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눈 뜨고 눈 깜빡거리는 이것이 다 진리예요

 

모든 업을 녹이고 자성을 발견하려면

질문 모든 업을 녹이고 자성을 발견하려면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좀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요.

답변 부처님께서는 “고, 집, 멸, 도” 이랬습니다. 고덩어리.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는데 왜 ‘고’ 라고 그랬을까요? 그러면 악업 선업이 거기 포함해서 여러분 육신의 세포에, 이것이 인간에게도 혹성과 같아서, 이 육신으로 봐서는 이게 법망입니다. 세균이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이게 적응을 할 수 있는 세포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모두가 그 악업 선업이, 예를 들어서 부모의 인연이든 자식의 인연이든, 자식이 부모가 되고 부모가 자식이 되고 이런 인연들, 또는 짐승이 사람 되고 사람이 짐승으로 퇴보되고, 병신으로 퇴보되고, 승화되고 이러한 인과가 모두 접해서 거기에서 수십억 마리가 지금 회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때로는 즐거운 일도 생각이 나오고, 때로는 속상하는 일도 나오고, 때로는 아주 우환이 생기고 때로는 병고가 생기고 절망이 생기고, 이러한 것이 수없이 발산을 합니다, 그 악업 선업에서.

분별이 없으면 부처를 이루지 못해요.
그러니 분별을 끊으려 하지 말고
모든 거를 맡겨 놓으란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거기에 속지 말라 이러셨습니다. 환상에 속지 말라. 모든 거, 거기에서 일어나는 대로 모든 것을 거기 놔라. 이렇게 ‘방하착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작업을 어떻게 해야만 되나. 우리는 모든 거, 거기서 나오는 거든지 또 오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거든지,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주도 있고 생활도 있고, 생존도 있고 부처도 있고, 모두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어떤 게 먼저냐? 여러분이 먼저입니다.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거지, 여러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부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넘어지면 일어날 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듯이,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서 나오는 것을 다시 그 자리에 놓는다. 거기 맡겨 놓는다. 이것은 여러분이 생활하시니까, 생활에서 모든 것을 이렇게 안 하면 공덕은 없는 겁니다. 바깥에서 타력 신앙으로서 믿는 분들은 공덕이 될 수 없습니다. 첫째, 복은 좀 받을지언정, 위안은 될 수 있을지언정 공덕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그 업보를 녹일 수도 없거니와 이 모두를 놓지 않는다면 하나하나 자기 이 모든 그 수십억 마리의 악업 선업을 녹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모든 악한 마음이 나오든지 선한 마음이 나오든지, 선하게 마음이 나오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악한 마음이 나오면 ‘내 주인공만이 나를 악하게 안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 잘되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내가 병신 안 되고 이렇게 성한 몸으로 다니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첫째, ‘나’라는 아집을 버려야 하고, 욕심을 버려야 하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즉 말하자면 나라는 아집만 버린다면 거기 뭐 붙을 게 있겠습니까? 나라는 것만 죽는다면 뭐가 붙을 게 있습니까? 모든 것을 그렇게 따로 놓고, 내 주인공에 나도 놓고 나오는 대로, 바깥에서 들어오는 대로, 안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대로 거기에 끄달리지 말고 하나하나 놓는다면, 그 수십억 마리 중에, 육신 속에서는, 즉 말하자면 간장 공장이니 위 공장이니 이자 공장, 방광 공장, 소장 공장, 대장 공장 이 공장이 많습니다. 이것을 지배할 수 있는 내 마음, 그 지배인 사장은 항상 두뇌로부터 사대로 통신을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거기에 놓는다면 하나하나가 자동적으로 진화돼서 보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기 놓지 않는다면 자기가 악업 선업 지은 대로 독 안에 들어도 면칠 못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하나하나 용광로에 쇠를 넣듯이 그러면 쇠가 생산이 돼서, 새 쇠로서 생산이 돼서, 또 이름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나가듯이 이 몸뚱이 속에 있는 그 중생들도 보살들로 화해서 털구멍을 통하고, 목구멍을 통하고, 콧구멍을 통하고, 귓구멍을 통해서 나고 들면서 보살행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속지 않는다면, 그대로 그것을 다 녹인다면 금강신이 된다는 얘기죠. 거기에서 그것을 다 녹일 때는, 그렇게 녹일 수 있는 그 마음이 철저하다면 우리가 물이 없는 아주 마른 땅에, 갈라진 땅에 물을 촉촉이 주는 거와 같다. 돌을 골라내는 거와 같고, 체로 치는 거와 같고, 또는 풀 뽑아 버리고 고렇게 해서 잘 물을 주면 그냥 아무 소리 없이 갈라지지도 않고 손색이 없이 싹이 나와서 바로 발현이 돼 가지고 자라서 열매가 열리고, 물을 먹어서 만 가지 맛을 낼 수 있는 그러한 그 열매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성을 깨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지 않고는 절대로 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성 삼보에 귀의한다는 말은

