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우라 하기 이전에 아주 탕탕 비어 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전에 그런 얘기 한 예가 있어요. “지구는 지금 그림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동그랗지가 않다.” 이런 얘기 한 예가 있거든요. 지구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이렇게 생겼다 그러니까 “아닙니다.” 이겁니다. “그래, 그래! 네 말도 옳고 내 말도 옳은지도 모르지.” 하고선 그냥 대답을 해 두었습니다마는 그렇게 정확하게 봐도 보는 것이 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듣는 것도 그렇지. 전체를 다 듣는다 하더라도…, 우린 묘한 게 있죠. 이 듣는 것도요, 물속이나 허공이나 이 땅속이나 전부 법망이 가설이 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법망도 문이 있어서, 우리가 문을 정하기에 달려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마는 공기가 탁해서 없는 지역도 있고 이랬을 때는 땅속으로 공기를, 나쁜 그 오염을 내뿜기도 할 수 있고 나쁜 공기가 빠지면서 좋은 공기를 올릴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네 마음이 자기를 구덩이에다 넣을 수도 있고
구덩이에서 나오게 할 수도 있는
그런 묘법을 가지고 있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하게 우리가 자재할 수 있는 법을 이렇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발 못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자기를 못 믿기 때문이니 첫째, 자기가 자기를 믿어야 하고 둘째,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이렇게 본다면 상대가 있기 때문에 또 자기가 있거든요. 이 도리를 아는 것, 이 도리를 앎으로써 내가 자유스럽게 이 마음을, 씀씀이를 보고 용도에 따라서 차분차분히 내가 해 나가는 데는 아주 다양하게 쓸모가 있다는 얘기죠.

허무한 생각이 안 들어요. 허무하긴 왜 허무합니까? 뭐가 허무합니까. 생명이 없습니까, 수만 가지 내는, 마음을 내는 법이 없습니까? 또 활용할 수 있는 내 몸이 없습니까? 왜 허무합니까? 순간순간 옷이 더러우면 벗을 뿐인데. 저 해가 질 때에는 반드시 뜨기 위해서 지는 겁니다. 새로이 뜨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찰나에 뜨고 한 찰나에 지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한 찰나예요. 미륵도 한 찰나지 미륵이 따로 없다 이겁니다. 사람이 져서, 이미 해가 져서 다시 돌아와서 뜰 때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하는 것을 미륵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한 찰나입니다. 돌고 안 돌고 이거는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지어 놓고 이름을 붙여 놓은 것뿐이지 항상 여여하고, 항상 영원한 오늘이면서 항상 이렇게 다복하게 살 수 있는 겁니다.

