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유교의 논쟁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백인백색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은 얼핏 비슷하게 생긴 듯해도 자세히 뜯어보면 저마다의 개성과 생각을 가지고 산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따라 판단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이런 다양함은 삶이든 세상이든 우리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서로 대화를 나누도록 이끈다. 차이란 토론의 씨앗이자 발전의 원동력이며 통섭(統攝)의 발판이다.

그런데 이런 순기능도 서로 그 입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나온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그러니 네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우긴다면 대화는 일찌감치 물 건너갔고 멱살잡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라서 제 주견(主見)에 대해 트집을 잡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너그럽게 수용하기보다는 공격할 태세부터 갖추게 되어 있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나 무릉도원, 유토피아는 누구나 꿈꾸는 이상향이기는 한데, 그것이 정말 현실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면 ‘꿈꾼다’는 수식어가 아예 붙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교는 논쟁의 역사
논쟁은 상생의 시작
유·불 충돌도 회통

예로부터 남해는 신선(神仙)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쉽게도 모두가 신선은 아니다. 이곳에도 서로마다 입장이 다르고 이해관계에 얽혀 이게 옳으니 저게 그르니 하면서 언쟁이 벌어질 때도 있다. 한때 남해의 주산(主山) 망운산에 풍력발전을 위한 발전용 날개를 세워야 되냐 마냐를 두고 다투더니, 근래에는 신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건설을 두고도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발전’의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가부(可否)의 선택이 달라진 탓이겠지만, 군민들이 지혜를 모아 올바른 판단에 이르길 기대한다.

다툼은 이런 거대 담론에서만 빚어지는 것도 아니다. 개인 사이 사소한 문제에서도 충돌은 따라온다. 남해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지역인데도 주차 문제는 심각하다. 교통이 불편해 집집마다 차 한두 대씩은 가지고 있어, 때로 내 가게 앞에 주차하지 말라, 공용도로인데 왜 주차하지 못하느냐, 이런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개 친인척 관계로 얽혀 있어 극단적인 감정싸움으로 치닫지는 않지만, 감정은 묘한 물건이라 없어진 듯해도 앙금은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

나도 성격이 원만한 편은 못 돼 남해에 산 지 7년째인데 그 동안 척을 진 사람들이 꽤나 있다. 이런 사람들과는 말도 섞기 싫어 아예 만나지 조차 않는다. 상대편 주장을 들어보면 내게도 분명 잘못은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나의 개인적인 이익 때문에 그들과 대립하지 않은 것으로 위안을 삼지만, 너울가지가 넓지 못하고 대화와 설득에 능하지 못한 결점은 상처만 남길 뿐이니 고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
백 년도 못 사는 인생을 싸움만으로 일관한다면 그 인생을 두고 잘 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기억만 남기기란 불가능하더라도,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진 않더라도, 죽어 육신은 먼지가 되고 생각은 안개처럼 사라져도, 그 사람 이름값은 하고 살았다는 평은 들어야 하지 않을까? 연기처럼 가뭇없이 스러지는 사람의 숙명 앞에서 ‘겸허’라는 말의 뜻을 되새겨본다.

우리 서로 잘해 봅시다
원융(圓融)의 화엄장(華嚴藏) 세계를 지향하는 불교에서는 다툼이나 논쟁이 없었을까? 분별과 대립이 극복된 이상적인 불국토 실현이 궁극의 목표인 불가의 터전이라면 없어야 당연한데,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우선 석가모니 부처님부터 논쟁과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보고난 뒤부터 부처님의 내면적 갈등은 시작되었다. 이 번뇌를 털어내고자 부처님은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했다. 그리고 세상을 주유(周遊)하면서 방법을 찾았고, 갖가지 수행법을 시도해 보았다. 자신의 몸을 학대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고행법(苦行法)까지 감행했지만, 해탈의 삼매경은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따져보면 논쟁의 연속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외도(外道)들이 권유한 대안을 실천하며 따져보았고, 그 결과 올바른 길이 아님을 절감했다. 부처님은 수행법을 두고 외도들과 논쟁을 벌인 셈인데, 우선은 수용했지만 첩경이 아님을 알자 버렸다.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룬 뒤에도 숱한 마군(魔軍)들이 달려들어 부처님을 회유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이들 외도들과 마군마저도 모두 귀의했으니, 부처님은 남다른 논쟁가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하다.

대승(大乘)을 택할 것인가 소승(小乘)을 택할 것인가도 논쟁의 대상이었다. 불가 수행자의 최종 목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일 터인데, 소승이 ‘상구보리’에 주로 뜻을 두었다면, 대승은 더 나아가 ‘하화중생’에 이르는 곳까지 가고자 했다. 동전의 양면처럼 이 둘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을, 사람들의 견해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구분도 논쟁거리였다. 부처님의 말씀을 좇을 것인가, 부처님의 마음을 좇을 것인가를 두고 벌인 대립이었다. 말씀의 깃발 아래 깨달음의 성채를 쌓자는 논의가 나왔고, 마음을 보아 성불(成佛)의 문을 열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로 배척하는 분열이 아닌 선교일여(禪敎一如)로 통합하자는 방향으로 매듭지어졌다. 말씀이 따로 있고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불이(不二)의 해법을 수용했던 것이다.