질문 자성 삼보에 귀의한다는 말이 제게는 좀 생소한데요, 좀 더 자세하게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보통 여러분은 어떤 일이 생기면 현재 의식에서만 알거든요. 거기서 복작복작하다가 해결을 하고 거기서 복작복작하다가 그냥 병이 들고 그러지요. 그래서 “지견으로 살아라. 소견으로 살면 병든다.” 이러는 겁니다. 또 소견으로 살면 모든 게 나한테 다복하게 오질 않아요. 지혜롭게 살아야지. 그래서 우리가 잠재의식 쪽에다가 조금만 여유 있게, 뭘 하면서도 생각은 급히 하면서, 회사를 가든지 일을 하든지 하면서도 잠재의식 속에다가 좀 ‘아하! 이 세상에 나기 이전에도 바로 내가 있었고, 지금 현재에도 몸은 비록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뼈와 살을 빌려서 몸이 났어도 내 몸속의 수십억 마리에 관한 의식은 바로 인으로 인해서 과가 돼서, 내 몸뚱이 속에 모두 이렇게 소임을 맡아 가지고 운행을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내 마음은 지배인과 같아서 내 마음 한생각을 하는 데에 모두 따라 줍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따라 주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잘 포용력 있게 해 나가는 것, 바깥에서 따라 주고 이렇게 해서 안팎이 없이 이 생활을 진행하는 것이 그 삶의 보람을 느끼는 우리 자유인의 생활이 아닐까 이렇게 보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 절에 오면 삼배를 하게 합니다. 즉 말하자면 “법당에 들어오면 삼배를 너희 스스로 하라.” 이렇게 했거든요. 그건 뭐냐 하면 일배는 모든 천지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에 직결돼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공생이자 공심이다 이겁니다. 우린 혼자 사는 게 없어요, 독불장군 없듯이. 사장이 있으면 직원이 있고 직원이 있으면 사장이 있듯이, 사장이 없는데 직원이 어떻게 삽니까? 직원이 없는데 사장이 어떻게 살아요? 그래서 그 생명들은 공생·공용·공심·공체·공식화하고 있지요. 그런 것이 이게 한데 합쳐서 모든 것을 내 자성 삼보에 귀의한다. 즉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의 근본, 내가 마음을 내면 법, 마음을 내니 몸뚱이가 움죽거리니까 승. 이래서 삼보에 귀의한다 이런 겁니다. 자기 삼보에 귀의한다는 겁니다, 이게. 그러니까 자기한테 결국은 고개를 숙여서 자기가 겸손한 거를 배우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한테 절하는 거지, 이 고깃덩어리한테 뭘 하게 절을 하겠어요? 이걸 대상을 두고서 한번 이 몸뚱이에다 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음과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거기다가 내가 겸손하게, 즉 말하자면 지견으로써 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그 마음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주인공에 자기가 바로 절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로 내 주인공을 믿고 거기다 맡기고 ‘거기서밖에는 해결해 줄 수 없다.’ 앞으로도 그렇고 모든 일에 용도에 따라서 그렇게 하면서 ‘바로 내 주인공밖에 나를 이끌어가 주는 게 없다.’ 한다면 자성 삼보는 첫째로 기름, 영원한 생명의 근본, 또 생각을 냈다 하면 운전수, 또 차는 이 몸뚱이와 같아요.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는다면 몸뚱이가 움죽거려지지 않아요. 의식이 빠지면 송장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자성 삼보에 귀의한다는 거예요. 차가 없어도 안 되고 기름이 없어도 안 되고 운전수인 나가 없어도 안 되고. 그러니 삼위일체가 다 구성돼서 서로 공해서 찰나 생활을 하는 거지요. 찰나찰나 돌아가는 거예요, 그냥.

