말했다.

“천하의 납승들은 단지 길을 물을 줄만 알았고 노파는 다리 밑에 진흙이 깊은 줄은 알지 못했다. 만약 조주 노인네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공고한마(功高汗馬, 땀 흘린 말의 공이 높음=큰 공을 세움)를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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