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활이 바로 과학이요 의학이요 진리입니다

큰스님 일방적인 설법보다는 우리 서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토론하는 입장으로 해 보시는 게 어때요?

질문자1(남) 제가 한 말씀 여쭤 보겠습니다. 사실은 제가 원래 낚시꾼이었거든요. 얼마 전에 제가 낚시를 갔습니다. 향어 낚시인데 좀 큰 거였거든요. 두 마리를 잡았는데 도로 놔주고 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놔준 것이 잘한 것인지, 놔준 게 꼭 잘했다고 볼 수만은 없더란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큰스님 사람은 어디까지나 그때의 용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주어지는 대로 자기 그 지혜로운 마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합니다. 놔주려면 차라리 낚시질을 할 때 곧은 낚시를 넣어요. 왜 꼬부라진 걸 넣어 가지고선 그렇게 애를 써요? 왜 자기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가지고 그러느냐 이거야. 사람이 명상을 하려면 곧은 낚시를 넣고 명상을 하지.

또 한 가지는, 그 고기가 만약에 몸을 벗고 갈 때가 되지 못했는데 우리가 잡아다가 몸을 죽였을 때, 바로 자기가 몸 벗을 때까지 그 어느 기간이 있다면 그 원성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또 한 가지는, 만약에 때가 됐는지 안 됐는지는 몰라도 때에 따라서 주어졌을 때, 스스로서 이것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 때, 이랬을 때는 때가 됐든지 안 됐든지 그대로 그것은 둘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우리가 공부를 안 하는 사람 같으면 별문젠데 자기 심성을 쥐고 하고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살은 내 살이 되고 그 마음은 내 마음이 되기 때문에 그대로 그냥 요리가 되는 거죠. 자기가 된 겁니다. 금방 그 자리에서 자기를 만들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일부러 잡아서 일부러 놔준 것이 되기 때문에 그건 어폐가 있죠. 그래서 일부러 잡은 게 아닌, 어쩔 수 없이 부모를 보양하기 위해서 잉어를 잡았다거나 고았다거나 이런 문제가 있을 때, 또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약으로 쓴다거나 이럴 때 죽였다면 이런 때는 그냥 제창 자기로 둘이 아니게끔 요리가 됩니다.

질문자2(남) 지난번 밤 11시에 집에 들어갔습니다. 현관에 들어서면 불을 켜게 됩니다. 불을 켜자마자 천장을 보니까 바퀴벌레가 있었습니다. 바퀴벌레는 걸음도 빠르고 그래서 보는 순간 쫓아가서 안락사를 시켜 버렸습니다. 그 경우 살린 겁니까, 죽인 겁니까?

큰스님 살린 겁니다. 그 의문에 꼬리가 없다면 우리가 공부할 수 없으니까, “그건 살렸습니다.” 할 때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 또 질문하실 분 있으면요.

우리가 이런 얘기 할 것도 없고 안 할 것도 없는 자리에서 항상 스스로 생각이 나고 스스로 행하거든요. 이것이 그냥 진리이고 그냥 여여함인데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아주 그렇게 밀접한 사이가 있다는 그 점…. 우리가 지금 윗눈썹에서 밑의 눈썹을 내려다보지 못하는 격이다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 각본대로 마음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항상 고정됨이 없다고 그러죠. 각본대로 주어져 있는 것이 마음이 아니고 각본에서 벗어난 마음이 되기 때문에 이 마음도 쓰고 이 마음도 쓸 수 있는, 체가 없는 마음이다 이겁니다. 만 가지 마음을 낼 수도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미국에 갔다 왔으면, 미국의 상점에 들렀다면 마음에 지금 미국의 상점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갔다 오지 않은 데는 캄캄하죠. 그렇기 때문에 벌써 이 마음이 ‘해탈이다, 해탈을 못했다’ 하는 기준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겁니다. 내가 갔다 온 데는 여기 앉아서도 볼 수 있고 그런데, 도대체 갔다 오지 않은 데는 캄캄하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 마음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마음의 귀를 뜨게 하기 위해서, 이 마음의 타심통을 알게 하기 위하고 또 숙명통을 알게 하기 위함이요, 또 전체 가고 오는 신족통을 알게 하기 위함이 되는 거죠. 이거 다섯 가지를 바로 내 누진통, 아니 지금 현대 말로 책정기로서 우리가 책정을 할 수 있는 그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다섯 개가 다섯 개대로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눈 간 데 귀가 가고 귀 간 데 눈이 가듯 그건 이름이 다섯 개지 다 한꺼번에 동시에 구르고 있어요, 수레바퀴처럼.

