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유교가 겪은 탄압들

우리는 강한 존재인가 약한 존재인가

도저히 같은 공간에서 숨 쉬며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쌓인 원한을 두고 우리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이란 말을 쓴다. “함께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남을 뼛속 깊이 미워하다 보면 사실 괴로운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저주란 약한 자의 거의 파괴력 없는 무기일 뿐인데, 이것이 집단화되거나 권력자들이 사악하게 이용하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저들이 나보다 행복해 보여서, 나보다 돈이 많거나 출세를 해서, 내게는 없는 것을 가지고 있기에 미워하는 마음이 움튼다. 이런 미움은 발전보다 파괴를 가져오기 마련인데, 물질과 인명을 말살한 끝에 인성마저 피폐해진다. 남을 미워하는 일은 칼끝이 자신에게로 향한 저주에 불과하다. 이를 번연히 알면서도 인간들은 서로를 미워하면서 산다.

佛 연화장·儒 대동 세계
공생공존의 가르침 같아
혐오·적대감의 광풍 벗어나야

이런 글을 쓰고 있노라니 개운치 않게도 내게도 몇몇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른다. 이미 연락은 끊겼지만 그들은 여전히 내 뇌리 안에 들러붙어 나를 분노와 번민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했고, 공자는 충서(忠恕)가 자신의 절대 좌우명이라 갈파했으며, 부처님도 “미워하는 이도 사랑하는 이도 만들지 말라. 모두 괴롭다”고 간곡히 권하셨지만, 성현이나 각자(覺者)의 근처도 가지 못한 일개 범부인 나는 그 아집의 기억을 털어내지 못한다.

돈의 논리가 신탁(神託)이나 다름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패자를 밟고 일어서야 승자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패자를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미워하는 일에 급급하다. 두 번의 기회의 주지 않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황폐의 극한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했듯이 이렇게 경쟁의 악령 속에 사로잡히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적자생존이 아니라 공멸(共滅)뿐이다.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막아내는 방패를 든 자의 싸움처럼 자기모순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번갈아 저지른다. 불교가 이루려는 연화장세계, 유교가 꿈꾸는 대동(大同) 세상은 끝내 환상에 그치고 만다.

“너와 내가 더불어 잘 살자.”는 조화보다 “네가 없어져야 내가 산다.”는 대결 논리는 개인 사이에서만 있는 일도 아니다. 집안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집단 사이에도 빚어지며, 민족들 사이에도 출현하고, 심지어 나라 사이에서도 충돌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증오가 이념이나 종교 사이에서 벌어지면 말로 표현이 안 될 만큼 무섭고 끔찍한 재앙으로 들이닥친다.

중세 서양에서는 초승달과 십자가의 전쟁이라 불리는 ‘십자군 전쟁’이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2백 년에 걸쳐 완강하게 지속되었다. 게다가 그 전쟁은 종식은커녕 불씨로 남았다가 지금까지 이어져 비극을 활활 불태우고 있다. 중세 교회의 마녀 사냥은 또 어떤가.

인간의 행복과 안녕을 지향하는 종교가 이런 극한의 대립 끝에 무수한 인명을 살육하는 꼴을 그 종교의 창시자들이 본다면 과연 무슨 통탄의 넋두리를 쏟아낼지 귀를 막아도 귓전을 때린다. 인간들끼리의 공존을 외치는 종교가 오히려 갈등과 적개심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되는 현실은 우리를 나락에 빠뜨린다.

부처, 통곡하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과 평화의 어깨춤을 출 세상을 꿈꾸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터를 닦은 불교가 지금은 세계 3대 종교로 자리했지만, 그 발전 과정에서 항상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었다. 시련으로 고통 받고 박해를 당해 신음하던 때도 없지 않았다. 믿음이 다르다고 상대를 적대시한 적이 없는 불교가 탄압과 도발의 대상이 되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인류사를 돌아보면 그런 일이 드물지도 않다.

불교가 다른 종교나 이념에 의해 피해를 입거나 존재가 부정당하는 상황을 가리킬 때 우리는 법난(法難)이라는 용어를 쓴다. 불법(佛法)이 당한 재난 또는 환란이라는 뜻이겠다.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 인도에서 지금 불교는 명맥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교세가 미미해졌다. 1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불교 교단은 쇠퇴했다고 보는데, 이슬람의 침략에 따른 박해도 이유의 한 가지라고 한다. 그들은 불교를 우상의 종교로 보아 불교 사원을 파괴했고 불자들을 억압했다고 한다. 일종의 종교적 증오범죄라 할 만한데, 지금도 이런 반인륜적 범죄는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들어온 부처님의 가르침도 항상 환대만 받은 것은 아니다. 당나라 때의 시인 왕유(王維, 699?-759)는 선불교가 보여준 고요한 선정(禪定)의 세계를 시로 아름답게 구현해 ‘시불(詩佛)’로 불렸다. 또 많은 왕조들이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로 쓰인 경전을 한문으로 옮기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방대한 불경(佛經)을 편찬하기도 했다. 돈황석굴이 보여주는 장엄한 불교예술은 또 얼마나 휘황찬란한가. 그러나 늘 이런 황금기만 있지는 않았다.