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거는 여러분이 모두, 지난번에 얘기했듯이 그 고를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칼산지옥을 안 가지고 다닙니까, 오간지옥을 안 짊어지고 다닙니까? 모든 살아나온 습에 의해서 그 잠재의식에 그냥 얽히고설켜서, 카세트에 모두 감겨서 각본대로 그냥 쩍쩍쩍쩍, 구르는 대로, 도는 대로 착착착착 나오니 이게 과학이 아닙니까? 착착 나오는 대로 각본대로 살아요, 여러분이 지금. 그러니 이렇게 신비하고 이렇게 오묘한 이 뜻을, 누가 이걸 알겠습니까. 내일 죽을지 오늘 죽을지, 이 옷을 벗을지 그것도 모르고 내일 어떻게 될지 앞뒤를 모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앞뒤를 회전시키게 하기 위해서 여기서 여러분과 저와 동시에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질문하실 게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자3(남) 근래에 보면 신문에도 많이 나오는데, 큰스님들도 많이 그러시고 마음을 비우라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마음을 비우라고. 또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 보면 마음을 비우고 들어가라고 그러는데 사실 마음을 비우자는 것은 욕심을 버리자는 얘긴데 스님의 설법을 들으면 마음을 비울 수가 있습니다만 문 밖만 나가서 물질만 딱 보면 마음을 비울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길을 말씀 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큰스님 여러분이 지금요, 마음을 비우라 하기 이전에 아주 탕탕 비어 있습니다. 그런 걸 왜 모르십니까? 본래 비워져 있습니다. 돈을 억만금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건 가진 게 아닙니다. 비었습니다. 자기의 추에 의해서 그냥 돌아갈 뿐입니다, 재산도 모두가. 여여하게 쓰십시오. 여여하게 사랑하고 여여하게 쓰시고 여여하게 그냥 하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처가 되어 봤어야, 그것도 이름해서입니다. 부처가 되어 봐야 보살이 될 줄 알고 보살이 될 줄 알아야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참사람이요, 이름해서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신도 자기요, 보살도 자기요, 부처도 자기요, 중생도 자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자기 태초의 모습이,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자기 이 오장육부의 세포를 타고 자기의 그 태초의 모습들이 지금 자기 속에 우글우글하고 있습니다. 갖은 각색을 하고. 그런데 자기가 선장으로서 한생각을 내면서 들입다 지금 여여하게 뱃놀이를 하고 가는데 “흥!” 소리는 못 지르나마, 노래는 하지 못하나마 왜 여여하게 가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놔라” 하기 이전에 놔져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놓지 않고 있다면 지금 생각에 의해서 그냥 잔뜩 끼고 있어서 그렇지, 그건 여러분의 탓이에요. 그냥 돼 있는 건, 여기 지금 오실 때에도 그 발자취가 없는 겁니다. 그 발자취는 금이 아니고 보석이 아니고 돈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무심하게 왔기 때문에 없는 거지, 아마 발짝 하나 딛는 데 금은보화가, 하하하…, 10억씩 붙어 있다고 그런다면 ‘아휴! 한 걸음에 10억씩 붙어 있는데 내가 이거를….’ 이럴 겁니다. 그러나 이거는 뭐, 하나도 돈 내는 것도 없고 돈 붙는 것도 없고 뭐, 하나도 이익이 없으니까 그냥 태연하게 그냥 왔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나가는 것도 태연하게 그렇게 가십시오. 여러분이 집에 들어가실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가실 때 신발을 내가 벗고 들어간다는 생각이 있이 들어가십니까, 신발을 벗는다는 생각이 없이 들어가시는 겁니까? 똥 누러 갔을 때 똥을 누러 간다고 생각을 하고 갑니까, 그렇지 않으면 똥만 마려우면 그냥 뛰어 들어갑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똥 버리는 건 아깝지 않고 금 버리는 건 아깝거든요. 마음이 이렇게 괴상망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요, 내가 나를 한번 봅니다. 돈이 백만 원이 들어왔든 천 원이 있든 그것은 한 개도 없습니다. 여러분한테 한 개도 받은 예도 없고 준 예도 없습니다. 또 한 예도 없고, 여러분이 나에게 한 예도 없습니다. 주고받은 게 없어요. 그건 왜 그러냐? 이 집이 이렇게, 이렇게 절이 있어도 이게 내 것만이 아니고 바로 여러분과 동시에 나와 같이 여래의 집이기 때문에, 여래의 집이기 때문에 나는 욕심부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이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이 가정을 가지고 있고 내 자식과 아내와 다 같이 이렇게 있으면서도 그것은 바로 동시에 식구들 것이기 때문에 내 거라고만 할 수 없으니 그냥 놓으시고 사세요, 그냥 그대로.

아이 글쎄, 여러분이 아버지로서의 몸이 자기 몸입니까? 바로 걔네들의 아버지지. 왜 자기 겁니까? 자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부인의 남편이고 그 자식들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아버지가 될 때 자기라고 하겠습니까, 남편이 될 때 자기라고 하겠습니까. 똑바로들 말씀해 보십시오. 어떤 거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있겠나. 그렇기 때문에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거라고 할 것도 없고 남의 거라고 할 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내가 여여하게 그냥, 벌게 되면 벌고 못 벌게 되면 못 벌고 이러는 반면에 내가 그대로, 버는 것도 못 버는 것도 그냥 그대로, 그대로입니다.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쓸 때 쓰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 우주 천하가 다 내 거라면 무엇 때문에 그걸 짊어지고 다닙니까? 짊어지고 안 다녀도 그냥 허허지 늘어진 게 바로 나고 내 생명이고 내 것이고 나 아님이 없고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도리를 꼭 공부하십시오.” 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자아내려면 자기 주인공을 믿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왜 자기를 낮게 생각을 합니까. 낮게 생각도 말고 높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어느 신도가 아파서 누웠는데 석존을 뵙고 싶어서 무척 아프면서도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도가 그 밑의 제자 스님들한테 가서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고을의 아무 데에 사는 아무개는 죽을 날이 며칠 안 남게 이렇게 아파서 누웠으면서도, 한 번만 뵙고선 갔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고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까 석존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그러면 가야지.” 하고서 일어나서 가셨습니다. 가셨는데 이 아픈 사람이 석존이 들어오시는데 어떻게 누워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어나려고 하니까 드러누우라고 했습니다. “이 육신은 드러누워 있으나 앉아 있으나 일어나나 그것은 상관이 없다. 단, 네 마음이 그토록 그렇다면 일어나서 그렇게 반겨 줄 수 있는 그 진정한, 진실한 마음이 있노라.” 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절을 삼배 했느니라.” 하거든요. 그 뜻이 무어겠습니까? 우리네 마음이 말입니다,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네 마음이 자기를 구덩이에다 넣을 수도 있고 구덩이에서 나오게 할 수도 있는 그런 묘법을 가지고 있답니다.

