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회개혁 꿈꾼 개화파 산실
불교사회개혁 꿈꾼 개화파 산실
  • 김경집 교수
  • 승인 2019.07.0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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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
신촌 봉원사 삼천불전 앞으로 연꽃이 만개해 있다. 근현대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파들이 이동인 등 개화승들과의 회동을 가졌던 역사가 있다.

 

영조의 첫째 손자 의소

경복궁 서쪽 사직단을 거쳐 사직터널을 지나면 독립문역이 나온다. 독립협회가 세운 독립문에서 비롯된 역명이다. 이 문은 1884년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던 1897년 11월에 세웠다. 중국사신을 환영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것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서구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염원의 표현이었다.

그곳에서 금화터널을 넘어 고가 밑에서 오른쪽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봉원사가 나온다. 봉원사의 창건 연원은 제법 오래되었지만 사격이 커진 것은 조선 영조 때이다. 영조는 재위 26년(1750) 8월 27일 손자를 보았다. 세손 의소(懿昭)로 정조의 형이다.

영조 세손 ‘의소’의 원찰
‘이동인’과 개화파 만남
불교사상도 갑신정변 반영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손은 오래 살지 못하고 영조 28년(1752) 3월 초4일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죽었다. 의소는 아현동에 묻혔다가 훗날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첫손자를 잃은 안타까움에 할아버지 영조는 영인군 시절 살던 창의궁에 의소의 묘(廟)를 세웠다. 그곳이 한성부 북부 순화방으로 지금의 종로구 통의동이다.

4월 12일 죽은 세손을 위해 시호를 내렸다. 세손의 덕성이 순숙(純淑)한 것을 의(懿)라 하고 용의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하였다. 좌참찬 홍상한(洪象漢)이 세 번 향을 올리고 세 번 전작(奠爵)한 다음 독책관(讀冊官) 성천주(成天柱)가 꿇어앉아 영조가 지은 책문을 읽었다.

“너 세손아! 내가 너를 안았을 때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상서로운 빛 별자리에 뻗치더니 이윽고 네가 태어났으며, 특이한 모습은 해와 달의 표상처럼 빼어났는데 더구나 적전(嫡傳)에 있어서랴. 오직 영특하고 온화한 모습은 자연히 제왕가(帝王家)의 귀상(貴象)이 있었고, 인후(仁厚)하고 자효(慈孝)한 성품은 어린 나이의 양지(良知)가 아님이 없었구나. 소저(小邸)의 명호를 정함에 이르러서는 늘그막 갑절의 위로가 되었다.

기질은 겨우 두서너 살에 엄연히 덕기(德器)를 이루었고, 총명은 60여 자의 예서(隷書)를 능히 분별하였다. 오래 침전 곁에 두고도 때로 자리가 비면 문득 허전하였고, 항상 밥상 곁에 앉아서 먹을 때마다 반드시 권하였는데 심지어는 공교로움을 싫어하고 투박함을 좋아했고 미쁘게도 검약을 품부하여 순박함이 터를 잡았었다. 지극한 사랑으로 어린이를 안고서 오직 열성조의 도우심에 감사하였고, 큰 책임 물려줄 곳이 있으니 거의 종사의 걱정이 없음을 다짐할 수 있었다.”

영조의 손자 사랑은 남달랐다. 의소의 묘에 기병 20명을 배치하여 3년 동안 수호군(守護軍)과 번을 갈아 들게 하라고 명하였다. 손자의 죽음에 친히 상복을 입었으며, 소상에는 도승지 조명리(趙明履)에게 명하여 제문(祭文)을 쓰게 하였다. 그리고 의소와 관련된 신하들은 외임(外任)에 있는 자도 와서 참여하도록 하였다.

영조는 30년(1754) 3월 4일 의소의 대상에 친림하였고, 일찍이 사부(師傅)를 역임한 대신도 모두 입참(入參)시켰다. 그런데 행사직(行司直) 이기진(李箕鎭)이 외방(外方)에 있음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았다. 분노한 영조는 그를 파직하고 다시 등용하지 말하는 명을 내렸다. 그 후에도 영조는 말년까지 틈나는 대로 의소의 묘를 찾았다.

의소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영조는 손자의 천도를 위해 봉원사를 원찰로 삼았다. 그리고 용인의 땅과 해주 수안군에 있는 토지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황해감사 이문(移文)이 수안군은 재정이 어려운 곳이고, 봉원사는 이미 용인의 땅을 받았으므로 이중으로 지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상소하였다. 그 뜻을 받아들여 수안군 땅은 본 고을에 소속시켰다.

의소의 원찰과 영조의 배려로 사세를 확장한 봉원사는 근대로 이어져 개화파의 산실이 될 수 있었다.