중국에서는 네 차례 큰 법난이 기록이 전하는데, 이를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 부른다. 북위의 태무제(太武帝)와 북주의 무제(武帝), 당나라 무종(武宗), 후주의 세종(世宗)이 저지른 폐불(廢佛)을 일컫는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문인 한유(韓愈, 768-824)는 유교의 계승자로 자처하면서 <불골표(佛骨表)>를 올려 황실의 불교 수용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처럼 이단에 대한 유교의 적의는 대개 불교를 향했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교도 이차돈의 순교라는 상징적인 박해를 겪은 뒤에야 안착할 수 있었다. 이후 불교는 고려시대 때까지 국교(國敎)라 해도 좋을 만큼 번영을 누렸다. 그러다 유학자의 나라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는 된서리를 맞았다.

이민족과 타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를 숨기지 않았던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완성된 사상인 성리학은 조선 유학자들에게는 전가의 보도였다. 그들은 불교뿐만 아니라 토착 신앙마저도 죄악시해서 종교 혐오, 문화 혐오의 끝판을 보여주었다. 주희의 가르침이 아닌 모든 것들은 사악한 유산이었고, 불구대천의 존재로 간주되었다.

불교에 대해 호의적이고 신앙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유학자들에게 관용이나 공존의 논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런 지독한 폐쇄적이고 타협을 용납 않는 유학자들의 관념과 그 실천은 결국 조선 자체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어 버렸다. 조선조 5백 년 동안 자행된 불교 탄압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정동주가 쓴 부처, 통곡하다(이룸, 2003년)란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공자도 통곡했다

2천년 동안 동아시아의 사상과 문화, 제도를 공식적으로 지배한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도 혐오범죄의 칼날을 온전히 피해가진 못했다. 춘추전국시대 유가(儒家)는 제자백가 가운데 한 유파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평생 천하를 떠돌며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지만, 상객(上客)으로 대우는 받았을지언정 정치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공자의 계승자를 자처한 맹자도, 자기 시대에는 묵적(墨翟)의 이타주의와 양주(楊朱)의 이기주의가 판을 친다면서 세태를 비난했다. 그러나 장자와 같은 사상가는 유가의 구성원을 두고 남의 무덤이나 도굴하면서 먹고사는 비열한 존재로 규정하면서 썩 달가워하지 않기도 했다.

중국에서 유교가 탄압을 당한 가장 뚜렷한 예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일 것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제국의 통치를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사실 도량형의 통일이나 문자의 정비 등등은 중국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정책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부작용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타고난 기회주의자(?)들인 유가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진시황의 사상 검열에 대해 비난하는 선을 넘어 일부 유가 지식인들은 진시황의 허영심을 악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했다. 그런 선에서 그쳤다면 무마되었겠지만, 교만한 그들은 진시황이 무지하고 아둔하다며 공공연하게 모욕을 일삼았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분서갱유가 일어났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솔직히 진시황이 천하의 유가 경전을 다 불태웠고, 천하의 유가들을 다 생매장했다면 후대 어떻게 유가가 존속했겠는가.

중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유가 지식인들의 패거리 정치는 대개 막장을 치달았다. 송나라 때의 문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는 <붕당론(朋黨論)>을 지었다. 붕당의 긍정적인 효과를 갈파하기 위해 쓴 글이지만, 속내를 뒤집어 읽으면 그만큼 소인배들의 붕당 정치가 일상적이었고 썩을 대로 썩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는 유가의 불교 탄압이 횡행하기도 했지만, 유가들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사상적, 정치적 쟁투에 견줄 바는 못 된다. 같은 유가들끼리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다가 자파들끼리의 살육으로 이어진 참극을 역사는 사화(士禍)라 부른다.

소인배들의 붕당 싸움에서 빚어진 조선조 당쟁을 두고 마냥 색안경을 끼고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단 혐오의 칼끝이 밖을 향하다 내부로 변침한 이 어두운 역사는 유가에 의한 유가 탄압의 결정판이었다. 그들은 같은 울타리 안에서도 이단을 찾아내 불구대천의 원수로 매도해 칼질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조선시대 ‘사화’와 ‘옥사’는 정치적인 성격도 강하지만, 유가들 사이에 벌어진 이념 투쟁, 변질된 내부의 유가 탄압이었음도 무시할 수 없다. 나와 다르다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적이었고, 박멸할 대상이었다.

지난 부처님 오신 날 경축 법요식에서 어느 야당 지도자가 합장을 거부하고 관불(灌佛)을 외면해서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가 독실한 개신교인이라 해서 이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불자는 없다. 건전하고 합리적인 신앙심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사회 전역에서 벌어지는 이 혐오와 적대감의 회오리는 양상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과연 나는 그런 광풍에서 자유로운지 작은 일에서부터 반성해볼 일이다. 그 광풍이 내가 적대하는 세력만 휩쓸어버리지 않고 역풍이 되어 내게로 몰아칠 때 말법(末法)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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