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해의 길 3

“번역은 반역이다.”

흔히 번역의 어려움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번역은 단순히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일이 아니다. 언어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철학이 총체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간과한 채 이루어진 번역에 오역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번역은 문화와 역사 전체를 옮기는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Religion을 ‘종교’로 번역한 것은 단순한 오역을 넘어 문화적 배경을 담지 못한 반역의 대표적 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릴리전은 신과 인간의 재결합을 의미하지만, ‘종교’에는 그런 의미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자로 종교(宗敎)란 글자 그대로 ‘으뜸가는(宗) 가르침(敎)’이다. 그런데 왜 종교를 으뜸가는 가르침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종교가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 즉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학문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분야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 궁극적인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오직 종교만이 그에 대한 답을 주기 때문에 으뜸간다고 한 것이다.

아직도 종교가 불교용어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중국인들은 인도어로 된 불교경전을 한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능가경>에 있는 ‘싯단타(Siddhanta)’를 ‘으뜸’이라는 뜻을 지닌 ‘종(宗)’자로 번역하였다. ‘싯다(Siddha)’는 ‘성취된 것’, 그리고 ‘안타(anta)’는 ‘극치’라는 뜻이다. 두 단어를 합치면 싯단타는 ‘성취된 것의 극치’를 뜻하는데, 이를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언어의 길이 끊어진(言語道斷) 깨달음, 열반이 된다. 그리고 ‘데샤나(Desana)’는 ‘가르침(敎)’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종교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 궁극적 진리(宗)를 언어를 통해 가르친다(敎)는 의미가 된다.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의 뜻과 꽤나 잘 어울리는 번역이다.

그런데 릴리전이 종교로 번역되면서 본래의 의미는 상실된 채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종교의 ‘원조’인 불교가 종교가 아니게 되는 이상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불교 입장에선 통탄할 일이다. 이러한 왜곡은 잘못된 번역, 동양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반역의 결과다. 그래서 서구의 종교학자들은 릴리전과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고 동서양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거룩함(聖)’을 통해 종교를 새롭게 이해하였다. 거룩함의 서구적 표현이 곧 신이며, 불교적 표현이 깨달음인 것이다.

종교학자들은 거룩함의 특징으로 초월성과 절대성, 궁극성 세 가지를 들고 있다. 불교의 깨달음은 상대적인 모든 것이 초월된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거룩함의 특성과 잘 어울린다. 우리는 돈이나 권력, 이념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이를 궁극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언젠가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종교는 유한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가르침이다. 저명한 종교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이를 간명하게 종교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정의하였다.

불교의 깨달음은 어떤 절대적 존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맛볼 수 있는 종교적 체험이다. 불교를 자력종교(自力宗敎)라 부르는 이유다. 붓다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등불 삼고(自燈明) 진리를 등불 삼아(法燈明) 정진하라고 당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은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우주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불교적 시선이다. 각자가 우주의 중심인 이유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성품, 즉 불성(佛性)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은 존재(覺者)를 붓다(Buddha)라고 부른다. 석가모니 붓다는 이를 직접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불교는 신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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