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불편하지만 따뜻한 인간미 지녀
몸 불편하지만 따뜻한 인간미 지녀
  • 정리=김주일 기자
  • 승인 2019.07.05 1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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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운보 김기창 화백

교도소에 작품 기부로 함께 교화활동
처지 비슷한 장애 재소자에 깊은 애정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인 운보 김기창과의 만남은 필연이자 우연이었다. 7살의 어린 나이에 장티푸스의 심한 열로 청각을 잃은 운보는 이후 어머니의 도움으로 미술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부인 우향을 만나 서로 격려하며 함께 예술을 해나가고 세계로 진출해 전시회도 하게 된다. 운보를 생각하면 악조건 속에도 성실히 공부하고 재주를 갈고 닦는 사람에게는 큰 성과와 결실이 주어진다는 교훈이 떠오른다.

운보 화백은 내 절친인 구상 선생과 친했지만 나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그래서 1980년대 당시 사형수 포교를 위한 자선기금 마련 행사를 위해 미술계 당대 최고의 대가인 운보 작품이 필요했지만, 인연이 없어 연결이 안됐다. 그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 아무한테나 자기 그림을 팔지도 않을 뿐 더러 만나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당시 공포의 상징인 청송 교도소가 1981년 문을 열 당시에, 험악한 교도소 분위기를 상쇄시키고자 교도소 벽면에 그림을 많이 걸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에 영등포 교도소에서의 비슷한 경험이 있었고, 의외로 큰 호응을 얻은 터라 이번에도 자신이 있었다. 특히 청송 교도소에 꼭 운보의 그림을 걸고 싶었다. 그래서 연락처를 수소문해 비서 역할을 하고 있던 운보 의 아들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그 다음날 답이 왔다. 운보 선생이 전지 크기의 작품을 그려서 직접 들고 교도소를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운보 선생과의 첫 인연은 그랬다. 자신 그림에 누구보다도 엄격했던 운보가 재소자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작품을 기부한 것이다. 법무부에서는 청송 교도소에 건립에 도움을 준 인사들을 초청한 ‘지역교정 참여인사 간담회’를 마련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운보는 이 행사에 작품을 갖고 참석했다.

운보는 청각을 잃어 듣지도 못했지만, 말도 거의 할 수 없는 장애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참으로 따뜻한 성품을 지닌 예술가였다.

간담회 뒤 재소자들 앞에서 열린 그림 증정식에서 운보는 갑자기 일어나 자기가 재소자들에게 꼭 한마디 하고 싶다고 수화로 의사를 표시했다. 우리는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잠시 당황했지만, 큰 기부를 한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뜻대로 하게 기회를 주었다. 아주 서툰 언어로 운보는 말을 시작했다. “아 이 나쁜 놈들아! 여기서 보니 모두들 잘 생겼구나, 멀쩡하게 생긴 건강한 놈들이 왜 죄를 지어 이 먼 곳까지 왔느냐? 나는 귀머거리고 벙어리지만 마음과 정신만은 건강하다. 하지만 너희들은 몸은 건강하지만 마음이 건강하지 못해 죄를 지은 것이다. 앞으로는 마음을 건강하게 잘 사용해라. 중요한 건 우리의 마음이다”이러면서 호통을 쳤다. 간단하지만 촌철살인 같은 법문이었다. 나는 예민한 재소자들을 자극하는 것이 아닌지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잠시 장내가 숙연해 지더니 여기저기 재소자들 사이에서 박수 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행사가 끝난 후 운보는 이곳을 방문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고 했다. 청송 교도소 안에 있는 말못하는 농아 죄수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청했다. 그는 “죄수들 방에 가서 직접 그들을 만나 대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교도소 측에서 그에게 특별 면회를 허락했다. 죄수를 보자마자 운보는 그들을 끌어 안고는 말했다. “농아가 된 것 만도 서러운데, 왜 이곳까지 와서 고생을 하느냐. 나와서 살기 힘들면 나를 찾아오너라. 내가 장애인 복지관을 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일로 운보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안양 교도소와 의정부 교도소, 제주 교도소 등 농아 재소자들이 많은 곳을 함께 찾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운보는 아무리 친해도 그림을 절대로 공짜로 그려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재소자들을 위해서만은 예외였다.

몇 년 전 제주 교도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증축해 옮겼지만 운보 그림을 계속 걸어 놓아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그와의 추억을 다시금 한번 되새겼다. 괴팍하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운보는 한번 믿고 신뢰하고 가까워지면 한없이 잘해줬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제주 교도소에서 재소자 돕기 자선 행사를 하기로 했다. 운보가 제주에 온다는 것만으로도 제주가 들썩였다. 나는 50점 정도 그림을 모아서 제주 KAL호텔서 행사를 치르기로 했다. 운보가 온다니까 도지사와 지역 검사장, 법원장 등 지역 유지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런데 운보에게 자선 행사장에서 자신의 그림을 건다는 것은 미리 알렸지만, 개막식 행사에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해달라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미리 말하면 운보가 안나올 가능성이 있어서다. 운보가 행사 하루 전에 제주에 도착하면 내가 친분을 이용해 개막 시간에 모시고 올 생각이었다. 만일 운보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사기꾼으로 몰릴 판이었다. 제주 공항에 그를 마중하기 위해 나갔다. 그때 운보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자, 운보는 예상대로 미리 자신에게 동의와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고 개막식 참석을 거부했다. 운보는 제주 교도소 행사 참석을 위해 온거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매정하게 잘라 말했다.

나는 미리 알리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하면서 운보가 내일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하면, 나는 사기꾼으로 몰려 앞으로 교정 교화 활동도 못하게 될 것이라고 절박하게 애원했다. 그러자 운보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엇인가 결심한 듯 비서보고 KAL호텔 행사장으로 가자고 해서, 나는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흐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운보는 좋은 일을 위해서는 관용을 베풀줄 아는 인간미 넘치는 예술가였다. 그런 그가 오늘따라 몹시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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