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수 정신과 전문의

참선지도자협회 참선아카데미
주제 : 불교정신치료는 무엇인가

연일 뉴스에 사회범죄 소식이 보도된다. 그리고 범죄자가 겪는 정신질환도 언급된다. 소위 과학기술의 발달을 인간의 정신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은 더 이상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아프다. 마음이 많이 아프다. 마음이 아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불교정신치료라는 하나의 정신치료체계를 정립한 전현수 정신과 전문의는 76일 서울 참불선원에서 진행된 제2기 참선아카데미에서 마음의 괴로움을 덜어낼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강의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전현수 정신과 전문의는… 경남고를 졸업하고 부산대서 의학 학사를 받았다. 한양대 대학원서 의학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으며, 1990년부터 전현수신경정신과의원 원장을 맡고 있다.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고, 법원행정처장 감사장을 받은 바 있다. 지난해에는 저서 '불교정신치료 강의'로 제9회 원효학술상 비전임교수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괴로움에 박식한 불교
저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리고 일찍부터 불교수행을 공부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저도 불교정신치료라는 어찌 보면 새로운 체계를 세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보통은 불교와 정신치료를 따로 보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이 둘이 딱 붙었습니다. 그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불교 자체가 정신치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부하고, 경험하고, 실제로 적용해보니까 불교는 어떤 정신치료보다도 훌륭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불교정신치료라는 것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는데요. 어떤 목표를 세우고 도달하겠다는 마음으로 거기까지 이루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흑인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을 지난 콜린 파웰에게 사람들이 뒷배도 없이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말했습니다. 자신은 20대 때 닭고기 가공업체에서 청소를 했고, 그때 어떻게 하면 청소를 잘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요. 그러다 여기까지 왔다고 말이죠. 저도 마찬가지로 불교정신치료를 목표로 세웠던 건 아닙니다. 그때그때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다가 도달하게 된 거죠.

제가 1987년에 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1990년에 개업했습니다. 하루는 선배가 강의를 제안했는데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강의가 처음이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선배에게 물었죠. 그 선배는 영어로 된 책을 하나 주면서 달달 외워 가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외우면서 보기 쉽게 카드도 만들고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강의 당일 강의장에는 40~50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지만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알게 된 건 책을 내가 아무리 이해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죠. 바로 경험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진료실에서 보면 당연히 인과의 법칙에 따라 발생한 걸 실패로 규정하고 상처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현대그룹을 만든 정주영 회장에게 사람들이 찬사를 늘어놓습니다. 그때 정 회장은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지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그런 점에서 실패가 있다고 할 순 있겠지만 세상에는 많은 일이 생겨나고,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정신과 전문의의 길을 걷던 저는 우연한 인연을 만납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고익진 동국대 교수님입니다. 당시에 저는 서른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교수님께서는 불교란 괴로움을 해결하는 완벽한 시스템이다. 당신이 하는 정신의학도 결국 정신적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불교의 용어만 바꾸면 훌륭한 정신의학체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를 모르던 제게는 정말 충격적인 얘기였습니다. 그때부터 교수님 밑에서 불교공부를 시작했고, 세상이 구성된 원리를 알고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는 걸 느꼈습니다. 불교의 업설을 생활에 적용해보니 도움이 참 많이 됐거든요.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사람들의 삶이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2003년에는 사띠 수행이란 걸 알고 미얀마에 가서 한 달간 수행했습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저녁 9시 반, 10시쯤 자는 일과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데요. 결과적으로 얘기하자면 몸과 마음은 다 보여주는데 우리가 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과학자들이 자연법칙을 아는 이유는 자연현상을 유심히 봤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자연은 인간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2007년과 2008년에는 4부 니까야를 다 읽었습니다. 그때 불교와 정신치료에 대한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미얀마로 떠나 사마타 위빠사나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순간순간 몸과 마음을 맞이하는 건 거시적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삼매를 닦으면 통상적인 의식으로 보지 못하는 게 보였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각자의 손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다고 여길 겁니다. 그런데 삼매를 닦고 보면 그건 그저 관습적인 실재입니다.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가 사라지는 걸 알게 됩니다.

