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보좌관’서 나오는 대사
“수치심, 정치하며 먼저 버렸다”
현실 다선 국회의원들이 떠올라

수치심 ‘부끄럽다’ 두 한자 구성
자신이 바르지 못함 부끄러워해야

부처님 “수치심 끝까지 지닐 미덕”
불교에선 수치를 ‘慙愧’라고 말해
수치심·참괴심, 정치인에게 절실

언젠가 언론인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분이 대학에서 정치학과를 다녔다는 말을 듣자 내가 물었다. “정치학과에서는 뭘 가르쳐요?” “권력!”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척 나왔다. 이 대답을 듣는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정치란 위정자들이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라던 동양고전의 문장들에 푹 젖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두절미하고 내놓은 그 대답 속에는 권력 하나만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는, 노회한 자들의 계략과 합종연횡의 비열함만이 느껴졌다.

며칠 전 TV드라마 보좌관을 보다가 흥미로운 장면을 만났다. 법무부 장관 자리를 노리는 4선 국회의원 송희섭이 드라마 속에서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정치하면서 제일 먼저 버린 게 뭔 줄 알아? 수치심이야.”

찌릿했다. 그건 분명 베테랑 연기자 김갑수의 연기가 워낙 출중해서 드라마가 드라마로 보이지 않고 뉴스를 보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인 탓도 있다. 하지만 딱히 누구라 할 수는 없지만 현실의 다선 국회의원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고, 저들이 대놓고 이런 말을 하지는 않지만, 저들의 속마음이 이 대사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처럼 느껴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은 물론이요, 필요할 때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기라도 하며 적과도 손을 맞잡고, 필요 없을 때면 평생 동지와 보좌관도 단칼에 쳐내야 할 텐데, 그럴 때 인간이기에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 즉 수치심은 거추장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수치심 같은 거야 진즉에 내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수치심(羞恥心)’부끄러워할 수()’부끄러워할 치()’. 부끄러워하다는 뜻의 글자 두 개를 함께 쓸 정도로, 사람이라면 자기가 바르지 못하고 착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의 선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니, 남의 선하지 못함도 즐거울 리가 없다. 이런 마음이 바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아니던가. 그런데 드라마 속의 국회의원은 보란 듯이 말했다. “정치를 하면서 내가 버린 것이 바로 수치심이다.” 권력을 쟁취할 때까지는 사람다움을 포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려진 수치심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뜻밖에도 부처님은 인간이 끝까지 지녀야 할 미덕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는 수치심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보았을 때 자기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치심(, hir), 남을 대할 때 남 보기 부끄럽게 여기는 수치심(, ottappa)이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부끄러워할 참()’과 역시 부끄러워할 괴()’ 두 글자를 묶어서, 불교에서는 참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부끄러움은 믿음, 계행, 배움, 보시, 지혜와 함께 성자의 일곱 가지 재산(칠성재)’ 속에 들어간다. 이 부끄러움이 있어야 사람이 스스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해지고 이웃과 세상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런 떳떳함에 스스로 행복해짐은 물론이요, 세상도 그 덕을 입게 되니 모두에게 참 좋고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수치심이요 참괴심이다. 설마 정치하는 사람 모두가 이 수치심을 버렸을까마는, 드라마 속 작중인물의 저 말이 자꾸 맘에 걸린다.

국회는 법을 만드는 곳이지 법을 지키는 곳이 아니라는, 얼토당토 않는 우스갯소리가 상식인 듯 통하는 입법부에서, 그 많은 영감님들이 수치심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재산으로 여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일하지 않고도 꼬박꼬박 챙겨가는 저들의 세비가 덜 아까워질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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