그래서 이 세상의 진리는 공했다. 진리는 쳇바퀴 돌듯 하는 거며 인간이라면 우리가 체로 쳐서 거르는 거와 같아요, 이 삼차원의 중세계가. 체에다 쳐서 상세계로 올리고 하세계로 떨어지고, 중세계에서 윤회에 말려서 그 고통을 받고 사는 것이. 그렇기 때문에 내 한생각이면 이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의 의식도 다 한마음을 따라 줘야 돼요. 따라 주게 만들어야 돼요. 바깥에서도 그렇고. 이게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세균이 있다, 영계가 있다, 유전성이 있다…. 이런 게 그냥 들어오는 줄 모르게, 여러분이 주장심을 가지고 믿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기 주인공을 믿지 않는다면 바로 주인이 없는 거와 같아서 바깥에서 세균이 들어오든 영계가 들어오든 유전성이 들어오든 그건 막을 수가 없어요. 내 집 안에 주인공이 있어야만이 바깥에서 나그네가 와도 “게 누구요?” 그렇게 해서 아는 사람이면 들이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면 들이지 않아요. 이렇게 해야만이 내 몸을 잘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있죠. 모든 게 다 그래요.

그러니까 나로부터 이 세상이 있는 거지, 내가 없고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믿을 게 뭐 있겠어요? 대신 죽어 주지도 않아요. 아파 주지 못하죠, 먹어 주지 못하죠, 똥 눠 주지 못하죠, 자 주지 못하죠. 그러니 현재의 나는 바로 내가 나기 이전 영원한 자기의 근본을 안 믿을 수가 없지요. 그 근본으로 인해서 어머니 아버지의 정자와 난자와 자기 영혼이 거기 포함됐기 때문에 삼위일체로 구성된 겁니다. 그런데 자기를 어찌 믿지 못해요? 미생물에서부터 수억겁 광년을 흘러 내려오면서 쫓고 쫓기면서 진화돼서 사람까지 됐는데 자기 끌고 나온 거를 믿지 못해요? 어림도 없지요. 자길 믿지 못하면 자기 몸뚱이가 벌써 구덩이에 들어가서 일어나지 못하고 구덩이에 빠져서 허덕이고, 이러는 문제들이 한두 건입니까, 어디? 죽어도 살아도, 변소엘 가도 항상 나하고 같이 있는 건 내 주인공밖에, 나를 이끌어 주는 건 내 주인공밖엔 없어요.

삼형제가 있는데 서로 의가 상해서…

질문 저희는 삼형제가 있는데 부모의 유산 분배 문제로 서로 의가 상해서 이제는 서로 보려고도 하지 않는답니다.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어 이렇게 만났을까요? 어떻게 이 인연을 풀고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우리가 부모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그것이 지혜가 넓은 그러한 마음이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겸손과 지혜, 의리와 사랑, 값싼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 이러한 것으로서 우리가 해 나갈 수 있다면, 왜 엇각이 되고 싸움을 하고 가정이 화목지 못하고 그러겠습니까. 만날 네 거 내 거, 더 갖는다 덜 갖는다 이런 것 때문에 싸우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네가 더 속 썩였지. 너로 인해서 내가 이렇게 됐어. 너 때문에 속 썩어 죽겠어.” 어쩌니 저쩌니 하도 많으니까요, 뭐.

그래서 인간이 살아나가는 이 도리, 이 법을 빼놓고 부처님 법은 없어요. 우리가 눈 뜨고 눈 깜빡거리는 이것이 다 진리예요. 쉴 사이 없이 눈 하나 깜짝깜짝하는 대로요,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요. 헛되게 이 몸뚱이를, 이 고상하고 귀중한 이 몸뚱이를 타고 나서 그대로 그래 허탕하게 그냥 옷을 벗어 버리면 되겠습니까. 옷도 여러분이 말이에요, 이 맘에 들든 안 들든 내가 어차피 옷을 샀으면 바로 입고선 그게 더러울 때 벗어야지, 그냥 입지도 않고 후딱 벗어 버리면 그게 시원하겠습니까? 제아무리 친절하고 사랑을 한대도 아마 나와 나밖에는 없을 거예요. 내 몸뚱이, 내 마음, 내 생명 이것이 제일 근중한 겁니다.