체 없는 마음의 에너지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아
용도에 따라 큰 그릇을 대면 큰 그릇에 담기고
작은 그릇을 작은 그릇에 담깁니다.
내 한생각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멋진 이 생활을 우리 멋지게 살아야지 멋지지 못하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오늘 저 위에 왔던 OO 아빠라고 있습니다. “내 땅을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해서 땅이 전체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생겼는데 삼분의 일 정도는 이렇게 해서 집터로 나가는 터고 공장 지대로 쓰지 못하는 터니까 이쪽으로만 행하고…. 친밀하니까 이걸 일러 준 겁니다. 그러니까 깜짝 놀라면서 그것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그리느냐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사람이 앉아서 그런 걸 보는 것도, 이렇게 아주 깨끗하게 똑바로 그려 주는 것도 이거 도가 아니다. 이 다섯 가지를 다 내가 한꺼번에 굴릴 수 있는 책정기, 이게 바로 도라는 거다, 이름해서 그것도.” 그러니 우리가 음식을 갖다 놨을 때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이게 물로 생기고 뭘로 생기고 다 알아도 이걸 집어 먹고 줄 줄 모르면 이건 아무 소용 없는 거야, 다 알아도. 그와 똑같은 겁니다. 도라는 것은 한생각에 의해서, 밀접한 문제가 있는 거는 한생각에 의해서 자기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에 있는 거고…. 참, 이거를 얘기를 해도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참 큰 문젭니다.

어떤 사람은 각본대로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스스로서 각본대로 주어져 있다는 걸 생각하거든요. ‘이거는 절대로 못한다. 이렇게 이렇게 돼 있는 거니까 이건 이렇게밖엔 될 수 없다’ 하는 게 스스로서 주어져요, 자기한테. 이건 색(色)을 보고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 체 없는 그 마음에, 한 찰나에 부동자세한 그 에너지의 뜻은,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것이 스스로 나와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큰 그릇을 들이대면 큰 그릇에 담기고 작은 그릇을 들이대면 작은 그릇에 담긴다 이 소립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에너지는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항상 수시로 나오기 때문에 내가 큰 그릇을 대면 큰 그릇에 담기고 작은 그릇을 대면, 용도에 따라서 대면 작은 그릇에 담긴다. 담기는 이 자체를 무엇이라고 비유를 할까? 내 한생각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한생각에 달려 있는데, 여러분이 지금 색을 보고 취하고 물질세계로 용도에 따라서 수없이 보고, 내고 들이고 내고 들이고 살면서 이게 습이 됐단 말입니다. 미지의 세계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회전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거든. 생각조차도 해 보지 못했거든. 그러니까 ‘이 보이는 데 지금 우리 법도가 이렇고, 몇 항 몇 조에 이거는 이렇게 되어 있고’ 이렇게 되니까 이거는 아주 각본대로 주어져 있는 겁니다. 이건 각본대로 아니면 안 돼. 팔자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팔자 운명은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팔자 운명 속에서 어떡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바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 드려야만이 이것이 이렇게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수박은 수박씨가 자기를 자기 안에다 넣어 놓고도 바깥에서 수박씨를 찾는 겁니다. 이럴 수가 없어요. 오늘 어떤 청년이 와서요, “내가 길을 가니까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러거든요. “야, 이놈아! 병신 같은 놈 같으니. 이놈아, 둘이 아니라는 걸 네가 너한테 가르치기 위해서 너한테 지금 침을 놓는 건데 어떻게 남이 너를 주시한다고 생각을 하느냐? 둘이 아닌 법과 시공이 초월됐다는 그 자체를 너한테 튕겨 주기 위해서 그런 건데, 이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이놈아, 왜 너는 너한테 맨날 속아!” 이랬습니다. 그렇듯이 이 마음 자체가 너무도 광대하면서도 묘하고, 묘하면서도 신비하고, 신비하면서도 위대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끌고 가느냐? “이거는 사람이 할 수 없는 거. 이거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거.” 그러는데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사람이 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고 그런데 아주 가난한 우리 신도가, 소금 팔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주하라니까 소금을 한 공기씩, 그것도 많이도 시주를 못 했습니다, 한 공기씩밖에. 그것도 팔다 남아야 한 공기를 했습니다. 스스로 이렇게 수질 해서 떠 놓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너무 가난하고 남편은 머리가 이상해서 쫓아다니고 그러니까 방에다 가둬 놓고, 애들은 먹여 살려야 하겠으니까 소금을 팔러 다니지 않으면 안 되리만큼 가난했고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허둥지둥 허둥지둥, 소금을 팔아 죽거리라도 마련해야 들어가겠으니까 허둥지둥 새벽같이 나가서 팔고선, 그래도 생각이 있으니까 저녁에 오는 겁니다. 요만큼 남겨 가지고 말입니다.

