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유년기와 사춘기 돌아보기

내 기억에 존재 않는 유년기
아득한 내면의 소리 적어보자
잊고 지내던 사춘기 기억들은
하나의 살풀이로 써내려가자

내 안의 아기 드러내기

조물주는 왜, 유아기의 기억을 어둠에 파묻었을까. 젖먹이 시절의 기억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파편 같은 기억이라도 반딧불처럼 한 번씩 튕겨 오르면 좋으련만, 빛 없는 심해 그 자체다. 문제는 기억이 없다하여 그 시절이 없었던 건 아니라는 점이다. 당사자만 빼놓고 주변 인물들은 나의 그 시절을 턱없이 잘 기억한다. 단 몇 분 만에 전생에도 도달하는 최면 작업에 비하면 생애 45세 시절 정도야 어제 일처럼 또렷해야 하지 않겠는가.

프로이드 심리학을 데려오지 않더라도 젖먹이 시절 삶의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 됐다. 그 상식이 우리나라 같은 아동 학대가 많은 나라에서도 출산휴가, 육아휴직, 남성의 출산 보조휴가 등을 확보해주는 동력으로 작용한 건 아닐까. 모든 아동학이 유년기 최하 14개월부터 2년여는 엄마의 손길 안에서 자라야 하고, 모유 수유가 중요하다는 등의 이론을 쏟아낸다. 그래서? 나는 이 수치들을 인정하면서도, 불현듯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그 젖먹이들은 모두 행복할까. 소비자 권리의 기준은 소비자의 눈높이고, 희생자 권리의 기준은 희생자의 눈높이라면, 유아 권리의 눈높이는 젖먹이여야 한다. 그런데 젖먹이의 주장은 누가 대신하고 있는가.

당신의 생애 초기는 자아의 실종시대다. 자기 주도성이 없었으므로, 권리의 암흑기이기도 하다. 그 시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헤칠 재간이 없으므로 부모에게 증거할 수도 없다. 지독한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중무장한 부모가 사실은 혹독한 독재와 내 삶의 능멸자였음을, 우울증이나 자살충동, 알콜의존 따위를 통해 입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결코 그들을 탓할 수 없다. 그저 꽤나 성장한 어느 날, 허공에 주먹질 하듯 질러댈 때는 한두 번 있었다.

엄마, 아빠가 자기 식대로 사랑하는 통에 내가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 알아?”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아빠하고 사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너만 빨고 핥으면서 키웠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부모의 역공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무엇보다 당신의 유아기 기억은 일괄해서 부모 독과점 품목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의 소실점에 뭔가 있긴 한데, 어느 금도끼가 자녀에 대한 부모의 확신을 빠개낼 수 있을까. 부모가 제멋대로 자행했던 왜곡된 자녀 사랑을 스스로 자각하여 고백하기 전에는 해결책이 없다. 그래, 단념하자. 기억은 편집된 과거라고 하지 않던가. 이미 당신의 부모는 자식에 대한 기억의 사진을 자기 식대로 오려붙여 액자에 잘 표구해 놓은 상태다. 게다가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잘못된 사랑 방식만 밟았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니 단념하기! 이미 늦은 일이므로.

, 그럼에도 당신은 치매 환자가 제 정신 찾은 듯, 불쑥불쑥 억울하다. 나름 잘 살았다고 믿어왔던 내 삶이, 튼실했던 사랑니 흔들리듯 흔들리다니. 뭐지? 건널목 건너다 길 복판에 선 사람처럼,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요즘 걸핏하면 버럭버럭 화내는 사람이 되고 말았더라. 때도 없이 우울해지고, 때도 없이 눈물 짓는 사람이 되었더라. 내가 나한테 놀라거나 후회하는 경우가 잦아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건 뭘까.