선종에서 보자면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문제도 논쟁의 초점이었다. 오랜 수행과 명상을 통해야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람들과 근기(根機)가 고양되면 일순간 깨달음에 들 수 있다는 주장을 편 사람들이 자신의 논리를 내세웠다. 사실 이 논쟁에서도 방점은 ‘오(悟)’에 찍히는 것이라 방법론의 울타리를 벗어난 싸움은 아니었다. 그래서 간화선(看話禪)이 주창되었지만, 여기서도 점수(漸修)라는 또 하나의 언덕을 마련해 논쟁을 중재했다.

조주 스님이 제안한 무자(無字) 화두 역시 시비의 속박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만물실유불성(萬物悉有佛性)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조주는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바람과 먼지에도 있다는 불성이 어찌 개라 해서 없을 수 있는가? 이 궤변 같은 선언은 많은 수행자들을 당혹감에 빠뜨렸다. 조주의 깊은 오의(奧義)를 나는 알 수 없지만, 이 화두를 들고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논쟁인가.

네가 없어져야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서로 버티면 한쪽이 소멸되지 않고는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서슬 시퍼런 칼부림과 비릿한 피비린내가 뒤따르는 제로섬 게임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강자독식이 섬뜩한 투쟁은 결국 양자 모두의 파멸을 가져오는 가장 극악한 논쟁 방식이다.
이렇게 보자니 불교에서 벌어진 논쟁은 상멸(相滅)이 아닌 상생(相生)의 몸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부처님 이후 태어난 모든 불자(佛子)들은 부처님이 갈파한 상생의 논쟁법을 배우고 익혔다. 그래서 다양한 논쟁이 있었지만, 서로 뺨을 때리는 파국이 아니라 서로 손을 잡고 품는 미담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이런 논쟁이야말로 모두가 이기는 논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너를 이기고야 말겠어
유교의 창시자 공자 역시 논쟁의 상수(上手)였다. 뒤를 이은 맹자(孟子, 기원전 372?-기원전 289?)에 오면 상대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극렬한 논쟁가의 정수를 보여 주었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얼마나 열띤 논쟁가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 곧잘 나온다. 공자라고 해서 적이 없을 수 없었고, 그런 이들에게까지 공자는 충서(忠恕)의 가르침을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 첨예한 예로 소정묘(少正卯)를 죽인 일을 들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니 나는 썩 믿지는 않지만, <사기(史記)>나 <공자가어(孔子家語)>, <순자(荀子)> 등에는 소개되어 있으니 다소 난감하긴 하다.
소정묘는 공자와 동시대를 산 노나라의 대부(大夫)였는데, 그 역시 제자를 모아 자신의 사상을 전파한 교사였다. 그런데 그의 주장이나 이론이 공자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중국의 학자 양영국(楊榮國)은 소정묘는 당시 신흥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했고, 공자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구체제(舊體制, ancien regime)를 옹호한 지식인으로 규정했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소정묘는 진보 성향의 사상가였고, 공자는 보수성이 강한 사상가였다.

공자는 지금의 법무부장관 쯤에 해당할 대사구(大司寇)가 된 지 이레 만에 소정묘를 체포해 5대악(大惡)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처형한 뒤 시체를 사흘 동안 궁정에 내걸었다고 한다. 나와 의견이 다르면 공존(共存)은 언감생심, 죽이고야마는 유가의 극단적인 이단 배척의 뿌리는, 아무리 좋게 봐도, 공자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유가는 다른 종교는 물론 다른 민족까지도 화이론(華夷論)에 사로잡혀 박멸해야 편히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유가의 극악한 이단 구분 악습은 조선의 멸망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지금의 일부 왜곡된 개신교의 논리와도 맥이 닿아 있는 듯하다.

여담인데 내가 처음 쓴 소설 <소정묘 파일>은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구상된 작품이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감히 일독을 권한다. 절판의 칼날을 피하진 못했지만, 도서관이라면 어딘가는 꽂혀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유가는 특히 논쟁을 즐겼다. 맹자의 성선(性善)과 순자의 성악(性惡) 논쟁이 있고, 조선시대 때는 전반기는 이기(理氣) 논쟁으로 침을 튀겼고, 후반기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이 두 논쟁은 조선의 미래를 가늠하는 중요한 대립이었는데, 결국 이(理)의 우월성이 인정되었고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논리가 우세승을 거두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는 조선의 불행이었고, 우리 역사의 불행이었다.

의견이 충돌할 때, 이것은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이지 어느 편이 틀린 것은 아니다. 타인의 논리를 존중하고 나의 주장을 설파하는 데서 참된 논쟁의 길은 열린다. 이렇게 열린 귀 열린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세상을 적의와 멸절(滅絶)이 아니라 화해와 화쟁(和諍)의 눈길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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