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허회태(63·연변대학교 미술대 회화과 교수)

허회태 작가는…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화 전공 석사 졸업했다. 서예ㆍ전각ㆍ한국화를 섭렵해 현대미술과 융합ㆍ접목한 새 장르 이모그래피(Emography)를 창시, ABC 및 FOX 등 해외 언론에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카이로스 허회태미술관장, 연변대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미술세계아카데미 이모그래피 지도교수, 예술의전당 서예아카데미 지도교수, 무산서예이모그래피 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이모그래피-허회태 書·畵·刻 예술 47년, 주독일한국문화원 초대개인전(이모그래피), 서화 아트페어 초대 개인전 등 다수의 개인전과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 개관기념전 꼴라쥬, 여수 국제 아트페스티벌 한국현대미술의 동향전(갤러리연) 등 많은 단체전에도 참여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원곡서예상 등 다수 수상했다.

 

불가적 서예가의 길
5세 때 서예 입문
백부로부터 안진경체 사사
중교부터 큰 상 다수 수상
중3 때 캐나다 개인전 열어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 대상
‘반야심경’ 2천 번 써

“내가 문득 축시에 일어나 뜻하지 않게 글을 쓰고 싶어서, 잘 쓰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썼다. 날이 밝은 뒤에 살펴보니 마음에는 흡족하지 않았으나 속기(俗氣)가 없어서 제액(題額)을 달아 완성했다.” 뜻하지 않게 쓰고, 잘 쓰려는 마음 없이 쓰고, 속기 없이 쓴다. 다시 정리하면 무의, 무욕, 탈속이다. 서예가 허회태의 서법이다. 그렇게 허회태의 ‘쓴다’는 붓의 흔적이 아니라 마음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철저하게 불가적(佛家的)이다. 그는 그 불가적 서예를 ‘이모그래피(Emography)’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불가적 시선과 마음으로 서예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그 확장으로 인해 다시 불법(佛法)에 깊어가는 서예가 허회태다.

운명이 된 붓
다섯 살이었다. 운명이었다. 어린 허회태는 붓 옆에 있었다. 아니 어느 날, 허회태 곁에 붓이 있었다. 다섯 살이 무엇을 알아서 붓을 잡았을까. 그리고 다섯 살이 잡은 붓을 ‘붓’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다섯 살이 붓을 쥔 것이 ‘운명’이라는 수사로 유난을 떨만한 일일까. 허회태가 서예가가 되지 않았다면 그 날의 붓을 ‘붓’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운명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섯 살 허회태가 쥔 붓은 ‘붓’이 되었으며, 다섯 살이 붓을 쥐게 된 일은 운명이라는 말이 유난스럽지 않게 되었다.
붓은 허 작가의 백부 허영재의 것이었다. 1957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허 작가는 집성촌에서 백부와 가깝게 살았다. 허 작가의 백부는 한학자였으며, 훈장이었다. 서당이 있는 백부의 집에는 다른 것은 몰라도 책과 붓은 넉넉했다. ‘붓글씨’는 당연한 것이었다. 어린 허회태는 백부의 집을 드나들며 하늘 천, 땅 지를 읽기 시작했다. 하늘 天, 땅 地는 붓으로 써야했다. 다섯 살의 허회태는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하늘 천’ ‘땅 지’를 붓으로 익혔다.
어느 날부턴가 허회태의 붓은 단순히 글자를 옮겨 적는 붓이 아니었다. ‘연필’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허회태의 붓은 점점 서체를 찾기 시작했다. 서체를 가지고 싶어 했고 서체를 지니기 시작했다. 백부는 알아봤다. 어린 조카에게 붓이 어울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붓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린 조카는 백부의 글씨를 넘겨다보기 시작했고, 백부는 깊어가는 조카의 붓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백부도 다시 붓을 잡았다. 조카의 붓이 붓을 잡게 했다. 조카는 백부가 즐겨 쓰는 글씨를 따라 쓰기 시작했다. 백부의 글씨는 그 유명한 안진경체였다. 안진경체는 당나라 때의 서예가 안진경(709~785)의 서체로, 당대 이후의 서도(書道)를 지배했던 서체다. 안진경의 가문에서 만든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과거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으며, 명나라의 만력연간(萬曆年間ㆍ1573∼1620)에는 간행된 서책의 대부분이 안진경체였다. 어느 날부턴가 다섯 살의 허회태는 안진경체를 쓰고 있었다.

