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내 뿌리도 없다는 그 도리를 증득해야 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불(佛)은 뭐냐. 불바퀴는 왜 불바퀴라고 그랬느냐. 그냥 생명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생명이 바로 영원하기 때문에 불바퀴라고 했습니다. 불이라고 한 것은 여러분의 생명의 근본, 즉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그걸 불이라고 했다 이겁니다. 본래 자성불은 있는 건데, 자기 자성불에서 모든 거를, 나고 드는 것이 전부 그 능력으로 나오는 건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성불은 믿지 않고 저기 계신 딴 부처님을 믿고선 “부처님, 날 좀 잘되게 해 주시오.” 하는데 그건 기복이지 공덕이 아니야. 공덕이라는 건 무엇 때문에 공덕인가. 한마음으로 돌아가야 공덕이 아닌가. 나 아님이 없으니까 내가 하지 않는 일이 없고, 내 아픔 아닌 것이 없고, 내 몸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그게 공덕이 안 되겠나. 일체제불과 일체 보살, 역대 조사가, 역대 중생이 진드기 하나 버리지 않고 전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어나는 그 마음이 우리를 부처로 만들 수 있고
법신으로 만들 수 있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나를 수련시키는 채찍입니다.

그래서 그 한마음마저 없다는 사실은 한마음이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부처님께서 한마음을 내실 때에 보살로서 화해서, 법신으로 화하시고 그래서 남이 응해 달라는 대로 응해 주시는 그 한마음이 돼 주시는 그 마음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큰 호랑이가, 큰 소가, 큰 코끼리가 또는 독사라는 이름을 가졌어도, 어떤 사람이 백정 노릇을 했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아, 부처님한테 귀의해서 내 마음 가운데 항상 넣고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이면 그대로 한마음이죠. 그러니 여러분이 일을 할 적에나 똥을 눌 때나 잠을 잘 때나 일어설 때나 앉을 때나, 바로 내 부처가 내 마음속에 있는 한마음의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때, 뭐든지 거기다 놓고 갈 때, 모든 걸 놓고 아주 잔잔하게 한데 한생각을 일으키면 그게 법이 된다 이 소립니다. 그렇게 하면은 일체제불이 일체 보살이, 일체 조사가 다 그냥 한마음으로 들어서, 한 찰나에 드셔서 그 묘법을 가르쳐 주시고 한 찰나에 나신다 이거예요.

이 묘한 도리를, 이 무심도법(無心道法)을 여러분이 그렇게 갑자기, 도심으로써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터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는 것은 아마 나보다도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알기만 하면 뭘 합니까? 행하는 게 문제죠. 백 가지 천 가지를 안다 하더라도 한 가지 행을 못한다면, 그건 한 가지 행하는 것만도 못합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을 해 드렸죠.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해서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있어서 오신통이라는 것도 거기에 귀결돼 있다고요. 우리가 과거에 살던 그 모두를 숙명통이라고 한다면 오신통은 자동 컴퓨터입니다. 자동 컴퓨터! 거기에서 또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 것이 바로 심안의 눈입니다. 그래서 그 도리를 잘 알아야 천안통이 생기는데 바로 천체망원경이 거기에 해당됩니다만 물질로 된 거는 심안의 눈으로 보는 걸 따라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천이통이라는 것은 지금 말로 무전통신력인데, 한생각에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를 두루 통신을 하고 가는데 어떻게 감히 물질의 무전통신기가 거길 따라가겠습니까? 인공위성을 띄우고 전파를 통해서 세계를 두루 한다 하더라도 그건 따라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타심통이라 하면은 남의 속을 다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남의 마음만 알면 ‘도’냐. 아니죠. 우리가 풀 한 포기, 진드기 하나의 마음도 알아야만 되겠죠. 그래서 서로 한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고 서로 면담을 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된다면 그 얼마나 즐겁고 이 세상이 낙원이겠습니까? 그런데 그거를 비유해서 탐지기라 할 수도 있죠. 인간의 마음이 들어가서 물질로 나오긴 했지만 아니, 내 타심통을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그리고 신족통 하면 지금의 팩시밀리로 비유해도 되죠. 내 마음이 화(化)해서 원자에서 입자로 화하고 입자에서 분자로 화해서, 안팎을 제도하고 지키고 보호하면서 보신, 법신, 화신이 전부 보호하면서, 불성 자체가 전부 모여서 불바퀴로 돌아가는 거기에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 데 물질인 팩시밀리가 아무리 좋다 한들 그러한 역할을 어찌 따라가겠습니까?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바로 팔만대장경의 증거입니다. 그때 시절에는 그때 시절대로 용어가 달랐고, 지금 시절에는 지금 시절대로 용어가 다릅니다, 뜻은 다 같지마는. 사는 도리도 같습니다마는 그 이름, 용어가 자꾸자꾸 다르게 변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역시 그 용어를 모르는데, 자꾸 옛날에 부처님이 하신 용어를 가지고 가르친다면 그걸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게 금덩어리 보석이라 할지언정 그거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니 이 마음 자체가 부처님의 뜻을 저버려서가 아니라 진짜로 부처님의 뜻을, 골수를 알아서 한마음으로 내 마음속에 지닌다면 구태여….