이럴 때가 좋은 날이다. 나의 내면 아기를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당신의 내면은 이미 철부지처럼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려움에 떨면서 눈알을 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두고 깊이 귀 기울여보면 아득한 내면의 소리가 들려온다. 옹알거리는 소리. 응애응애 고양이처럼 우는 소리, 울음을 참아 누르며 끅끅대는 소리. 젖먹이 시절 그때, 다하지 못했던 내면의 음파들이 서서히 선명해지리라. ‘내 안의 아기 드러내기는 바로 그 시절, 그때 쏟아내지 못한 신호들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만나야 한다. 당신의 생애, 근본 상처가 도사리고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 나의 내면 아이가 두려워하고, 칭얼대고, 투정부리고, 눈치 보며 웅얼거리고, 슬퍼하는 소리를 최대한 아이의 감정이나 말로써 표현하기

- 성인인 당신이 좌절감, 우울감, 슬픔, 두려움 등 부정적 감정이 들 때, 어린아이처럼 울고 싶은 그 감정을 따라가 볼 것. 그 감정 안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적기

- 지금 떠오르는 아기의 모든 말들을 그냥 적어보기. 갓 말을 배운 아이처럼 혀 짧고, 웅얼거리고, 불안정한 소리, 그대로 받아적기

- 부모, 형제에 대한 원망이나 항의, 분노, 좌절, 서러움, 외로움 등의 시절을 떠올릴 것. 그 때 감정을 어린아이의 언어로 표현해볼 것.

소설가 김형경은 심리 수필집 <천개의 공감>에서 생애 초기 체험한 사랑에 독성이 강하면 성인이 된 이후의 사랑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사랑인들 독이 묻어 있지 않으랴. 생애 초기의 언어를 일단 드러내놓는 것이야말로 독성을 털어내는 탁월한 방법이다. 내 안에 그런 어린애가 있을 리 없다고 우겨대지 좀 마라. 당신이 젖먹이 어린애가 되기로 마음먹고 글발을 날리는 순간, 내면에 갇혀 있던 숱한 어린애가 튀어나올 것이다.

엄마 싫어, 나 밥 먹기 싫어! / 엄마 어디가, 나 혼자 또 지내라고? / 아빠, 엄마 좀 그만 때려. 숨막혀 죽겠어 / 아빠, 나 쫓아버린단 말 좀 하지마 / 오빠, 나 무서워

나의 2 언어받아적기

기억하는가. 2013년은 북한이 남한을 침범하지 못하는 이유가 남한의 2’라는 괴물집단이 있어서라는 우스갯말이 세상에 퍼진 해다. 그들은 길에다 침을 뱉는다거나 주먹으로 벽 치기, 모방 싸움으로 친구 기죽이기, 담배 피우기 따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무소불위, 질풍노도의 어린 청소년들이다. 생리적으로 왕성하고, 코 밑에 털이 거뭇거리고, 목소리가 변하고, 이유 없이 화내고, 느닷없이 소리 지르거나 남모르는 동성애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생리적, 정신적 격동은 생애주기의 측면에서 보면 자연스럽다. 그런 곡절을 거쳐 이윽고 다른 시기로 넘어가리라. ‘2’로 상징되는 사춘기는 일종의 폭발물이지만, 당신의 그 시절을 기억해보라. 알고 보면, 남들 생각대로 마음껏 폭발했던 나날이었던가. 아니면, 다른 어느 시기보다 더 심하게 구겨 넣고, 참고, 견뎠던 시기였던가.

