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해의 길 4

“불교란 무엇입니까?”

어찌 보면 쉬운 것 같으면서도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불교에 대한 자기 나름의 철학이나 체험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쉽게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질문에 대한 반응도 제각각이다. 아마 100명의 불자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똑같은 답변은 별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많이 나오는 몇 가지 답변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그저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게 살자는 가르침이 불교’라는 답변이 있다. 매우 훌륭한 대답이다. 이는 흔히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로 알려진 내용으로 과거 일곱 붓다께서 공통으로 경계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모든 나쁜 짓을 하지 말고(諸惡莫作)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衆善奉行),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自淨其意), 이것이 모든 붓다의 가르침(是諸佛敎)이라는 뜻이다. 쉬우면서도 명쾌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많은 불자들이 선호하는 대답이다.

‘그저 마음 하나 깨치는 것이 불교’라는 선불교적인 답변도 있다. 주로 선사(禪師)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불교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적인데, 내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이므로 이를 깨치는 것이 불교라는 직설적인 대답이다.

불교의 모든 것을 마음 심(心) 한 글자로 압축한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차 한 잔 하고 가라(喫茶去).’거나 혹은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는 알듯 모를 듯한 답변도 있다. 아예 ‘악(喝)!’ 하고 큰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있다. 조사선의 아우라가 물씬 풍기는 답변들이다.

불교는 ‘깨달음과 자비의 종교’ 혹은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는 대답은 불교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일반대학이나 불교교양대학에서 선호하는 방식이다. 불교는 존재의 실상을 깨달은 자(覺者)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연기(緣起)나 무상(無常), 무아(無我) 등 붓다가 깨친 내용을 체득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주로 불교철학이나 불교입문 등의 강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답변들은 불교를 설명하기에 부족하진 않지만, 서로 다른 내용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답변들이 나오는 이유는 말하는 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불교는 2, 3층짜리 건물이 아니라 100층 정도 되는 매우 높은 빌딩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깨달음과 자비의 가르침이라는 대답이 붓다 빌딩(Buddha building) 1층에서 말하는 방식이라면, ‘악!’ 하고 크게 소리 지르는 것은 100층에서 통용되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 빌딩 각각의 층이 어떤 모습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건물 안에서는 불교라는 건물 전체를 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오면 1층에는 근본불교 간판이 걸려있으며, 100층에는 선불교가 자리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불교’라는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지역별로 인도불교, 중국불교, 티베트불교, 한국불교 등이 있고 시대적으로는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등이 있다. 주제별로는 화엄불교, 천태불교, 선불교, 정토불교 등이 있다. 불교와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원불교도 자리하고 있다. 수식어가 많다는 것은 불교의 모습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층만 알면 다른 층은 불교가 아니라는 편견에 빠질 수 있다. 불교에도 하나만 아는 일식(一識)의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각 층에는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존재한다. 종파마다 중시하는 경전과 수행 방식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안에만 있으면 〈금강경〉이나 〈법화경〉, 〈화엄경〉 등 특정 경전이나 간화선, 묵조선, 위빠사나 등 자신들의 수행방식만 제일이라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불교라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 빌딩 전체를 조망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몇 층에 위치하고 있는가?’ 불자로서 꼭 필요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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