또 한 가지,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다닌다 이럴 때 백팔염주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백팔 번뇌 망상이라고 했습니다마는 우리가 그 번뇌 망상이 아니라면 무얼 가지고 공부하겠습니까. 백팔(百八)이라는 건 뭐냐? 백(百)은 무(無)입니다, 무! 팔(八)은 사무(四無) 사유(四有) 한데 합쳐서 무의 세계 유의 세계가 같이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같이 돌아가면서 그 생각 생각에 꼬리가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그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번뇌 망상이라고 하죠.

일어나는 그 마음이 우리를 부처로 만들 수 있고 법신으로 만들 수 있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거는 망상이 아니라 나를 수련시키는 채찍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것이 나오면 허허 웃고 ‘하! 거기서 나온 거니까, 그놈이 그놈이로구나.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서 너희들 해결해라.’ 하고 거기다 놓으면 되지, 거기에 끄달릴 필요가 없어. 여러분은 사람 된 그 마음, 좋고 나쁘고, 나쁘고 좋고 이런 거를 아는, 다스리는 마음이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둘이 아닌 도리만 알면, 모두가 어떤 것이 속에서 나오더라도 ‘아하! 이것은 나를 둥글게 다스리기 위해서 정으로 치는구나. 이건 또 나를 다스리기 위해서 내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돌아가서 저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 나를 치는구나. 참 감사하구나.’ 하고 감사하게 거기 맡길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의 탓도 안 되고, 증오도 없고, 배신도 없고, 미움도 없고, 얼굴에 웃음이 띄면서 감사함을 느끼고 얼마나 좋습니까? 자기의 주인공은 ‘착하고 착하구나. 너는 네가 나온 도를 알고, 네가 행하는 도를 알고, 네가 말하는 그 법을 아는구나.’ 하고 이 우주 삼라대천세계의 그 마음들이 한마음으로 구성돼서 여러분 마음속에 들고 나면서 여러분을 키울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되죠. 요것 버리고 조것 버리고 다 버린다면 뭐 남는 게 있어서 하나도 빠짐없이 그거를 정복하겠습니까? 더럽다고 버리고, 밉다고 버리고, 또 즐겁다고 들이고 이런다면 하나도 없이 가질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귀결돼서 넣고 보니까 나중에 그것을 하나도 버릴 게 없어서 다 나 아님이 없더라.’ 할 때까지 우리가 공부해야 합니다.

요새 대구나 저 마산, 울산, 부산 할 것 없이 전부, 그래도 각 지원마다 신도님들이 몇십 명씩은 다 맛을 보고 가는데, 어느 때는 가서 그 맛본 것을 내가 점검을 한번 하겠습니다마는, 닥쳐오는 모든 괴로움, 병고 또는 가난, 영계성, 유전성, 세균성 등 모든 것을 병으로 알지 말고 재료로 삼아서 거기 놓고 실험을 하면은 그게 체험이 돼요. 하나하나 체험이 되고 그때에 그 맛을 알고 들어간다면 홀연히 내가 밝아지고, 홀연히 밝아지면 ‘아하! 이게 모두가 독불장군이 없구나. 회사에도 직원이 있으니 사장이 있고, 사장이 있으니 직원이 있구나!’ 하고 웃어지죠. 허허허.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는 대로 느껴지고, 보는 대로 알아지고, 보는 대로 생각이 나면 그냥 제도가 되는 것이고, 부모의 조상이 따로 있고 또는 부처님의 조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성도 한 성이요, 바로 본도 하나라는 것이죠. 알고 보면 부처님이 해골바가지에 큰절을 하신 원인도 자기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죠. 하나로 돌아가는 이치, 즉 윤회가 돼서 돌아가기 때문에, 모두가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는 도리를 가르치셨죠. 수억겁부터 이렇게 걸어오면서 돌아가면서,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 모이고 흩어지고 이렇게 반복되는 세월을 걸어왔다는 거를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 손수!