빛나기 시작한 붓
“10년 공부…서예 최고상-허회태 군, 韓ㆍ加재단 주최 美展서”
열다섯 살이었다. 허회태는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이 신문에 오르기 시작했다. 순천 삼산중학교 3학년 허회태는 붓을 잡은 지 10년 만에 한ㆍ가(한국ㆍ캐나다) 문화재단 주최 제1회 전국학생미술작품전에서 18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고상(서예부문)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의 글씨는 캐나다에서 전시된다.
중학교에 진학한 허회태는 또 한 사람의 스승을 만난다. 이상호 선생님이다.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미술 선생님이다. 선생님의 특별 지도를 받기 시작한 허회태는 3학년 때 제8회 전국서예대회(한국서예교육연합회 주최)서 첫 입상하고 연이어 최고상을 수상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크고 작은 대회에서 입선을 하기 시작했던 허회태였다.
수상은 값진 것이었다. 의미가 많았다. 허회태는 매달 서울에서 누나가 보내주는 4~5천원의 학비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허 작가는 매일 3~4시간씩 붓을 잡았다. 붓은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종이였다. 화선지 한 장이 25원이었던 시절이었다. 허회태에게 화선지는 ‘금’이었다. 허회태는 지역의 국전입선작가들이 쓰고 남은 화선지를 얻어와 글씨를 썼다. 힘겨운 시간 끝에서 받은 상이었기에 기쁨과 의미는 남달랐다. 그리고 수상은 여러 가지로 스스로를 도왔다. 학비를 면제받았고, 고등학교 진학에도 큰 도움이 됐다. 허 작가는 서예특기장학생으로 진학했다. 그리고 수상은 이어졌다. 허 작가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그의 이름은 신문에 자주 올랐다.|
1995년, 허 작가는 또 한 번 큰 상을 받는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서예부문 대상을 수상한다. 이옥봉의 시를 목간체로 썼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수상은 서예인에게 큰 상이다. 목간체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 서한시대에 나무 조각에 먹을 사용해 쓴 서체다. 허 작가의 대상 수상 이후 서예인들 사이에서 목간체가 유행하기도 했다.

새로운 서예, 이모그래피(Emography)
각기 다른 서체로 쓴 ‘佛’자를 판넬로 이어붙인 8m 길이 대작의 제목은 ‘108 번뇌불’, 역시 8m에 이르는 커다란 ‘佛’자 형상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억만겁) 작은 ‘佛’자가 겹쳐져있다. 작은 ‘佛’자가 모여 커다란 ‘佛’자를 완성한다. 아크릴과 모래 등을 이용해 경주 남산의 불상을 형상화한 작품을 비롯해서 나옹선사, 서산대사의 시 서예작품과 반야심경을 새긴 전각, 도자기 등도 보인다.
2008년 10월 허 작가는 서예 인생 47년을 결산하는 전시를 열었다. 전시의 제목은 ‘이모그래피(Emography)’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전시는 서예와 회화의 경계를 허무는, 서예사에서 큰 사건이었다. 이모그래피란 감성을 뜻하는 이모션(Emotion)과 글씨나 화풍을 말하는 그래피(Graphy)를 합친 합성어다. 허 작가는 2005년부터 이모그래피를 시작했다.
허 작가의 이모그래피는 기존의 서예 개념을 통째로 뒤집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아니 단순한 시도에서 끝나는 일회성 퍼포먼스가 아니라 새로운 ‘길’이었다. 3천년 서예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일이었다. 기존의 서예는 ‘쓴다’였다. 글씨를 쓰는 것이었다. 조형성에 중심을 두고 문자가 가진 뜻을 전하는 예술이었다. 이어져 내려오는 서체의 또 다른 재연과 재현이었다. 하지만 허 작가의 이모그래피는 개념 자체를 달리한 것이다.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는 것도 아니다. 쓰는 것이면서 그리는 것이다. ‘그린 글씨’라고 할 수 있다. 글자 하나하나의 본질을 파헤쳐서 새로운 형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서예와 그림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의 붓질로 찰나의 세계를 가장 단순하게 축약하여 표현한다. 사물을 본떠 관념을 나타낸 문자가 아니라 감성을 나타낸 흔적이다.
“사물의 본질을 기운이 생동하도록 단순화된 형상으로 표현하는 이모그래피는 서예나 회화에서 보이는 문자나 형태가 아니라 감성을 나타낸 흔적입니다. 때론 허공을 가르며 비상하는 듯 불교사상을 가장 극대화한 표현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 작가는 언제부턴가 ‘서예란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동양권에 한정된 한계성에도 회의를 품게 되었다. 시대와 세대, 지역을 가리지 않아야 진정한 예술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리고 허 작가는 그 이유로 글씨가 글씨로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닿았다. 글씨가 글씨를 넘어설 때 진정한 서예,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 작가는 글자 한 자 한 자의 근원에 다가가는 시도를 모색했다. 그리고 허 작가는 그것이 부처님이 걸어간 길과 같은 길이라는 생각과 만난다. 허 작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부처님을 알고 있었다.