그걸 볼 때 말입니다, 너무나 순진하단 말입니다. 가식이 없어. ‘요거를 먼저 떠서 내가 해야 부처님의 덕을 보지.’ 하는 가식도 없더란 얘기입니다. 요거 너무나 순진하지 않습니까? 제가 볼 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이거를 먼저 떠 놓아야만이 불공이 된다는 생각은 좀 지워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진실한 마음이면 됩니다, 진실한 마음. “스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마는 스님이 정말이지 이 도리를 아신다면, 우리가 이렇게 가난하고 이렇게 죽겠는 걸 아신다면 저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그 소금 남은 거를 탁탁 털어 놓고, 사심 없이 털어 놓고 돌아서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갈 때 그것은 누가 봐도 손색없이, 걸릴 게 없이 주어도 손색이 나지 않아요. 그랬는데 그 사람은 남편을 고쳐서 지금 일을 하게 만들어 놓고 집도 사고 또 그렇게 다니다 보니까 회사에서 김밥을 말아 오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소금 장수 버리고선 김밥을 말아 들이게 돼서 돈을 벌어서 지금은 괜찮게 삽니다.

참, 여러분이 오셔도요, 다 달라요. 그분은 습을 그렇게 가졌기 때문에 다니다 보니까 너무 피곤하고 여기 와서 뭐, 공부할 새도 없고 그랬는데 이젠 자궁암이 걸렸다나요? 그렇다고 또 삐쭉 오더니 말입니다, “스님, 스님! 저는요, 하도 이 엉치가 끊어지는 것 같고 이젠 벌 수가 없어서요, 병원에 가 보니까 자궁암이래요. 그런데 스님, 어떡하면 좋죠? 제가 살아야 여섯 식구를 다 살릴 텐데, 자식이 오밀조밀한 게 다섯이고 이러니 이걸 어떡하면 좋죠?” 이러는 데는, 공부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그거는 공부하라고 생각을 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 그럼 어떡하지? 알았어. 가 봐.”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있다가 오면 오는 대로 히히 웃으면서 “스님, 나 다 나았어요.” “어떻게 해서 나았어?” “뭘 어떻게 해서 나아요? ‘알았다’고 그러시지 않았어요?” 하거든요. 그거는 자기가 생각하기를 ‘스님이 알았다고만 하면 낫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문제는 그 생각에 달렸다 이 소립니다. 너무도 급박한 사람이라 아예, 그걸 그냥 콱…. 돈도 없겠다 뭐, 좀 좋습니까? 놓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냥 맡겨 버리는 겁니다. ‘너, 죽이든지 살리든지 네 멋대로 해라.’ 하는 식이죠. 그리고 진실히 믿었기 때문이죠.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그래서 누구나가 다 그런 것이 도를 배우는 거라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자리 하나가 그렇게 천만 가지로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자기 끌고 가는 마음을 지금 어떻게 표현을 해야 좋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런 얘기도 하고 저런 얘기도 했는데, 지금 내 팔자가 금방 가서 차에 치여 죽을 팔자라고 해도, “팔자를 가서 보니까 스님, 앞으로 닷새만 있으면 병이 들지 않으면 꼭 죽겠답니다.” 이래도 “허무한 소리 하지도 마라, 얘. 네 생각하기에 달렸어. 이놈아! 눈물, 피 이런 걸 많이 흘렸기 때문에 아예 그런 것 흘리지 말고 살아. 편리하게 살아라. 종교는 편리한 거다. 인간이 고등 동물로 태어나서 90%, 100% 부처 될 가능성이 있다고 그런 거는, 인간이 그렇게 물리가 터지고 지혜가 터지면 그대로 도다. 그러니 편리하게 살아라.” 이럽니다.

