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안중근 의사

“우린 안중근 의사 너무 몰라”
가장 뜻깊은 사형수의 이름

 

나는 오랜 세월 많은 재소자들을 만나왔다. 특히 사형수들을 교화하면서 살았다. 많은 수감시설을 찾았고 그곳에서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게는 그런 수감시설 중에서 좀 더 특별한 곳이 있다. 중국 뤼순 감옥이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이다. 그곳이야말로 나에겐 ‘법당’이었다. ‘안중근’이라는 한 시대의 영웅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 그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또 한 번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30년 넘게 안중근 의사에게 미쳐 살았다. 안중근 의사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온 것은 1984년 일본 동북지역 미야기현의 센다이에서 열린 ‘전국 교도소 재소자 교화 전국대회’에 초청인사로 방문했을 때였다. 다이린지(大林寺ㆍ대림사)라는 절에 안중근 의사의 유묵비가 세워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안중근은 일본 근대사의 영웅이자 조선의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이다. 안중근이 우리에겐 영웅이지만 일본인에겐 그럴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의 유묵비가 세워져 있다니, 그것도 안중근 의사의 글씨로 기념비를 세웠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 걸음에 다이린지로 달려갔다. 다이린지는 시골에 있는 작고 조용한 절이었다. ‘위국헌신(爲國獻身) 군인본분(軍人本分)’이 새겨진 유묵비가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유묵비를 보고 안중근 의사와 지바 도시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감동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유묵비는 센다이의 지사가 지바 도시치와 안중근 의사를 기념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다이린지 영정각 한 쪽에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다른 한 쪽에는 지바 도시치와 그의 부인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 위패 옆에는 과일이 놓여 있었다. 안중근을 감시해야했던 일본 군인은 평생 안중근을 추모했다. 그리고 그 일은 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감동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감동스러운 만큼 나로서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를 비롯해 우리 국민들은 안중근 의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추모하는 마음도 분명 지바 도시치만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이린지를 둘러보는 내내 가슴이 무거웠다. 우리나라에서 안중근 의사는 그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영웅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은 빈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장 귀국하여 온 국민에게 다시 한 번 ‘안중근’을 알리고 다이린지에서의 일을 알리고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안중근’이라는 이름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그 날 이후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를 알리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내 일처럼 하고 있다. 뤼순 감옥도 여러 차례 가보았고,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뤼순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장소를 비롯해 사형수들의 묘지와 주변을 살펴봤지만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뤼순 감옥에 추모비도 새웠다.

내가 안중근 의사의 삶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안중근 의사 역시 사형수였기 때문이다. 나는 교화를 위해 전국에 수감되어 있는 사형수들을 많이 만났다.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형수의 마음속에도 본래의 마음은 있었다. 그 어딘가에 숨어 있는 본래 마음을 찾아주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당연한 죗값을 치러야 하는 사형수들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할 수 없었다. 죽음을 받아놓은 사형수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안중근 의사를 본적은 없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았을지 알 수 있다. 더구나 다른 사형수들과는 다른 사형수였기에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안타깝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는 늘 죽음과 함께 있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살 수밖에 없다.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유 없는 분노와 우울, 두려움,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산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안중근이라는 사형수가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생에 대한 집착, 미련, 두려움이 없었다. 교도관과 법관을 비롯해 그를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이국의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의 평화를 원했던, 그래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안중근은 찬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뤼순 감옥에서도 언제나 반듯하게 앉아 책을 읽고 기도를 했다. 두려움도 없이 오히려 함께 잡혀온 동지들을 걱정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고 의연할 수 있냐고 묻는 교도관에게 안중근은 껄껄 웃으며 “목숨을 걸고 했으니 이미 목숨은 내놓은 것이고, 두려울 일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오히려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었으니 기쁘다고 했단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도 그랬다. 그는 거사를 마친 후 도망치지 않았다. 당시 저격 현장에 있었던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는 평생을 살면서 안중근의 의로움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안중근 의사가 남긴 흔적들을 밟으며, 그에게서 부처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비록 ‘도마(토마스)’라는 다른 종교의 이름을 받았지만 나는 그의 삶에서 그의 불성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연을 받아들이고, 생에 집착하지 않는 그의 빈 마음에서 부처를 볼 수 있었다.

“아들 중근에게,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은 날도 가장 먼저 어머니와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안중근은 늘 용감하고 두려움이 없는 군인이었지만 늘 자상하고 다정한 아들이고 남편이었다. 사형수 안중근, 그는 내 생에서 가장 뜻깊은 사형수의 이름이다.

안 의사가 순국한 뤼순 감옥을 방문한 삼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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