누구에게나 진실은 있게 마련이다. 진실은 당사자의 마음에 있지, 당신을 쳐다보는 사람의 어림짐작 속에 있지 않다. 당신은 정작, 2시절에 좌절하고 눈치 보며 살아야 했던 날들이 어느 시기보다 많았을지 모른다. 내면의 격동이 강할수록 2’를 둘러싼 조건은 냉정하고 엄정하여, 좌우사방 눈치 보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엄마와 2’ 딸은 서로 말을 나누되 무슨 말인지 몰라서 짜증과 우울의 감정만 나누고, 아빠와 아들의 대화는 차라리 서부 활극의 권총 대결이 더 깔끔했을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나의 그 시절도 남 못지않게 쓸쓸하고 핍진했다. 무엇보다 내 편이 없다는 게 절망스러웠다. 내 편 같은 사람의 냄새라도 맡아보고 싶어서 들개처럼 쏘다녔던 것 같다. 확실한 믿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 편이려니 했던 엄마나 아빠조차 알고 보니 외계인? 내 말 한마디도 못 알아 듣는 건 고사하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해독 불가였다. 가벼운 한두 마디 대거리에 온갖 충고와 비교, 염려 폭탄에 피폭돼 즉사할 지경이다. 홧김에 의자라도 걷어차면, 그 가벼운 발길질 한 번에 온 집안이 폭파당한 듯, 월하의 공동묘지는 저리 가라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데, 친구들은 참 천연덕스럽게 행복한 듯해서 나만 이러는구나 싶으니, 여전히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내 안에서 수시로 맹독성 감정이나 통제 불가의 몸짓이 치밀어 오르니, 뾰족한 해법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은 급한 대로 어두운 허공을 향해 침이나 욕설 따위를 찍찍 뱉어댈 수밖에.

내 안의 중2 언어 받아적기는 뒤늦은 살풀이해원굿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당신의 영혼은 어쩌면 아직 소화되지 않은 2’ 정서에 짓눌려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그럴 일 없다고 딱 잡아떼는 사람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당신 곁에 바짝 붙어 사는 인연에게 왜 내가 위험한지물어보면 누구보다 신속, 정확, 적나라하게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아내들이 자기네끼리 모이면, 자신의 남편을 우리집 큰아들이라고 명명하는지 아는가. 그때는 공부하느라고 영혼의 성장을 챙길 겨를 없었노라는 사과성 변명으로 수습하는 게 그나마 남은 기회다. 누가 그랬던가. 4차 산업 시대에 끝까지 살아남을 경쟁력은 자아 성찰력이라고.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인정할 줄 아는 능력이 곧 경쟁력이다.

- ‘2’ 시절, 자신을 둘러싼 여러 조건 때문에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 행위 들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적어보기

- 그 시절 나보다 체구가 크다는 이유로 두려움,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을 주었던 친구나 친지, 어른을 향해 하고 싶었던 말, 적어보기. 그가 내 앞에 앉아 있다고 상상하고 적는다.

- ‘2’ 시절을 노려보듯 떠올려본다. 그 때 가장 하고 싶었던 일, 가고 싶었던 여행지, 떠나고 싶었던 시기, 함께 떠나고 싶었던 친구, 하고 싶었던 게임, 실컷 먹고 싶었던 음식 따위를 적어본다.

위 안내를 따라 적어가다보면 느닷없는 수치심이나 분노가 벼락처럼 일어나기도 하리라. 당신이 지금 그런 역동적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 기억과 당신이 일체화됐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어쩌면 2’로 순간 이동했을 수도 있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그 감정과 화학적 합집합이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까. 아니다. 당신은 그런 감정에 퐁당 빠져 들어간 상태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내가 지금 수치심에 휩싸여 있군’ ‘내 몸이 좀 뜨거워져 있군하고 알아차릴 일이다. 그런 순간 당신은 2’에서 벗어나 그 소년을 바라보게 된다. 객관적으로.

내 안의 중2 언어 받아적기는 사례글을 적기가 쉽지 않다. 당신의 2’ 시절, 자신의 혀에 올리지 못한 미해결 언어들을 적나라하게 적어간다고 생각해보라. 숱한 시간이 흘렀지만, 타인에게 차마 발설할 수 있는 말이겠는가. 험악하고, 음란하고, 저속하고, 비열하고, 유치하고, 썰렁하고, 가련한 낱말들. 그러므로 사례글은 생략하기로 하자. 당신은 당신 노트에 나는 내 노트에 다하지 못한 사춘기 시절의 온갖 언어를 내뱉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일단 문자화한 글은 눈으로 들여다봐도 그 시절의 기억이 홀로그램처럼 일이서기도 한다. 문자의 힘이란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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