밥을 많이 먹으면 체중이 늘어난다는 걸 알죠. 그런데 정신적인 건 눈에 안 보입니다. 삼매를 닦아 지혜의 눈이 열려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질환이 어떻게 발생하고, 이를 회복하려면 유익한 마음이 축적돼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이때부터 불교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고 불교와 정신치료가 하나가 됐습니다.

마음까지 아플 필요 없다
정신치료 종류는 굉장히 많습니다. 2016년도에는 대략 1000가지가 있다고 알려졌고요. 대표적인 건 프로이드 정신분석, 융의 분석심리학, 칼 로저스의 내담자 심리치료,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등이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1900년대 프로이드에서 시작된 정신분석이 최초의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가장 과학적인 정신치료는 2600년 전 부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정신치료 본질은 창시자에 의해 시작됩니다. 창시자들이 각자의 경험과 사유에 바탕을 두고 학파를 만들죠. 프로이드도 학파를 세웠지만 제자들이 보완해나갔습니다. 모든 학파에는 인간을 이해하는 틀이 있습니다. 그 이해의 바탕 위에서 치료자와 환자가 관계를 갖고, 사람의 문제에 도움을 주는 걸 본질로 하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불교도 인간을 이해하는 틀이 있습니다. 아주 완벽한 틀이죠. 프로이드나 융 같은 학자들은 자기경험과 사유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든 것이 관찰에서 시작합니다. 통상적인 의식을 넘어선 관찰인데요. 부처님이 삼매를 닦으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법을 여실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인간을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에 박식합니다. 그리고 원인과 해결을 완벽하게 압니다. 그래서 제가 세운 정신치료는 3가지 원리에 기초합니다. 첫째는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이뤄져 있는데 어떤 속성을 갖는지 잘 아는 겁니다. 둘째는 내가 몸과 마음을 잘 알아도 세상의 원리를 이해해 공존하며 사는 겁니다. 셋째는 세상의 원리 같은 큰 지혜 말고도 살아가며 순간순간 어떻게 지혜를 닦을 것인가입니다.

몸을 잘 관찰해보면, 조건에 따라 생명활동이 활발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말이죠. 이런 생명활동은 중립적 성격을 갖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예를 들어 자애수행을 한다고 해보죠.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중립적인 사람이 등장합니다. 중립적인 건 대략 얼굴만 아는 정도의 사람쯤 되겠죠. 생명활동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 좋고 싫음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관찰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발과 다리가 알아서 걸어 다니는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 몸이 움직일 때는 움직이게 하는 뭔가가 있는 겁니다. 배가 고프다고 가정해보죠. 아주 중립적인 생명활동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배는 고프고 먹을 게 없어서 짜증이 납니다. 배고픔이라는 생명활동에 부정적으로 반응한 겁니다. 반면 누군가는 내가 소화기능이 참 왕성한가보다하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을 겁니다. 긍정적인 반응이겠죠.

이처럼 생명활동 자체는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영향이 생길 뿐이죠. 몸이 아프거나 돈이 없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그걸 견디지 못해 마음이 힘든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강화시키면 어떤 것도 나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생각을 줄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몸이 아플 때 마음도 따라 아픕니다. 몸이 아플 때 몸 아픈 것만 있고, 마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회복속도도 빨라집니다. 몸이 아프다는 건 아플만한 원인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건 결과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새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2의 화살을 맞지 말라는 얘긴데요.

몸이 아픈 게 제1의 화살이라고 한다면, 마음이 아픈 것은 제2의 화살입니다. 사람들은 아플 때 짜증을 내면 좀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뭔가를 잘못 먹고 배가 아프다고 가정해보죠. 내가 그걸 왜 먹었지, 누가 나한테 먹으로 권했지, 얼마나 오래 아플까 등등 근심걱정이 뒤따릅니다. 그러면 우린 화살을 더 맞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몸은 조건 따라 변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괴로움도 나에게 안겨주죠. 내 것이라고 할 수 없겠죠. 몸이 아플 때 , 몸은 원래 그렇지하면 딱 멈추게 됩니다. 더 이상 마음의 동요도 없죠. 이게 바로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프지 않는 방법입니다. 지금 내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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