여러분이 그 말만 들었지 이론으로는 정말이지 저보다도 이 세상에 모두들 유명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말로, 이론으로서 무불통지하셔서 말을 참 잘하신다 하더라도 못하는 나만 못한 겁니다. 여러분이 그 뜻을 아십시오. 열 번, 백 번, 만 번 말을 잘한다 해도, 또 물질적으로나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율법을 지킨다 해도 이 무(無)의 참, 두루 법은, 무의 세계의 두루 법은, 이건 따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 두루 법은, 두루 모습은 무궁무진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행하기가 어려운 거지, 한 번 행할 때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행할 때에 한 주장자를 탁, 주장자가 동그랗게 말려서 가지고 다니는 사이 없이 가지고 다니다가 주장자를 한번 탁, 이렇게 용도에 따라서 딱 들었다 하면 쭉 펴지면서 소리가 요란하게 날 때에는 우주간 법계에서 다 그 소리를 듣고 같이 호응을 해 준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몰라서는 아니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 법이.

지금 우리 조그마한, 반쪽 된 나라에서도 그렇게 가난하게 살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이 부자라면 허허 웃으면서 나물 먹고도 물 마시고 요지로다가 이빨 쑤시듯 참, 반쪽 나라에서 살면서도 이렇게 여여하고 좋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그 능력입니다.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갈 수 있고 참, 손 없는 손이 두루 할 수 있고 발 없는 발이 길 없는 길을 두루 할 수가 있는 이 묘법을 가지고 있다면 구태여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우리가 지금 율법으로서 또 우리가 지금 현재에 물질적인 생활로서, 물질적인 과학으로서, 물질적인 공업으로서 이 세상 모두 살아나가는 문제, 경제 이런 것도 모두 포함해서 한 추에 모두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짓말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철두철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 도리를 아신다면 참 자비하기도 하지만 사랑, 값싼 사랑이 아닙니다. 이건 더럽고 깨끗한 걸 한데 합친 게 자비니까. 이렇게 자비하고 묘하고 이렇게 당당한 도리가 어디 있을까 하고, 이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이런 도리가 바로 여기 나한테 있구나 하는 걸 아실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까 내 말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마음, 이론적으로 아는 것, 하늘을 뚫을 정도로 아는 게 있다 하더라도, 말이 있다 하더라도 다, 그 참자기 안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한 문(門)으로 들었다가 한 문에서 나오는 거니 모든 것은 그 나오는 대로 거기에 다시 놓으십시오. 그러면 빈 카세트가 될 겁니다. 바로 이것이 비우는 공부며, 아주 탕탕 그릇을 비우는 공부입니다. 비워야 우리가 항상 집어먹을 수 있고 그저 닥치는 대로 넣을 수 있고…, 항상 비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 이 소리를 누가 모르겠습니까. 여러분이 다 아실 테죠.

