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공덕음식, 두부’ 학술세미나·시연회

우리네 식탁에 항상 올라가는 두부. 조선시대 두부는 왕실의 제향 음식으로 이는 조포사(造泡寺)로 지정된 사찰에서 만들어졌다. 두부의 전래와 보급이 사찰을 중심으로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단초다. 두부를 통해 사찰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주지 계호)와 한국불교문화사업단(단장 원경)은 7월 12일 진관사 함월당에서 ‘공덕음식, 두부’를 주제로 학술세미나와 시연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세미나에서는 동아시아와 한국의 두부 역사와 보급, 조선시대 조포사로서의 진관사의 역할 등을 조명하는 연구 논문들이 발표됐다.

두부 13~14세기 한반도 전래
시·문헌 등에 사찰 두부 기록
진관사, 창릉·홍릉 조포사 役
조선 후기 신흥사 조포속사로
‘公’이란 18세기 과제 반영돼

진관사 두부음식 탕·적 ‘다양’
제례용이자 대중공양도 활용
신년엔 신도와 두부 나누기도

사찰 중심으로 두부 전래
특히 심승구 한국체대 교양학부 교수는 ‘조선시대 조포사와 진관사’를 통해 두부라는 음식이 진관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 눈길을 끌었다.

심승구 교수에 따르면 두부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문인 목은 이색(1328~1396)의 시(詩)에서다. 그는 자신의 문집 〈목은시고〉에 5편의 두부 관련 시를 남겼다. 그중 1365년(공민왕 14)에 이인복과 식사 자리에서 두부를 먹었다는 내용을 담은 시는 현존하는 첫 두부 관련 기록으로, 이색은 두부를 먹는 분위기를 마치 “산승의 거처와 같다”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다른 이색의 시에는 관악산 신방사 주지가 두부를 대접한 것을 고마워하는 내용이 담기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심승구 교수는 “고려의 음식을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1123)〉이나 〈동국이상국집(1251)〉에 두부 관련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두부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말 사이에 전래됐을 것”이라며 “이색의 시 가운데 관악산 신방사 주지에게 두부를 대접받는 장면은 두부의 도입이 사찰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고려 말에 전래된 두부는 조선에 들어와서 사찰음식이자 왕실음식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조선 초기 두부는 왕실의 제향(祭享)과 공상(供上)의 음식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두부를 만드는 데 필요한 간수를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고위 관료도 두부를 제조할 수 있었으나 매우 소수에 불과했다. 그나마 사족이나 일반 백성들이 두부를 접할 수 있는 곳은 사찰이었다는 게 심승구 교수의 설명이다.

조선 왕릉과 조포사 진관사
사찰과 두부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중요한 역사적 단초는 ‘조포사’다. 이는 퇴계의 제자 구봉령(1526~1586)의 시 ‘조포사’에서 확인되는 데 그는 괴산의 공림사를 조포사로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해 심승구 교수는 “16세기 세조의 원당인 공림사를 조포사로 부른 것은 국가의 승역체계와 상관없이 사찰음식에서 두부가 차지하는 비중과 당대인들의 사찰 인식을 엿보게 하는 단서”라고 설명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수륙사(水陸社)를 창건하며 국행수륙도량으로 성장한 진관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수진궁 묘의 재궁(齋宮)과 서오릉에 속한 창릉과 홍릉의 능침조포사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두 곳 왕릉의 조포사 역할은 진관사에게 엄청난 재정 부담을 안겼고, 이는 사찰을 폐사 직전의 위기까지 몰고 갔다.

이런 재정 부담이 개선된 것은 정조의 조포사 정비 계획 때문이었다. 순조 대에 이르러 진관사는 강원도 양양부 신흥사를 조포 속사(屬寺)로 정할 것을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심승구 교수는 “당시 왕은 능침포사는 전례가 있으니 허락하되 신흥사가 해당 지역에서 맡고 있는 제반 승역을 면제토록 관찰사에게 지시했다”면서 “이에 따라 창릉과 홍릉의 조포사는 진관사가, 진관사의 조포속사는 신흥사가 맡는 능침 제향 및 수호관리체계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문헌에 나타난 진관사 두부요리
그렇다면 문헌에 나타난 진관사의 두부요리는 어떨까. 심승구 교수에 따르면 진관사의 두부는 〈보한재집〉 〈필원잡기〉 〈용재총화〉 등 15세기 문헌에서 확인된다. 가장 직접적인 것이 신숙주의 문집 〈보한재집〉으로 당시 대식가였던 홍일동 등과 진관사를 찾았는데 홍일동이 포증(泡蒸, 두부찜)을 일곱 사발을 먹어 승려들이 놀라워했다는 내용이 있다.