그럼 팔자 운명이나 이런 거 보는 사람 다 굶어 죽게 생겼죠. 그런 거 저런 거 우리가 따진다면 스스로서 이 마음이 말입니다, ‘이거는 옳다 그르다’ 하고 마음에 생기는 거를 가만히 보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옳다 그르다’ 하는 게 스스로 생기나. 스스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주어진다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겁니다. 구태여 그렇게 나쁜 데로 끌고 가려고 해서가 아니라 규정을 지어 놓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에, 고정되게 그냥 자기의 방침대로, 자기가 보고 듣고 사는 대로 그냥, 본 대로 그냥, 습대로 그냥 내놓는 거죠. 그런데 물리가 글쎄, 백지장 하나 사이도 안 되는 그 물리가 왜들 안 터집니까. 왜? 이것을 뭐라고 표현을 해야 옳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쉬게 됐는데 신이 한 짝이 떨어졌더랍니다. 그래 신을 툭툭 털면서 이거를 맞추려고 이러니까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 하는 소리가 “너는 그 신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신을 버려 봐라. 신으려고 하지 말고 버려 봐라. 네 가죽신도 있는데 왜 버리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무슨 생각이 나느냐 하면 ‘신을 놓치면 내 이 발바닥이 아픈데 어떻게 가겠느냐.’ 이랬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자기가 얘기도 안 했는데 그분이 있다 하는 소리가 “그래, 발바닥이 아파? 발바닥이 아프고 그래서 그 신을 벗지 못하겠다고? 이놈아, 벗어 봐! 신이 저절로 생길 테니까.” 이러거든요. 그게 이치에 닿지도 않거든, 도대체 그 사람으로서는.

그런데 거리가 얼마 멀지 않은 데에 어느 노인네가 신을, 미투리를 잔뜩 만들어 놓고선, 파는 게 아니라 길 가고 오는 사람한테 줘. 그래서 밥도 얻어먹고 신도 얻어 갖고 노비도 얻어 갖고 아, 이러고 가게 되니까 그때서야 물리가 조금 터져 가지고선 ‘야, 나도 이 길로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나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가서 참, 산으로 올라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학 대사가 애당초에 처음에 길을 나서서 갈 때에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이런 얘기를 예전에 어느 스님한테 들었는데요, 그러니 그러한 마음 하나 돌리기가…, 우리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안 가실 겁니다. 내가 지금 금방 죽을 건데도요, 참, 이걸 뭐라고…. 난 내 멋대로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내가 병이 들어서 인제는 죽게 됐다. 의학적으로 봐도 그렇고 죽게 됐다. 이게 나타나 있는 거니까 이걸로써 표현을 할 수밖에 없어서 이러는 겁니다. 그랬는데 자기가 생각하기를 말입니다, ‘자기가 끌고 다니려면 자기가 고쳐서 끌고 다니든지 자기가 그냥 부숴 버리든지 맘대로 해라.’ 하고선 맡겨 두니까 그것이 다 해결이 났고, 오줌으로 뭘로 그 나쁜 게 다 나가고 다 해결이 났고, 또 한 사람은 ‘에이유, 그래도 병원으로 가야지.’ 이러고 뛰어간 사람은 죽었답니다.