아까 정락 스님도 효도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러셨지마는 우리가 옛날에 그렇게 길게 늘여서 하는 효도보다는 지금 빠르게 효도하는 법이, 바로 우리의 마음공부 하는 이 도리가 유무를 같이 균등을 잡아서 다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도리입니다. 따님이 저기를 가고 또 부모가 어디를 가고 그랬을 때에 앉아서 모시고 갈 수 있는, 내가 모시고 갈 수 없고 또 데리고 갈 수 없는 이러한 문제가 있더라도 그냥 남이 볼 때는 혼자 가는 거지만 바로 일체제불이 다 같이 할 수 있는, 그 일체제불이 한마음에 들어서 보신이 보하고 가듯 같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여러분이 기르신다면, 아마 한국에서 외국으로 무역을 해도 손색이 없고, 또 어떤 회사를 한대도 손색이 없고, 정치를 한대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모든 걸 앉아서, 무의 세계에서 모습 없는 모습으로서 다 해 놓으면서 거죽으로는 보이는 데서 다 하고 이렇게 하면, 안 보이는 데서 보이는 데로 자기의 능률이 그대로 나오고, 나오는 대로 씀씀이를 또 다 다양하게 쓰고 또 들이고 쓰고 내고 하는 그러한 도리가 바로 우리 생활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생활이 도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재밌는 질문도 하시면 나도 또 배울 점이 있을 테죠. 여러분하고 저하고 이렇게 같은 한자리에 있을 때는 저도 배우는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공부하는 겁니다. 여러분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저도 같이 행 한 번 하는 데에 우리가 목마르면 물 마실 수 있는 이러한, 이 물 한 모금 마시고 한생각에 저 외국에도 빛보다 더 빠르게 갈 수 있고 올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이것이 참 능수능란하다면 어디 군사가 없겠습니까? 죽은 사람도 군사로….

아니, 내가 그전에 보니까요, 이렇게 앉아 있으면 얘기가 길어져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죽은 군인들을 보니까 다리가 떨어진 사람은 다리가 떨어졌다고 알고 있고 팔이 부러진 사람은 팔이 부러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생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글쎄. 그러니까 자기가, 영령이 말입니다, 이게 떨어졌다고 생각을 하니까 싸움터에 나가지 못하는 겁니다. 체가 없는 것이 무슨 팔이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가 있습니까? 마음이 말입니다. 육신이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왜 마음이 떨어집니까? 팔을, 발을 말입니다, 수만 개를 달려 해도 달 수가 있지 않습니까? 몸뚱이는 없이 팔만, 손만 그냥 만들어도 수만 개를 만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하하.

아니, 지금 싸움이 나서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위태하다, 정치하는 데서 잘못한다 하더라도 이 손만 말입니다, 손만 많이 만들어서 그냥 수없이 갖다가 그냥 전부 펼쳐 놓으면 그 보이지 않는 데서 손만 다니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몸뚱이 없이도 좋고 눈만, 눈알만 보낼 수도 있고 귀만 보낼 수도 있고 뭐, 손만 보낼 수도 있고 발만 보낼 수도 있고요, 몸뚱이 다 보낼 수도 있고, 다 같이 할 수가 있고, 금방금방 화해서 나투면서 찰나에 장관이 될 수 있고 국방부장관이 될 수 있고, 찰나에 정치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찰나에 우주의 생명들이 될 수 있고, 한 찰나에 뭐는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 여러분은 글쎄요, 마음을 내놓으라면 마음 내놓을 게 없거든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먹을 내놓기도 하고 발을 들어서 그냥 콱 치면서 “이놈아! 이거다, 이놈아.” 하고 때리거든요, 물어보면. 그렇게 하는데 그것이 어디로부터 좇아 나오는 겁니까? 그래서 묘법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생각할 땐 자기는 언제나 미약하고 부처가 될 수 없고, 무슨 도는 얼마만큼 가야만 구하고 뭐 어쩌고 그런다고 그럽니다. 구하기는 뭘 구합니까, 자기한테 있는 건데. 발견해서 쓰라는데도 글쎄, 구하기는 어디서 구합니까? 자기한테 본래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진화됐고 이렇게 창조가 됐다, 우리가 형성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질문자4(남) 아침에 예불을 드릴 때 잠시잠깐 눈을 감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오색찬란한 빛이 나는 것 같았어요. 그 오색찬란한 빛을 보고 돌아서서 조금 있으니까 제주도 보살님이 25명이 와 계시대요. 지금도 그런 빛을 한번 보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그걸 답변 좀 해 주십시오.