그렇건만도 부처님께서는 한 번도 행해 본 예도 없고 한 번도 말해 본 예도 없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말없이 그렇게 수없는 나날을 가르치셨습니다. 꽃을 한 송이 들어서 가르치셨고, 꽃을 들고 대중으로 들어가셔서 가르치셨고, 또는 다자탑(多子塔)의 한자리에서 반 자리를 내놔 줘서 가르치셨고, 관(棺)에서 두 발을 내놓으셔서 또 평발을 가르치셨다 이겁니다. 그 평발의 도리는 어떠한 것입니까? 발이 납작해서요? 발이 이렇게 뭉툭하게 평지가 돼서 평발이라고 한 건 아닐 테죠? 지구는 물론이고 우주 삼천대천세계도 별성도 모두 다 딛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진드기 발 하나 이 땅에 딛지 않은 게 없어. 풀포기 하나도 지렁이 하나도 이 땅을 딛지 않은 게 없으니 그 발을 하나도 빼놓지 않은 게 평발이다 이 소립니다.

뜻으로 알아야지 말귀만 듣고서 그걸 반복해서 달달 외운다면, 그것은 허탕 가는 길이죠. 나는 경전도 배우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습니다마는, 나는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큰스님한테 점검을 하러 수없이 다녔습니다. 지식이 많고 학식이 높고 위대하고 부자고 이래야만이 이 공부 하는 거는 아닙니다.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는 높고 낮고, 가난하고 부자고 이런 것도 바로 평등한 것입니다. 늙고 젊고도 없고 여자 남자도 없는데 여자 빼놓고 남자만 제일이라고, 비구만 제일이라고 해서 비구니를 우습게 안다면 자기 나온 곳을 모를 거고 그러면 한 번 더 자궁 속을 들어갔다 나와야 알겠지요. 산하대지는 어머니의 젖줄과 같고 저 태양계는 아버지와 같아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원기를 주고, 기를 넣어 주고, 공기를 주어서 생명을 살리고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네 가지에 다 우리는 감사함을 느낄 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만 빠져도 이렇게 이거 (컵을 왼손으로 옮겨 드시며) 하나를 못 합니다. 사람이 없어도 안 되고, 불이 없어도 안 되고, 물이 없어도 안 되고, 흙이 없어도 안 되고, 바람이 없어도 안 되죠. 불, 물, 바람, 흙, 사람 이것도 우주 개공을 바로 이 한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 할 겁니다.

어느 벌레 하나라도 나올 자격이 있으니까 나온 거지 자격 없이 나온 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생각엔 그 조끄마한 것이 딱정벌레니 뭐니 그런 벌레들을 보면 ‘저런 거 없어도 될 텐데….’하겠지만, 그런 걸 여러분 몸속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진리가 끝 간 데 없이 지탱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진화되면서 자꾸자꾸, 별성도 자꾸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상대성 원리가 아닌 것이 없는 거를 배웁니다. 부처님께서는 상대성 원리를 하나로 해서 그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야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고 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누구라도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셨습니다.

내가 재차 말하지만 여러분 속에 있는 의식은 나쁘고 좋고 그런 거를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서없이 나옵니다. 그 의식에서는 망하든지 흥하든지, 좋게 보이든지 나쁘게 보이든지, 밉게 보이든지 뭐, 이런 걸 모르고 두서없이 나오게 하는데, 다스리는 것은 나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는 거를 알고 있는 인간의 마음이 다스려야 한다 이겁니다. 다스려서 그 중생들을 제도해야 한다. 그래서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니라. 위로는 한마음을 갖고 아래로는 내 이 중생들을 제도하라. 내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천백억화신이 화(化)하지 못해서, 털구멍을 통해서 나고 들면서 중생을 제도 못하니까 그건 보살이 아니다 이거야. 아무리 보살이다, 이름을 크게 가지고 있다, 부처의 이름을 크게 가지고 있다, 내가 공부를 이렇게 했으니깐 큰 도사다, 내가 이렇게 가지고 있으니까 큰스님이다 해도 이건 전부 다 오산입니다. 그건 이름일 뿐입니다.

