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훤장부’ 같던 스님, 감사합니다

맹난자/ 수필가

광우 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58년 여름, 보문사(탑골승방) 남별당에서였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인 나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를 알아와 발표하라는 세계사 선생님의 숙제를 안고 일조 스님을 찾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속 시원히 일러줄 분이 올 테니.” 나는 무작정 그 분을 기다렸다.

저녁때가 되자 양복차림의 훤칠한 남자 한 분이 내 앞에 나타났다. 동국대 불교학과 재학생이던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이광우(李光雨)스님이었다. 다생의 인연이 지중했음인가. 광우 스님이 정각사(삼선교 소재)를 짓던 그 해에 우리 집은 절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남별당 스님께 이 소식을 듣고 친구와 둘이서 절을 찾았다. 나는 교복을 벗은 대학생이 되었고 스님은 남장 차림의 양복이 아닌 먹물 옷을 입고 계셨다. 삭발로 드러난 둥그스름한 두상과 온화한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1960년 이것이 광우 스님과의 두 번째 재회였다.

스님의 서가에서 김동화 박사가 쓴 <불교학 개론>을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당시는 실존주의 사상이 풍미하던 때라 카뮈나 사르트르를 읽어야 행세깨나 하는 줄 알던 때였다. 마침 이화대학 <교양국어> 책에서 만난 실존주의와 공()사상에 관한 박종홍 교수의 글은 마른 짚단에 불을 긋듯 내 가슴에 옮겨 붙었다.

실존철학에 관해 하이데거에게 물으러 갔더니 <금강경>을 보라는 그분의 말씀에 충격을 받고 돌아와 서양철학자인 선생이 <금강경>을 공부하였다는 그 요지를 간추려 15부나 손으로 써가지고 함께 공부해 보지 않겠느냐?는 취지문을 각 대학교 철학과, 국문과, 심리학과 등에 보냈다.

단층 양옥이던 정각사 다다미방은 대학생들로 꽉 찼다. 마침내 김동화 선생님을 모시고 <금강경>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실험극장에서 연극을 하는 걸 아시는 선생님께서 <유마경>은 희곡적이라며 그 다음은 <유마경>을 공부하자고 하셨다.

<법화경>은 홍정식 선생님께서 맡아주셨고 원의범, 황성기, 이영무, 이재창 선생 그리고 미국서 막 귀국한 김용정 선생을 모시고 과학과 불교등 사이사이 돌아가며 특강을 듣도록 해주셨다. 정각사 법당은 한국불교의 산실이며 불교문학의 요람이었다. 문인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김구용 선생의 벽암록강의는 법당 안을 환희심으로 넘쳐나게 했다.

정각(正覺)을 주창하는 정각사에서는 바로 알고 바로 행해 참사람 되자는 정신(正信정행(正行)을 근본으로 삼아 신행회를 설립하고 <신행회보>를 펴 내기게 이르렀다. 19692월의 일이다. 내가 그 날짜를 기억하는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병원에서 돌아온 첫아이는 밤에 열이 40도에 육박했다. 조산한 아이를 안고 나는 부처님께 간구 드렸다. ‘이 아이를 살려주시면 10년을 당신을 위해 종질이라도 하겠다.

그 다음 날 광우 스님께서 아기를 보러 우리 집으로 건너오셨다. 스님은 서윤길 학생이 등사판을 긁어 소식지를 만들어왔는데 중단되었으니 그걸 나더러 맡아달라는 말씀이었다. ‘그래! 이거로구나하고 부처님께 약속드린 10년을 그 일에 바쳤다.

광우 스님의 원력으로 제호를 <신행불교>로 바꾸면서 문서포교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그 시대에 작은 등불의 역할이나마 감당해 왔다고 자부한다. 작지만 알찬 책이었다. 김동화 박사의 권두언, 김대은 스님의 설화 연재, 석정 스님의 선시 해석, 광우 스님의 경전 해설 등 동국대학교 소장파 교수들의 글도 번갈아 가며 실었다. 나머지 원고를 메꾸기 위해 나는 중단한 불교공부를 어떻게든 섭렵해야 했다. 10년을 봉직하는 동안 신문이나 불교잡지에서 청탁서가 왔고 글을 보내면 이름 아래 수필가라는 호칭이 붙었다. 이름의 도()가 되지 않으려고 나는 노력해서 수필가가 되었다. 만약 스님께서 내게 이런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스님은 말없이 나를 불교로 이끈 인로왕보살이셨다. 때로는 스승이요, 때로는 자애한 어머니같이 60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다.

1961년 동국대에서 판토마임 연극을 발표했을 때 갑자기 스님께서 참석해 주신 일, 신문로에 사는 스님의 동창생 집으로 데리고 갔을 때 거기서 듣던 일본 노래 가래 스즈끼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칠석날 저녁, 정각사 마당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함께 부른 이 노래. “어처피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 꽃을 피우지 앉는 마른 갈대다초가을 저녁, 나는 꽃의 은유를 감상적으로 아껴가며 좋아했었다. 그러나 광우 스님은 우담바라회를 이끌며 꽃을 피워내셨다. 비구니 스님들의 전당인 전국비구니회관을 이룩해내었고 서울시립목동청소년회관 관장 재임 시에는 뛰어난 업무능력으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이 사람이 교육문화과 과장으로 스님을 보필할 수 있었던 것도 불연(佛緣)이다.

아침 조례 때 뵙던 스님은 60년 전, 훤훤장부와도 같았다. ()을 위해 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무상해 육탈된 모습으로도 깊은 선정(禪定)에 드신 듯, 흐트러짐 없는 수행자의 모습에서 나는 더 큰 무언(無言)의 가르침을 받곤 했다.

스님, 어디에 계십니까? 두 손을 모우고 사방을 둘러본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