큰스님 빛이라는 것은, 우리가 공부하는 과정에 오색이다 이러는 것도 있지마는 백색이 나타날 때도 있고 또 청색이 나타날 때도 있고 홍색이 나타날 때도 있고 이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여러 가지 씀씀이로 쓰이는 거죠. 용도에 따라서 씀씀이가 쓰이는 건데 공부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뜻을 가르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말입니다. 그래서 오색이다 하는 것을 볼 때는 오온의 이 진리를 그대로, 색색 가지의 차원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주어져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돌아가고, 오색이 꽉 차서 돌아가고 있죠. 그래서 그것을 가르치느라고 그런 거니까 밖으로 내가 이걸 봐서 ‘아, 나는 이런 것도 보인다.’ 이렇게 해서 자기 마음을 위로 올리지 말고 항상 고정되게 마음은 두면서, 예를 들어서 마음을 항상 이렇게 중도에다 두면서, 고정되게 두는 게 아니라 중도에다 두면서 항상 이렇게…. 그것도 바로 내 주인공 속에서 나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내 전자의 나 나기 이전은 과거의 모든 것을 전부, 쫓기고 쫓고 이러던 걸 다 알고 있는데 지금 현재의 나가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자의 내가, 나 나기 이전 아비가 지금 현재의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아낌없이 그렇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볼 때에 바깥으로 이렇게 우쭐하지 말고, 그것조차도 거기서 나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생각을 해서 놔야죠, 또 그것도. 그러니까 빛이나 어떠한 것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에 놓으라는 소립니다. 아는 건 알고 놓고, 터득을 하는 건 터득을 하는 대로 놓고. 터득은 했을망정 깨달은 건 아닙니다. 언제나 깨달았다고 모두들 이렇게 얘기들을 하는데 그 용어는 좀 더 귀중하게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느꼈다’ 또 ‘그런 걸 과정에서 좀 더 터득을 했다’ 이런 말로 씀씀이를 썼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안에다 자꾸…, 내가 그랬죠. “세 번 단계 없는 단계가 있다. 첫째, 나를 비우기 위해서, 습을 놓기 위해서 보림을 하고 모든 것을 놔라.” 이렇게 했습니다. 놨더니 내가 싹이 났습니다. 싹이 났으니까 내가 그 세파를 헤치고 비바람 모든 걸 맞아 가면서 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시 또 놔야 됩니다, 다시. 그것이 뭐냐 하면 나를 내가 알았다면, 바로 깨달았다면 나만 깨달은 거지 너와 나와 같이 깨달은 게 아닙니다. 폭을 넓힌 게 아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발견했을 때” 이렇게 얘길 하죠. 깨달았을 때가 아니라 “자기를 발견했을 때” 이렇게 용어를 씁니다. 그래서 발견했을 때는 반드시 발견했기 때문에 내 지팡이가 되는 겁니다.

(녹음 안됨) … 또 면벽을 합니다. 면벽이라고 하는 뜻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숙달을 시키기 위한 면벽입니다. 이것이 다니면서도 면벽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한테다 또다시 놔 가면서 그거 숙달을 시키죠. 이 숙달을 시키는 건 나는 죽어서 알았는데 상대방과 나와 더불어 같이 죽어서 그 너와 나와 둘이 아님을 또 알기 위해서 그렇게 숙달을 시키는 겁니다. 그래 너와 나와 둘이 다 같이 더불어 죽었는데 또 너와 나와 같이 더불어 죽었기 때문에 같이 내가 하나로 이렇게 될 수도 있고, 네가 될 수도 있고 내가 될 수도 있는 그 도리를, 내가 나툼을 모른다면 그거는 팡이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알기 위한 세 가지의 도랑 없는 도랑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12인연법에 의해서도 그렇고 또 사무 사유를 한데 합친 우리의 만법의 기준을, 근본을 우리가 송두리째 알아서 그냥 자재력을 그대로 응용할 수 있는 그런 분이라야 열반계에 이른다고, 이름해서 그것도 그럽니다. 그래야 우리 배꼽놀이를 할 때 배를 탁 한 번 치면 천하가 울고 배꼽 한 번 탁 치면 또 천하를 받칠 수도 있고, 한 번 탁 치면 굴릴 수 있고 탁 디딜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법입니까? 그러니 그것이 모두 그런 뜻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거 한두 건에 의해서 쓰는 법이 아닙니다.

예. 그리고 지금 세 번 울렸으니까 우리 산회가를 좀 부르고 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허허허.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7년 5월 3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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