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서울 봉은사 미륵대전서 서울 강남 도심을 바라본 모습. 작은 능찰로 시작해 현재의 대가람이 되기 까지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겪었다.

견성사(見性寺)서 봉은사로

조선 초 태종과 세종으로 이어진 배불정책은 세조에 이르러 잠시 멈췄다. 덕분에 조선불교는 숨 돌릴 수 있었으나 성종 이후 다시 배불로 치달으며 암울해 졌다. 내불당이 궁 밖으로 옮겨지고 도성 안 비구니 사찰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사대부 여자의 출가가 금지되었다. 친히 국정을 다스린 이후에는 일체의 사찰을 창건하지 못하게 했으며, 옛터에 다시 중창하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다.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불교에 불리한 조항이 다수 수록되었다.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 역시 불교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성종의 릉 옆에 있던 견성사를 다시 짓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드러내자 신료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첫 포문은 연산 1년(1495) 12월 7일 홍문관 부제학 박처륜(朴處綸)이 열었다.

연산군의 견성사 중창 발원
중종 등극하며 위기 맞아
문정왕후 관심에 사격 확대

“지금 견성사가 능 곁에 가까이 있어 승려들의 불경 외는 소리와 새벽 종소리 저녁 북소리가 능침(陵寢)을 소란하게 하고 있으니, 하늘에 계신 성종대왕의 영이 어찌 심한 우뇌(憂惱)가 없으시겠습니까. 우리 성종께서 고명 정대하신 성왕(聖王)으로 사교에 현혹되지 않고 깊이 미워하셨는데 새로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철거하지 않으십니까. 바라옵건대, 다시 깊이 생각하소서.”

즉위 초 신하들과 부딪치기 싫은 연산군은 자신의 생각을 잠시 미루어 두었다. 견성사 중창 문제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가 2년 뒤 다시 불거졌다. 그러자 연산 3년(1497) 7월 18일 홍문관 전한(典翰) 이수공(李守恭)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다.

“지금 또 크게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새 절을 창건하려 하시니, 선왕의 유지에 어찌하며, 성상의 효성에 어찌하렵니까. 이는 비록 대비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전하께서 만약 성심으로써 간하시면 대비께서도 어찌 차마 성종의 뜻을 위배하여 전하를 불효의 지경으로 빠지게 하겠습니까.”

연산 4년(1498) 2월 견성사 중창문제는 연산군과 신료들 사이 첨예하게 논의되었다. 13일 지평(持平) 신복의(辛服義), 정언 곽종번(郭宗蕃)이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토목 역사를 시키는 것은 궁궐을 수선한다 해도 오히려 불가하온데, 더구나 무익한 승사(僧舍)를 수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뢰었다.

그 이후 논의를 보면 2, 3일에 한 번씩 신료들의 논의가 있었다. 2월 15일 대사헌 권경우(權景祐), 2월 18일 장령(掌令) 조형(趙珩), 2월 20일 지평 박소영(朴紹榮)과 정언 곽종번(郭宗蕃), 2월 24일 사간(司諫) 이점(李預), 마침내 2월 26일 좌의정 어세겸(魚世謙)이 견성사 중창은 옳지 않다고 글을 올렸다. 그들은 견성사 중창은 백성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며, 흉년과 겹쳐 어려움이 가중되므로 정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견성사 중창의 일은 예조판서의 사직으로 이어질 정도로 반대가 심했다. 연산 4년(1498) 5월 23일 박안성(朴安性)이 사직서를 올린 것이다. 신하들의 거센 저항에 연산군도 자신의 뜻을 바꿨다. 예조판서 박안성이 전에 견성사가 능실(陵室)과 너무도 가깝기 때문에 철거를 못하겠으면 먼 곳으로 옮겨지어야 한다고 주장을 받아들였다. 선릉 옆에서 지금 수도산 위치로 옮겨 대규모로 확장되었고 그 후 경산제찰(京山諸刹)의 으뜸이 되었다.

봉은사의 특혜와 수난

견성사에서 봉은사로 중창되면서 왕실의 후원이 이어졌다. 연산 5년(1499) 12월 12일 새로 창건한 봉은사에 전토가 없으니, 각도 절에서 거둔 세와 소금을 옮겨 주라고 전교하였다. 뒤이어 봉은사에 봉선사의 전례에 따라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런데 땅이 먼 곳에 있었다. 불편함이 있자 연산 6년(1500) 1월 8일 봉은사에 주는 전세를 가까운 고을의 전세로 바꾸게 하였다.

이처럼 왕실의 관심을 받은 봉은사였지만 중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탓에 중종 때는 공신들을 비롯한 신료들의 권한이 커졌다. 자연히 불교배척 역시 강해 동국여지승람 소재 이외의 사찰을 모두 없애고 사원의 전답을 그 지역 향교에 속하게 하였다. 승과가 폐지되어 인재 등용에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급기야 경국대전에 있는 도승조(度僧條)가 삭제되면서 법적으로 승려가 되는 길이 없어졌다.

이런 배불의 분위기가 봉은사에게도 닥쳐왔다. 중종 33년(1538) 9월 19일 신하들은 사찰을 헐어버리고 서적도 태워버려야 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봉은사부터 시작하여 나머지 사찰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환속되는 승려들로 인해 농민이 많아지고 군액이 보충될 것이며, 세속을 어지럽히는 폐단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다음해 역시 봉은사 폐지가 주장되었다. 신료들의 눈에 불교의 중심은 봉선사와 봉은사였다. 그래서 두 사찰을 철거하지 않고 다른 사찰을 철거하는 것은 뿌리에다 물을 주면서 가지를 자르는 것과 같아 불교를 근절시킬 수 없다고 여겼다. 중종 34년(1539) 6월 4일 성균관 생원 유예선(柳禮善) 등이 상소를 올렸다.