“그것이 어디 나변에 있느냐?” 하겠지만 엊그저께 일도 그렇습니다. 야, 뇌염 환자로서 정말 급한, 뇌염이 아주 급하게 돼 가지고선 금방 비틀어지고 눈이 까지고 그러는데 누가 이리로 데리고 오겠습니까? 병원으로 가지. 여기 아마 여러분이 다 계셔도 병원으로 가지 이리로 안 올 겁니다. 병원으로 일단 가 가지고 연락은 할지언정 이리로 안 데려올 겁니다. 그건 뭐, 여러분이 말씀해 보세요. 그렇게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말입니다, 다 넘어가고 다 죽게 된 걸 끌고 왔어요. 그냥 이렇게 안고, 어린애인데요, 그 큰 어린애를 이렇게 안고 싸 가지고 눈이 힐떡 넘어가고 이렇게 피가 흐르고 그러는 걸 그냥 들고 온 거예요. 그거 있을 수가 없거든요. 내가 생각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거예요, 도대체. 그런데 어이가 없어서요, “아니, 병원으로 데려가지 왜 이리로 데려왔어?” 하니까, 이건 그냥 우리 인간이 다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러니까 하는 소리가, 병원에 가도 이거는 죽든지 병신이 되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다 이거야. 그런데 이렇게 좋은 약방을 두고 내가 왜 그리로 가느냐 이거야. 이렇게 좋은 약방을 두고. 아, 나 그 노인네 참! 그, 여자분인데요, 그래서 “응, 알았어. 병원에 안 가 봤어?” 그러니까 안 가 봤답니다. 그냥 이리로 데리고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면 가라고, 알았다고 그랬더니 나가면서 그것도 딸의 자식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저 어떡하면 이게 나을까 했는데, 그 도리를 자식은 모르니까 바로 가자마자 자식이 병원으로 또 데리고 갔는데, 낫게 해 달라고 하면서 안고 갔던 모양이죠. 병원에 가는 동안에 나아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까 아무 일도 없다고 그러더랍니다. 이러니 그렇게 하는 그 마음이 말입니다, 지금 내가 그 마음에 달렸다 그러는 겁니다. 이 마음이, 자기를 끌고 가는 이 마음, 한 점도 없는 마음, 내놓으라면 내놓을 것도 없는 그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묘법이냐, 묘하냐 이겁니다, 응?

그것뿐이겠습니까? 수없이 그런 일들이 오는데…. 그럼 내 이 못생긴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얼마나 심부름꾼이 됐느냐 하고 한번 볼 때 여기는 참, 그렇게 안팎으로 비밀을 지켜 주는 데도 없습니다. 아들 딸들이라면 전부 비밀을 지켜서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는 데 손색이 없도록 이렇게 하는 그런 마음들을 전부 일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하나하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이렇게 볼 때 100%라면 70%는 그래도 웃을 수 있고 기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봅니다. 그럼 왜 30%는 없는가? 30%는 마음이 닿지 않아서 못할 뿐 아니라 너무 기울어서 못하고 이러는 수가 많습니다. 그럼 색을 보고 취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생활이 과학인 줄 모르고, 의학인 줄 모르고, 모든 이 생활이 진리인 줄 모르고 행하는 분들에 의해서는 기복으로만 나가기 때문에 이거는 팡이죠. 자기가 그렇게 위대하고 정말 신비하고 그렇게 당당하다는 걸, 도도하다는 걸 모르거든요, 모두가.

그래서 나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도 자기를 따르랬지 믿으라고 그런 거는 아닌데 왜 그렇게 말이 나왔겠느냐. ‘나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거야. 그러면 자기 하나만 말했느냐. 아닙니다. ‘모두 각자’ 소리를 거기다 넣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생각에 ‘나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는데, “바담 풍” 하니까 자기도 “바담 풍” 한 거나 똑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겁니다. 우리가 지혜가 있고 물리가 좀 터졌다면 책자를 그렇게 편집하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문제를 세워 놓고 잘되게 하겠다고 애를 쓰기 이전에 진실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그 여건이 주어져 있다면 우리가 무어든지 아니 할 수 없는 겁니다. 아니 할 수 없고 아니 될 수 없고. 행복은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 우리가 만들어서 행복을 가져오고 또 고에서 빠져나오고 또 병고에서 빠져나오고 가난에서 빠지고, 우리가 계발하는 겁니다. 계발도 정신 계발이 아니라 심성 계발로서의 정신으로 오관을 통해서 다섯 가지의 구슬이 스스로 돌아갈 때 계발이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녹음 안됨) … 얘기를 하려 그러니까 그놈의 게 그렇게 가까우면서도 이렇게 표현이 안 나오니 어떡하죠? 표현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 팔자 운명 이런 것도 각본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꼭 이 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기에서 ‘저 일을 하자.’ 하고선 저 일을 했을 때 이거보다 몇 배 이익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각본대로 돼 있는 겁니까? 저 일도 자기가 하게끔 주어져 있으니까 저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저 일로 가야지.’ 하고선 이 일을 또 바꾸니까 여기에서 이익이 나왔고 또 안 가서 이익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가서 손해를 보는 수도 있고. 이거는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프로펠러가 이렇게 돌아갈 때 추가 없으면 프로펠러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 프로펠러는 항상 동서가 없이, 너 나가 없이 그렇게 그냥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돌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지금 우리 생활입니다. 추가 없다면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추의 근본이 바로 태양의 근본도 될 수 있고 우주의 근본도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87년 5월 3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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