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아픔 함께한 법화행자

 

생전 상좌, 손상좌 스님들과 행복했던 광우 스님의 모습.

 

우리를 바른길로 안내하는 선지식을 만나는 것은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 만큼이나 큰 복이다. 비구니 명사 태허당 광우 스님은 대중들에게 삶의 길을 일러준 훌륭한 선지식이셨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스님이 삶 속에서 보여준 행지(行止)는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가음에 따뜻한 가르침으로 남아있다. 비록 지면을 통해 스님의 행지를 전할 순 없지만 평소 남긴 가르침이 다시 법향으로 전해지길 기원하며 정리해본다. 노덕현 기자

광우 스님은 당시로는 드물게 이웃종교인들과도 마음을 열고 교류했다. 사찰에서 수녀님들과의 기념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명성 스님, 가운데 광우 스님)

행이 있으되 믿지 않아 교만스레 되지 말고, 신이 있으되 행 없어 어리석지 말고 육바라밀의 지침을 잘 받들어 수행해 나가면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넉넉한 바람처럼 왕래하는 운수가 되리라. 마음의 끈을 다 풀고 하늘을 오르는 연처럼 이 속박된 세상에서 자유인이 되자 〈신행불교〉 中

창밖의 빈 나뭇가지를 응시하며 나도 모르게 내 머리를 만지고 내 행색을 훑어본다. 수없이 법을 말해 오면서 얼마나 법답게 살아왔는가. 얼마나 추운 사람들의 추위를 헤아려 보았던가. 아픈 사람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했던가. 이어지는 물음에 뭇중생을 향한 참회의 합장을 올린다. 〈신행불교〉 中

불교수행자는 삼독을 끊고 그 본성을 맑게 해야 합니다. 최후의 목적은 참다운 열반을 얻는 것이지요.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깝게 열반의 길로 가려고 합니다. 늙고 부서진 수레지만 가야할 길은 그 길 밖에 없습니다. 〈부처님법대로살아라〉 中

출가수행자는 부처님의 살아있는 대행자라 할 수 있지요. 스님들은 현실적으로 대중의 귀의를 받아야 하는 삼보의 하나라는 점에서 수행자가 수행자 답지 못하면 그 것처럼 부끄러운 일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스님이 반듯하게 잘해야 합니다. 행동은 수행자 답지 않으면서 남에게 존경만 받으려고 한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왜 내가 출가했는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지요. 〈한국의대종사〉 中

희견보살은 자기 몸을 소신공양해서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힙니다. 그리고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마하파자파티 비구니에게 희견여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지요. 아마도 포교하는 법사가 돼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나는 바로 마하파자파티 같은 비구니 대법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나의 자질과 능력은 차치하고 서원만은 그렇게 세웠지요. 그래서 정각사를 짓고 포교의 길에 나섰습니다. 〈나의서원 나의신행〉 中

한국불교를 움직이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치마불교라는여성폄하에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여성의 힘을 이기적인데서 이타적으로 전환하면 됩니다. 여성 스스로가 ‘부처님의 제자’ ‘석가의 딸’이라는 자각이 중요합니다. 요즘은 여성불자도 매우 적극적으로 교리 공부를 하고 사회 봉사에 열심입니다. 스스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고양시켜 나간다면 오명이 예명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 남성보다 여성이 많다면 자랑스러운 일입니다.<부처님 법대로 살아라>中

부산 소림사 법화산림 당시의 광우스님, 당시만 해도 비구니스님이 법상에 오르는 일은 드물었다. 스님은 소림사에서 1956년부터 1966년까지 10년 넘게 법화산림을 열었다.
말년에 몸이 편찮아도 늘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스님은 삶 자체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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