봉원사 출신 개화승 이동인

근대 불교계 개화승의 대표적인 인물이 이동인이다. 그의 출신에 대해 봉원사라는 견해와 통도사라는 견해가 있다. 전후사정을 고려해보면 봉원사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개화파의 일원으로 그들과 함께 개화사상을 공부하고 불교를 토론하려면 빈번하게 접촉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한양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봉원사가 제격이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박규수에게 배웠다. 지금 헌법재판소 주변인 한양 북부 가회방 재동 박규수 집은 개화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서구문물을 알 수 있는 창구였다. 1876년 박규수가 죽자 이들을 지도한 자가 유대치와 오경석이었다. 유대치는 중인 출신이었으나 학식과 인격 모두 탁월하고 교양이 심원한 경론가였다. 불교를 깊이 신행하고 있었던 까닭에 개화파를 지도할 때 불교사상도 가르쳤다.

이들의 행적을 적고 있는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 갑신정변은 그들이 배운 불교의 이치를 직접 세상에 응용하려던 행동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 유대치의 영향으로 개화파에는 불교를 신앙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개화파는 동지들을 규합할 때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중인출신은 물론이고 승려들이 참여도 많았다.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약한 이동인은 새로운 문물과 해외지식에 대한 궁금증이 강해 부산에 일본불교 별원이 개설되자 그들을 통해 세계정세를 알고자 하였다. 개화파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사회를 살펴보는 등 호기심이 강했다.

그의 개화 의식은 한국이 빈약하여 부강하지 못한 인식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제도가 없고, 일부 있는 제도도 바뀌지 않은 데서 생긴 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그런 한계적 상황에 직면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부국강병으로 보았다. 그 방법으로 공업과 상업의 발달을 꼽았다.

먼저 공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풍부한 광산과 개발되지 않은 땅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에게 자본과 기술이 없기 때문에 일본과 힘을 합하여 개발한다면 한국도 무비를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음 상업이 발달하려면 육의전에서 배를 구입하고 일본인 상인을 고용해서 한국의 내륙과 개항장 사이에 통신의 길을 만들어 사람들이 개항장을 왕래할 수 있도록 하며, 그에 필요한 재정은 일본정부에서 빌어 상인들에게 빌려준다면 육의전의 상업이 발전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이런 그의 생각은 누구도 사회변화에 대해 예견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 세심하게 분석하고 있었던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사회적인 제한이 뒤따르던 승려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면으로 보여주고 있는 진보적 성향은 불교계의 새로운 분위기를 일으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개화의 산실 봉원사

이런 봉원사가 개화의 산실이 된 것은 승려 이동인과 개화파가 만나면서부터이다. 1876년 조선의 문호가 열리자 당시 젊은이들은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무기를 갖고 있던 일본과 서구열강의 힘에 놀랐다.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세상을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신지식을 이용해 구태에 머물던 조선사회를 바꿔보고 싶었다. 세계와 소통하여 조선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을 개화사상이라 불렀다. 그들 가운데 적극적으로 조선을 변화시키려 한 사람들을 개화파로 불렀다.

남들의 눈을 피해 서대문을 나와 봉원사로 가던 개화파의 가슴에 무엇을 담고 있었을까? 칠흙같이 어두운 그믐밤이나 달빛 훤한 보름밤 개화파는 봉원사에 모여 무엇을 고민하고 토론하였을까? 바람 앞에 촛불처럼 가냘픈 숨을 쉬며 열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조선을 어떻게 부국강병으로 이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을 것이다.

개화파를 조직한 목적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외세에 대항할 수 있는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국민국가란 내 나라, 내 민족을 발견하는 것이다. 중국을 주축으로 하는 동양의 질서체제에 안주하는 조선이 아니라, 세계 속의 자주독립국인 조선을 찾는 일이다. 그것은 조선왕조와 같은 봉건국가가 아니라 독립권이 보장된 근대국가의 건설이었다.

윤치호의 일기에 의하면 김옥균은 유대치의 지도를 받아 외국의 예를 따라 예산제도를 세우는 일, 행정기관의 책임분담을 마련하는 일 등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로 정부조직을 고치는 것을 꼽았다고 한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37년이 지난 1941년 10월 그 사건을 회고하는 글을 썼다. 개화파는 국민들 사이에 존재하였던 신분제도의 철폐, 가난한 사람을 위한 주택마련, 노비제도 폐지 등과 같은 것을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타파하려 했다고 적고 있다.

봉원사에 모여 수많은 밤을 지새워가며 토론하던 개화파는 정부차원에서 변화될 기미가 없자 물리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실행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불과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 대부분은 희생되고,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지만 국내의 모순을 극복하고 외세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생각한 이상이 정치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변 후 3일 동안 집권한 개화파는 자신들의 이념을 정강으로 발표 하였다. 내용 가운데 불교사상과 연관된 것은 평등에 관한 부분이다. 정강 제2조에서 명시하고 있듯이 당시 봉건사회가 지니고 있던 신분제의 한계성을 탈피하기 위해 그들은 인민평등권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회적인 여건으로 본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국가의 자주독립과 인민평등권에 대한 사상은 그 후 1890년대에 들어와서 독립협회의 활동 등 시민의식이 확대되어 국민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지만 1880년대는 확실히 앞선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정변의 실패는 개혁에 대한 논의조차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시대변화를 말하는 젊은이들은 미움을 받았다. 자연히 개화의 불길은 시들어 갔다. 이런 개화파의 퇴조는 잠시나마 조선사회에 불교를 새롭게 인식하던 분위기도 사라지게 하였다. 불교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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