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해의 길 1

일반대학에서 불교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있다. 철학계에서는 종교인으로, 불교계에서는 철학자로 보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행위를 하고 있는데,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종교인이 되기도 하고 철학자가 되기도 한다.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있지만, 반대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일종의 경계인(marginal man)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이면서 철학적인 불교의 성격에서 기인한 측면도 있지만, 철학과 종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서구적 사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동양의 전통에서는 본래 철학이니, 종교니 하는 구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구의 학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학자들은 서양의 체계에 따라 철학과 종교를 엄격히 구분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엄밀성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가설을 세우거나 주장을 하게 되면, 가설이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학창시절 많이 배웠던 삼단논법과 같은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명제가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사람은 죽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세우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종교는 학문적 체계에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한다거나 내세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적 표현들은 명제(命題)라고 부르지 않는다. 명제란 옳거나 그른 것이어야 하는데, 신이나 내세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종교는 검증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물론 신을 경험했다거나 전생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한 그것을 명제라고 할 수 없다. 종교를 검증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교 역시 이러한 체계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철학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학문의 대상이 꼭 검증 가능한 것일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문학과 예술, 문화 등 검증을 벗어난 삶의 모든 양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나 미술 등이 학문의 대상으로서 대학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검증과는 무관한 수많은 의미들로 이루어진 총체다. 학문은 이러한 의미의 세계를 논외로 하지 않는다.

예술이나 종교와 철학은 이렇게 구분된다. 예컨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분명 예술행위에 속하지만, 그림 속에 나타난 세계관이나 의미를 해석하는 일은 예술철학, 즉 미학의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은 종교의 영역이지만, 그 신앙이 우리 삶속에서 사회, 문화,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해석하는 일은 학문에 속한다. 대학에서 종교철학이나 불교철학 등의 과목이 설강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본래 동양의 전통에서는 철학과 종교의 구분이 없었다. 철학은 한 민족이나 국가의 총체적인 삶의 표현이다. 모든 국가나 민족은 그들만의 삶의 양식이 있고, 이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불교가 탄생한 인도의 전통에서 철학은 곧 ‘앎’이었고 종교는 ‘삶’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지적으로 성찰하면 철학이 되고, 이를 삶에서 실천하면 종교가 되었다. 그들은 지식이 실제 삶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이 둘을 구분하려고 하지 않았다. 동양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전통이 중시됐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서양의 철학적 시선에서 보면 불교는 철학이 아니며,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서구의 낡은 종교적 시선에서 보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가만히 있는데 자신의 입맛에 따라 이리 저리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앎의 철학이며 삶의 종교다. 오늘도 나는 불자로서 붓다께 삼배를 올리고, 철학자로서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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