심승구 교수는 “진관사의 포증은 사찰음식에 국한됐던 것이 아니라 당시 서울의 양반가에서도 즐긴 음식이었을 것”이라며 “이처럼 포증은 15세기 사찰을 비롯한 사대부가에서 퍼진 음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조포사로서 본격적인 역할을 했을 조선 후기 당시 진관사 두부 요리는 제향 음식으로 탕(湯)과 적(炙, 꼬치구이)으로 만들어졌다. 탕은 전증(煎蒸)·백증(白蒸)·잡탕(雜湯)으로 구분돼 만들어졌다. 전증과 백증의 차이는 후추 사용 유무이며 잡탕은 복기(卜其)라고도 불렸다.

심승구 교수는 “제향의 두부는 진관사의 조포승 1인이 참석해 만들었고, 제향 하루 전에 도착해 두부를 준비했다”면서 “창릉 제향의 두부음식은 곧 진관사의 두부음식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진관사에서 만든 적, 탕과 두부 요리는 왕릉의 제사용이었지만 반드시 사찰에서만 쓰였다고 보긴 어렵고 대중공양용으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잡탕의 경우 복기라는 속칭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볼 때 일반 민가서도 많이 즐겼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심승구 교수는 18세기 추진된 조선 왕실의 조포사 중건은 ‘공(公)으로의 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투영된 것으로 봤다.

그는 “조포 속사의 잇따른 출현은 단순히 왕릉 관리를위해 국가가 사찰을 늘이려는 의도보다는 사찰의 부담을 경감시키려는 지방 사찰 스스로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며 “결국 조포사는 유교사회에서 한계는 있었으나 공으로서의 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담긴 개혁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했다.  

공덕음식으로서 두부
이와 함께 이날 세미나에서 사찰음식명장이자 진관사 주지인 계호 스님은 진관사의 두부요리와 공덕음식으로서의 두부를 설명했다.

스님에 따르면 진관사는 섣달그믐부터 정월 보름까지 두부 만들기를 이어간다. 진관사는 섣달그믐에는 두부를 만들고 두부소를 넣은 만두를 빚어 묵은 제사와 조왕불공을 한다. 또한 두부를 만들어 신도들과 나눴는데 이는 진관사가 2~3일에 걸쳐 하는 연례행사였다.

진관사의 두부 나눔 풍습은 주요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1930년대 기록으로는 이상억 서울대 명예교수의 증언이 있다. 그의 증조모는 진관사의 대시주자였는데 그 인연으로 매년 섣달 그믐에는 진관사로부터 두부전골을 받았다고 한다. 이 두부전골은 〈서울의 한실-홍문섯골 이벽동댁〉에 소개돼 있다.

1960년대 이후에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진관사 사격을 재건하며 불사에 동참한 신도들을 위해 두부 나눔이 섣달그믐부터 정월보름까지 이어졌다.

다만 물자가 부족하던 시기이여서 1930년대 두부전골과 같이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만들어 보내기보다는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도록 조리하지 않은 갓 만든 생두부를 주로 보냈다.

이에 대해 계호 스님은 “1930년대와 1960년대 이후의 관련 기록과 구술채록을 보면 섣달그믐과 정월보름에 햇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신도들과 나누며 공덕을 회향했다”면서 “이는 민간의 세찬 풍습과 유사하며 불교민속적 측면에서는 약 100여 년의 사찰음식 두부 관련 전통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어 “진관사의 두부는 사찰음식 측면에서 공덕을 외호하는 신장인 제석천과 조왕이 섣달그믐 세시풍속과 관련해 나타나며 이를 맞춰 두부음식을 나누는 공덕의 회향문화를 담아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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