예전에 저 원주에 있었을 때, 어느 동네에서 개가 아프고 소가 아프고 젖소가 아프고 뭐, 별소리가 다 옵니다. “돼지를 기르는데 그 돼지가 아파서 죽는다면, 우리는 살림을 다 망쳐 버리고 애들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만약에 내가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부처님이 그때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보살로 화해서 돼지 속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전부 돼지 속으로 들어가서 돼지가 되었을 때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사람 속에 들어갔을 때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허허허. 독사를 건지기 위해서 독사 속에 들어갔을 때 독사를 보고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개구리 하나, 진드기 하나 안 돼 보시는 게 없는 그 마음 자체의 그 무한량, 광대무변한 이 법을 어찌 말로 다 하리까?

그러니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 이걸 떠나서, 모두 여러분은 기복으로 가지 마세요. 바깥으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바깥으로 찾는다면 부처님께서 “너는 내 고깃덩어리만 아는구나. 내 가죽만 아는구나. 내 뼈다귀만 아는구나. 내 골수를 모르는구나.” 하고선 눈을 감으실 겁니다, 아마. 모두 알아야 ‘저 형상은 내 형상이요, 저 몸은 내 몸이요’, 이렇게 되는 거고 내 마음 내 생명과 둘이 아닌 게 되죠. 우리 법당에도 부처님을 모셨지만 다 알고 난 뒤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으로 보일 수 있는 그때까지, 부처님으로 보이는 그 부처가 나하고 둘이 아니라는 그것까지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남의 탓을 하지 마시고, 또 여기가 강당이 좁아서 비를 맞고 눈을 맞고 만약에 저 바깥에 한 시간, 두 시간을 섰다 할지라도 구도하는 자세로써 임한다면 아마 그렇게 원망은 안 할 겁니다. 남이 다 해 놓은 거 자기가 먹기도 하지만 반면에 자기가 해서 또 남을 대접도 할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가져야만 되겠으니까요.

여러분한테 내가 돈을 받고 내가 잘살기 위해서, 잘 입기 위해서 이럭하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해다 주는 옷을 이렇게 입어서 이 대가를 반드시…. 여러분이 내 스승이자 바로 여러분이 부처며 법신이며 화신입니다.

저 산중에, 껌껌할 때나 또는 밝았을 때나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그 끝없는 길을 한번 걸어 보자고 했을 때, 바로 돌부리를 차서 이 발톱이 빠졌을 때, 그때도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 것이 그 돌도, 바로 돌부리를 차게 한 것도 바로 내 스승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자리인 것을 모르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는 거죠. 돌이 그러고 말을 하더군요. 허허허. 돌이 발톱을 빼놓고 하는 소리가요, “네 발이 그렇게 좋은 자리를 찾아다니는 그 발이라면 한발은 못 돼. 그러니 발톱이 빠져도 싸지. 아니, 이 도량 전체가 한도량이건만 도량을 어디 가서 또 찾아?” 아, 그 돌이 나한테 그러고 반박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허허, 이 돌이 바로 돌부처구나! 요만한 거 하나, 돌부처 아닌 게 없으니 그 돌부처 속에서 희한한 밝음이 나오고 돌부처 속에서 그 생수가 수없이 나오니 말이야. 끊어지지 않고 나오니 그것들을 먹고 악하면 악한 대로 독이 되고, 선하면 선한 대로 사람을 살리는 약물이 되니 그것 참 희한하구나!’ 아, 그랬다고요. 그러니 어디 부처가 따로 있으며 어디라고 정해 놓은 데에만 부처가 있습니까? 저 나무 한 그루 선 것도 부처입니다. 이제 그만 말할까요? 그만 말하고 여러분의 질문 한마디 들을까요? 내가 질문을 할까요?

질문자1(여) 좀 깨닫게 해 주십시오.

큰스님 예?