글쎄, 집 안에서 불이 났는데 말이에요, 뭐, 불투성이니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래서 가만히 구경을 하는데, 그냥 애고 뭐고 다 그냥 그냥 자기들대로만 나오더란 얘기예요. 또 “불이야!” 그러니깐 그 옆집에서는 팬티만 입고 나오는데, 또 한 남자는요, 여자 속치마를 끼고 나온 거 있죠. 어떻게 생각도 없이 그걸 끼고 나왔는지. 그러니까 이것이 생각에 모든 게 달려 있다는 얘깁니다. 모든 게 한번 생각을 이렇게 돌리는 데에 사람이 체면도 차리고 이러고 사는 거지, 사람이 한생각이 돌아가지 않는데 무슨 체면이 있고 거기에 무슨 분별이 있고 그러겠습니까? 그래 분별이 없으면 부처를 이루지 못해요. 그러니까 분별을 끊으려고 하지 말고, 모든 거를 맡겨 놓으란 말이에요. 그러면 잠재의식 속에 다 쟁여 있으면서, 쟁이면서 없어지고 쟁이면서 없어지고….

테이프에 다 녹음을 해서 넣는데 내가 그거를 지우려면 거기다가 다시 녹음을 해야 그 앞서 녹음한 게 없어지죠. 연방 한 데다가 또 녹음을 하고 한 데다 또 녹음을 하고, 그래야만이 그 앞서의 인과응보나 유전성 이런 것이 다 없어지고, 연방 담으면 없어지고 연방 담으면 없어지고 이렇게 되지요. 그 자리에다 놓지 않으면 앞서 녹음한 것이 안 없어집니다. 딴 테이프에다가 아무리 녹음을 해도 앞서 녹음한 테이프가 안 없어져요. 그러니 녹음한 그 테이프에다가 다시금 하면 앞서 한 거는 자꾸 없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놓고 그냥 여여하게 가느니라.” 하는 그거나 똑같은 얘깁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 나갈 수 있는 마음 자체가, 생각으로 ‘아이고, 나는 전생에 무슨 업보를 이렇게 타고 나서 이러할까?’ 그러면 벌써 자기가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겁니다. 벌써 테이프는 억겁을 돌아오면서 다 지워 버리고 왔는데, 자기 마음으로 지우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쟁여 있는 거예요. 지나간 어저께를 회상하고 아무리 해 봐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뒤를 돌아다봐도 어차피 지나간 겁니다. 그런데 왜 뒤를 돌아다봐요? 지금 앞을 보고 가기도 바빠 죽겠는데도 그냥 옆댕이, 가지 붙은 거를 다 그걸 돌아다 밟으며 가려니 얼마나 골치가 아프겠어요? 물질이 있는 거라면 그렇게 팔방으로 그렇게 눈을 돌리고 귀를 돌리고 그렇게 다니다 보면 그것이 인과응보가 되고 유전성이 돼서 자기가 받은 것대로 자기가, 즉 말하자면 맡은 바대로 나와서 그 맡은 바대로 출현을 해야 하거든요.

영화배우들이라고 얘길 하죠. 영화배우들이 자기 맡은 바대로 역을 맡아 가지고 나와서 지금 잘 출현들 하고 있다고 그러죠. 머슴으로 나왔으면 머슴, 정치인으로 나왔으면 정치인…. “야, 영화배우들이 역을 참 잘한다.” 영화배우가 뭐 따로 있나요? 그거를 갖다가 다 해 가지고 아마 영사기를 돌린다면 굉장치도 않을 거라고요. 천분지 일 만분지 일, 거기에서 쪼금 그저 써 가지고, 원고를 써 가지고선 그걸로다가 영화를 하는 거지, 진짜 무대는 지금 이 자리라고. 이 지금 세상 자리가 진짜 무대예요.

어저께 사신 거 생각나십니까? 생각나지요? 그것이 바로 이 잠재의식 속에 컴퓨터처럼 적혀 있기 때문에, 거기에 그렇게 쟁여 있기 때문에 사람의 몸뚱이가 없어졌어도 그 어저께 한 일을 내가 알듯이 죽어도 사후에 내가 그것을 알고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자기 몸뚱이가 이렇게 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모습을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꿈을 꿔 보셨죠? 아, 꿈에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데 뭘 그러세요? 사후에도 그렇게 그렇게 하고 다닐 겁니다. 자기 한 것대로, 본 것대로, 들은 것대로…. 자기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 만난 사람 보셨어요? 다 인연에 따라서 보고 듣고 서로 싸우고, 그래 가지고 그게 남아 가지고 찌끄러기가 항상 돌아가면서, 내 몸뚱이가 없어졌어도 그게 세세생생에 그 모습을 지어 가지고서는 돌아다니면서 서로 싸우고 아픔을 당하고 그러죠. 그래서 살아 있을 때는 아픔이, 죽으면 이게 살은 안 아프지만 이 마음이 아픈 거는 세세생생에 그게 가거든요, 그 마음이.