“신들의 생각에 이단의 뿌리가 되는 곳은 봉선사와 봉은사입니다. 이들이 내수(內需)를 출입하며 동궁(東宮)을 위해 불공을 드린다고 하지만 이미 장성한 뒤에 이렇게 빙자하는 괴이한 말이 사방에 파다하게 퍼졌으니, 신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픈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들은 이로부터 동궁을 구실로 삼는 일이 더욱 흥기될까 염려됩니다. 이 두 사찰을 철거하여 그 뿌리를 끊어버린다면 화가 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문정왕후의 불교중흥과 봉은사

어려움에 처한 봉은사를 구한 사람은 문정왕후였다. 1545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게 된 왕후는 평소 가지고 있었던 불교부흥의 뜻을 폈다. 이때 천거된 고승이 설악산 백담사에서 수행하던 허흥당 보우였다. 그는 중종 4년(1509)에 태어나 15세가 되던 해 금강산에 들어가 6년간 수도하고 하산하였다. 당시 배불정책에 의해 많은 사찰이 사라지고 수행자가 핍박받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다시 입산하여 4년 동안 수행하였다. 그 뒤 산문을 나와 많은 불사를 행하면서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명종 3년(1548) 12월 문정왕후가 불교를 부흥할 고승을 구할 때 천거되어 봉은사 주지에 임명되었다.

그가 제일 먼저 실행한 것은 선교 양종의 부활이었다. 연산군 때 폐지되어 청계산 청계사로 옮겨진 양종도회소는 유명무실하였다. 그런 양종도회소를 명종 5년(1550년) 부활하고 봉은사를 선종의 본산으로 하였다. 이때 교종의 본산은 봉선사가 되었다. 다음해 보우는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봉은사의 사격이 전국에서 으뜸이 되었다. 이런 문정왕후의 불교정책에 대해 신료와 성균관 그리고 지방의 유생들이 올린 항소가 300여 건이 넘었다. 이런 주장에 맞서 문정왕후는 오직 나라의 폐단을 구하고자 할 뿐이며, 양종을 다시 세우는 이 일은 임금과는 관계가 없고 모두가 자신의 책임이라 주장하면서 불교중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선종판사에 임명된 보우는 승과를 부활하여 불교계의 인재를 선발하였다. 먼저 각 지역에서 초시에 응시할 수 있는 인원을 설정하였다. 평안도 함경도는 각 100명, 전라도 경상도는 각 500명, 황해도 청홍도는 각 400명, 경기 강원도는 각 300명으로 해서 모두 2600명이 양종으로 나누어 응시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가 다른 도에 비해 그 숫자가 적은 것은 북쪽의 경계이므로 군정의 수가 줄어들 것을 염려한 결정이었다.

양종은 초시에서 각 100명씩 선발하였다. 그리고 명종 7년 4월 12일 예조의 주관으로 봉선사와 봉은사에서 실시한 복시에서 선종 21인 교종 12인을 뽑았다. 이런 계기로 봉은사 앞 들판은 승과평(僧科坪)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때 실시된 승과에 의해 조선 불교중흥의 대조사인 서산대사 청허 휴정이 뽑혔으며, 그 후의 승과에서 등용된 사명당 유정도 국난타개의 공을 세우는 허응당 보우가 예견한 것처럼 조선불교를 위한 인재가 선발되었다.

정릉(靖陵)의 천장(遷葬)과 봉은사

이렇게 불교중흥의 중심지가 된 봉은사에 힘을 실어준 것은 중종의 묘 정릉(靖陵)의 천장이었다. 중종이 죽자 먼저 돌아간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옆에 묻혔다. 문정대비는 자신이 죽으면 중종과 함께 묻히고 싶었다. 명종 17년(1562) 1월부터 천장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명분으로 산릉이 길지가 아니라는 설이 제창되었다. 그해 9월 4일 선릉의 동쪽 기슭으로 정릉이 옮겨졌다.

왕릉을 옮겼으나 지세가 낮은 곳이어서 흙을 쌓아 높이는 공역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해마다 강물이 불어 넘치면 재실에까지 물이 차올랐다. 많은 사람이 분개하였고 같이 묻히고자 했던 문정왕후도 죽어 이곳에 오지 못하고 다른 산에 장지를 정했다.

정릉의 천장으로 봉은사의 사격은 커졌으나 책임을 맡은 보우는 유신들의 극렬한 비판과 불교인들의 모략으로 곤란하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 전환하려고 회암사를 중건하고 낙성식을 겸하여 무차대회를 계획하지만 문정왕후의 건강악화로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문정왕후는 자신의 죽음에 임박해서 내린 언문 유서에서 승과에 대해 옛날 그대로 보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죽자 불교 중흥책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대신들은 양종과 함께 승과를 폐지하고 보우를 몰아내라는 상소를 올렸다. 명종은 보우의 승직을 박탈하고 이어 양반들의 사찰 참배를 금지하였다.

다음해 4월 명종은 승과를 폐지하는 전교를 내렸다. 보우를 처단하라는 상소가 빈번하자 왕명으로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명종 21년(1566) 그곳에서 제주목사 변협에게 장살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불교의 중흥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