질문자1(여) 좀 깨닫게 해 주십시오. (대중 웃음)

큰스님 허허. 깨닫게 해 달라고요? 좋지요. 깨닫게 해 주는 건 좋은데, 모두가 스승 아닌 게 없으니 스승 찾아서 돌아다닐 생각 하지 마세요. 내가 만약에 여러분 대신 밥을 먹어 준다면 여러분 배도 불렀으면 좋겠는데 아, 여러분은 굶어 죽게 생겼어, 내가 다 먹으면. 그러니 밥을 해다가 여러분한테 상을 차려서 드리긴 하나, 먹는 건 여러분이 먹어야 배가 부를 것 아닙니까? 내가 어떻게 여러분의 도를 깨우쳐 줍니까? 허허허.

그래, 질문 한마디 했죠? 여러분에게 내 이 말 한마디 할까요? ‘쥐가 고양이를 쫓습니까, 고양이가 쥐를 쫓는 겁니까?’ 한마디 대답해 보시렵니까? (잠시 기다리시다) 뭐라고 혼자만 중얼중얼하십니까? (대중 웃음) 아, 되나 못 되나 대답들 좀 해 보세요! 모두 도인들이 되어서 그냥 전부 그냥 부처들이 다 되었군요. 사실은 알고 보면 한마디도 할 게 없거든요.

질문자2(여) 스님 말씀 듣고 세 번 왔으나 못 만나 뵈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큰스님 실컷 보세요. (대중 웃음) 실컷 봐도요, 거죽만 보시지 마시고요. 이 고깃덩어린 아무리 봐도 흩어지면 송장이야. 그러니깐 보시려면 아주 진짜로 잘 보세요. 그래, 기껏 그 대답이에요? (대중 웃음) 그러니 쥐가 고양이를 쫓고 고양이가 쥐를 쫓느냐?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이 세상에는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도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자식을 기르고 부모를 모시고 살아나가는데, 부모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몸만 흩어졌다 뿐이지 다시 태어나는데, 잘못해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끔 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저 한생각을 잘하면 위로는 부모의 묵은 빚도 갚을 수 있습니다. 아래로는 햇빛을 줄 수도 있고요. 그러니 뿌리를 찾아서 내 뿌리도 없다는 그 도리를 여러분은 꼭 증득해야 됩니다.

여러분한테 내가 한마디 물어봤을 때 여러분이 만약에 요런 종지라면 나도 종지지 어떡합니까? 사람이 손을 폈다가 오그릴 줄 알고 오그렸다가 펼 줄을 알아야 이것이 불제자요, 바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이러는 것도, 어느 한쪽만 끊어져도 우리는 송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콧구멍은 내리 뚫리고, 소 콧구멍은 치켜 뚫려 가지고선 바람, 비, 흙먼지가 전부 날려서 꽉 막혀 버렸대요. 사람은 비나 바람으로 인해서 먼지가 끼면 그냥 탁 막힐 테니까 이걸 아래로 뚫어 놨거든요. 그런데 소 콧구멍은 치켜 뚫려 가지곤 바람, 먼지, 비 그런 게 들어가서 콱 막혀 버렸다거든요. 그러니 왜 그렇게 소 콧구멍은 치켜 뚫렸는지, 왜 사람의 콧구멍은 내리 뚫렸는지, 그 이치를 여러분은 잘…, 또 거기에 매달려서 온통 그것만 붙잡고 걸리지 마시고요. 내 마음은 체가 없어서 걸릴 것도 없고 걸리지 않을 것도 없어요. 앞뒤 없는 그 피리 소리, 이 온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하면서 요리를 한답니다. 그럼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내가 못나서 남들처럼 뭐, 주먹을 불끈 내밀고 뭐, 주장자를 들고 이러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에 주장자를 들고서 그렇게 때려 봐요. 들어오면 때리고 나가면 때려 봐요. 허허허. 지금은 정신으로 들어와도 때리고 나가도 때리고, 정신력으로 주장자를 쥐어야지, 만약에 보이는 데서 그럭한다면 “왜 때리기만 해? 왜 들어오면 때리고 나가면 때려?” 이러고 그냥 죄 가 버리니까, 불씨를 심을 수가 있어야죠.

질문자3(여) 포항에서 여기까지 스님 뵈려고….

큰스님 포항하고 여기하고 뭐가 다른 게 있습니까? 포항이나 부산이나 마산이나, 미국이나 서울이나 또 안양 바닥이나 멀고 가까운 게 없어요. 그거는 여러분 마음에 달려 있고 여러분이 이 공부를 하려면 거리가 뭐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게? 감사합니다, 하여튼. 이렇게 같이 도반으로서 한자리를 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1년 7월 21일 정기법회 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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