그러니까 그게 끊어질 줄 모르고 가기 때문에, 이 지금 생시의 아픔은 잠시 잠깐이지만, 이 마음의 아픔은 세세생생에 끊임없이 꽁지가 꽁지를 물고 쫓아다닌다는 말이 있어요. 그거 거짓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전자에 어떠한 그 아픔을 당했을 때에 지금까지도 그것은 지우지 못하고 있죠.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그런 건 잊어버리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세세생생 흐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지우지 못한 추억들, 모든 그런 것을 다 자기가 녹음해 놓은 데다가 다 도로 녹음을 해 버리면, 지금 살아나가는 대로 녹음을 해 버리면 전자에 녹음됐던 건 없어지죠. 그렇게 하세요. 그러면 사후에 또 그러한 여건들이 결부돼서 돌아가진 않을 테니까요.

죽은 후에도 영적 발전이 가능한지요

질문 어느 책에서 사람들이 죽은 후에도, 자살이나 사고로 죽은 사람들도 영적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다고 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이 육체 없이도 영적 발전이 가능한 것인지요.

답변 우리가 정자 난자가 이렇게 한데 합치면 그게 합치는 동시에, 말을 하고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그 자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 그 영혼이라는 건 뭘 하는 거냐. 바로 자기 불성을 싸고 있는 겁니다, 자기 불성을. 생명력을 싸고 있는 거죠. 그래서 죽어도 이 의식과 이 모습이 없어질 뿐이지, 그 불성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가 살면서 어떠한 일을 저질렀든지 좋은 일을 했든지, 거기에 따라서 또 차원이 높아지기도 하고 차원이 낮아지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것은 거기다가, 삼합이 개입하는 데 넣을 수가 없다 이겁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수가 없지만 그것은 모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데에 따라서 모두가 가는 거니까요.

은하계의 별성도 모습은 다 떨어지지만 그 원소는 남아서 다시 이 옷을 입어요. 별성의 옷을 입는다고요. 그렇듯이 사람도 그렇게 원소는 남아서 더함도 덜함도 없이 남아서, 즉 말하자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주어지면 차원이 주어지는 대로 또 진화되는 거지요. 그래서 살아나가고 진화돼서 또 생존하게 되는 거고, 또는 거기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모습이 사람의 모습이었는데 짐승의 모습도 될 수 있고, 짐승의 모습인데 사람의 모습도 될 수 있고, 차원에 따라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저께는 과거지만 어저께에 살 때는 오늘이었고 삼천 년 전도 오늘, 내일은 미래지만 내일도 오늘입니다. 내일도 오늘이에요. 그래서 오늘, 영원히 오늘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있으나 찰나찰나 바뀌어 가지고 가니까 공했다. 그냥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돌아간다, 모두가, 하나도 없이. 하다못해 개미 하나도 그냥 있는 게 없이 돌아가고 있고 지구에 살고 있다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들은 나무 하나도 권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냥 죽는 게 아니다. 죽으면 목신이라는 원소가 있다. 그래서 그 나무들하고도 같이 교류가 돼서 그건 또다시 싹이 날 수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혼이 죽으면 더하고 덜함도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부닥침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나오는데, 그래서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 자손이 된다든가 부모가 된다든가 이런 연결성이 있다면 틀림없이 죽은 사람도 공부할 수가 있고 개혁할 수가 있고 계발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책 써 놓은 거를 볼 때 “그냥 죽어도 그냥 할 수 있다.” 이건 말이 안 되죠. 우리 산 사람도 지금 어떠한 한생각을 해서 실천을 옮기는 데 문제가 있는 거지, 한생각을 하지도 않고 실천도 옮기지 않는데 뭐가 보수가 나와요? 에너지가 안 나오지. 그런 것과 같은 거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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