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해의 길 6

건물이 높을수록 기초공사를 튼튼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100층이나 되는 거대한 불교 건물도 마찬가지다. 이 붓다빌딩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 있는데, ‘깨침’과 ‘자비’가 바로 그것이다. 깨침은 중생 싯다르타를 붓다로 이끈 종교적 체험이며, 이를 통해 진정한 자비가 가능하다는 것이 불교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논리다.

그렇다면 싯다르타는 무엇을 깨쳐서 붓다로 질적 전환을 이루었을까? 바로 연기(緣起)의 진리다. 연기란 빠알리어로 ‘말미암아(緣)’라는 의미의 ‘빠띳짜(paticca)’와 ‘일어난다(起)’는 의미를 가진 ‘사뭅빠다(samuppada)’가 결합된 합성어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의미가 된다. 붓다는 이를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此起故彼起).’라고 간결하게 정리하였다.

짧은 이 두 문장은 ‘연기의 공식’이라 일컬어지는데, 여기에서 붓다가 통찰한 세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앞에 나온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다.’는 구절은 세계를 공간적으로 관찰한 부분이다. 오래 전 벗의 딸기 농장을 처음 방문했을 때, 벌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수정을 위해 벌을 풀어놓았던 것이다. 그때 비로소 벌이 없으면 맛있는 딸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벌과 딸기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기적 관계라는 것, 이것이 곧 붓다가 통찰한 존재의 참 모습이었다.

붓다는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볏단에 비유한 적이 있다. 볏단은 서로 마주 세워놓아야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 속에서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볏단 하나가 쓰러지면 다른 볏단도 쓰러지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이것과 저것(彼此)은 서로의 존재 이유이자 근거가 된다는 뜻이다. 이는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몸(同體)이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자비(慈悲)가 나오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몸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장인 ‘이것이 생기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는 구절은 연기의 시간적 관찰이다. 모든 것은 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서로 더불어 존재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많은 불자들이 애독하고 있는 현대불교신문은 종이로 만들어졌는데, 한 장의 종이는 태양과 먹구름 등 수많은 인연들이 시간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적절한 양의 햇빛과 비 등이 있어야 나무가 잘 자라고, 그 원목으로 종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장의 신문 속에는 기사나 광고뿐만 아니라 태양과 비, 먹구름 등 수많은 인연이 함께 담겨있다. 이뿐만 아니라 나무를 베는 어느 이름 모를 노동자의 어깨에 맺힌 땀방울까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붓다가 성찰한 연기의 의미였다.

이처럼 연기의 진리는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라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너, 인간과 자연, 남과 북, 동과 서는 한 몸이라는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비로소 상대가 기쁠 때 함께 기뻐하며(慈) 슬플 때 함께 슬퍼할(悲)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동체자비다. 이와는 달리 모든 것을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느끼면 대립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과 자연을 둘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환경을 함부로 대하고 그럼으로써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 피해를 ‘또 다른 자연’, 즉 인간이 입고 있는 것이다. 핵전쟁의 공포나 인간성 상실 등의 문제도 나와 다른 사람을 둘로 보는 이원적 세계관에서 나온 필연적 산물이다. 붓다가 깨친 연기적 사유는 오늘의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고 싶은 넉넉함이 아니라 줄 수밖에 없는 절실함인 거야.”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응답하라1988’에 나온 대사다. 사랑은 왜 넉넉함이 아니라 절실함일까? 바로 그 대상이 나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연기, 동체자비는 이를 두고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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