 

3천년 서예사를 다시 쓰다
2005년 ‘이모그래피’ 창시
“불교사상 극대화한 표현기법,
문자·형태 아닌 감성의 흔적”
서예, 회화·조각으로 확장
서예의 예술적 한계성 극복
글자의 근원 찾는 서예 추구

 

또 하나의 운명, 불교
“제가 서예에서 고민하던 것이 불교에 있었어요.”
허회태의 이모그래피는 부처님의 생각에서 왔다. 이모그래피를 모색하기 전, 허 작가는 작품의 소재로 ‘반야심경’을 가장 많이 썼다.
“20대 초반부터 썼죠. 다른 경전들도 썼지만 ‘반야심경’을 가장 많이 썼어요. 지금까지 2천 번 쯤 쓴 것 같아요. 다른 글과는 달라요. ‘반야심경’을 쓸 때는 마음가짐이 달라져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나를 샅샅이 뒤지는 것 같아요. 글자 한 자 한 자가 마음 구석구석을 들춰내는 느낌이에요. 나도 모르게 엄숙해지고 진지해져요. 그렇게 부처님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숨을 곳이 없어요. 순간순간 만나는 마음들이 한 자 한 자 글씨가 되고 나면 서예에 대한 생각이 새로워지고, 나에 대한 생각 또한 새로워집니다. 하지만 매번 여법하게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도 있죠. 글자와 나 외에 다른 것들이 끼어들 때가 있죠. 그 땐 붓을 놓아야 합니다. 다른 글도 그렇지만 경전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손으로 쓰는 글은 서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쓰고 또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서예가 허회태를 관통하는 가장 큰 글자는 ‘佛’자였다. 어린 허회태에게 붓이 어울렸듯이 서예가 허회태에게 가장 어울리는 글자는 부처님의 글자였다. 그 불교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왔다. 허 작가는 어려부터 어머니를 통해 불교를 만나왔다. 허 작가의 어머니는 늘 아들을 염려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 늘 미안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늘 부처님 전에 기도를 올렸다. 아들의 안녕, 아들의 영화가 어머니 기도의 전부였다. 어머니의 기도가 깊어갈수록 아들의 불심도 자라났다. 늘 아들의 이름뿐인 어머니의 기도, 그 기도를 지켜보는 아들의 마음속에 불심이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서예가 허회태가 ‘반야심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특별한 계기나 동기가 없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시작됐다. 또 하나의 운명, 불연인 것이다. 그렇게 허 작가는 불법(佛法)을 만났고 그 불법으로 서예를 하고 있다.

또 한 번의 확장, 이모스컬퓨쳐
올해 2월, 허 작가는 또 한 번의 확장을 시도했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전시의 제목은 ‘심장의 울림’이다. 이미 ‘이모그래피’로 서예사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던 허 작가는 또 다른 시도를 선보인다. ‘이모스컬퓨쳐(Emosculpture)’다. 이모스컬퓨쳐란 ‘이모션(Emotion)’과 조각품을 의미하는 ‘스컬퓨쳐(Sculpture)’를 합성한 단어로, 서예와 조각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서예를 회화로 확장했던 허 작가는 서예를 다시 조각으로 확장했다.
작은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형상을 만들고 있는 조각 작품은 한 편의 만다라를 보는 듯하다. 작은 조각들을 들여다보면 작은 글씨들이 보인다. 한자, 한글 그리고 영문도 있다. 또 한 번 서예를 확장시킨 전시에서 허 작가는 ‘반야심경’ 등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작은 글씨로 쓰고, 그 글씨들을 모아 한 편의 조각을 완성했다. 우주와 생명의 원초적 현상에서 비롯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 만다라다.
“현대 조형회화와 조각설치작품은 2차원의 평면을 벗어나 3D 작품으로서 관객의 곁으로 다가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우리 삶의 이야기가 소재가 되는 이번 작품들은 그 변화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관람객에게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는 작품들은 심오한 매력으로 대중의 호평을 기대하고 있으며, 생명의 근원에 접근하는 철학적 경지를 보여주는 소통의 확장을 이루고자한 것입니다.”
허 작가가 전시에서 보여준 작품들에는 ‘위대한 생명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생명의 꽃’, ‘심장의 울림’, ‘헤아림의 잔치’로 확장해가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 형식은 정비된 콘셉트와 양식으로 진화하여 유기적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심장의 울림’은 본래 실체가 없어서 형상이나 색깔이 없지만 끝없이 오묘한 작용을 하고 있는, 그래서 우리의 몸을 조정하고 움직이는 ‘마음’을 표현했다.
“마음이 세상의 모든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만듭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며, 유심소현(唯心所現)이죠. 그러나 한자를 처음 만든 사람들은 마음의 작용이 심장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심장의 모양을 따서 ‘心’자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작용은 심장의 울림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작용하며, 마음 안에서 밖으로 확산되어갑니다. 심장은 정밀함을 싫어하지 않으면서 심장의 언어로 말하는 그것이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 ‘심장의 울림’으로 작품에 투영되고 이입되는 것입니다.”
허 작가의 이모스컬퓨쳐는 ‘心’에서 출발하여 확산된다. 균제와 균형을 잃지 않는다. 동서남북 4방위로써 인류의 질서를 구현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생명의 탄생에서 존재의 근원으로 파고든 세상의 소용돌이를 표현하고 있다. 한 가지 구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조합으로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 끊임없는 창조의 과정을 보여준다. 심일경성(心一境性)의 경지에서 시각적으로 마음과 우주가 하나가 되어 끝없이 팽창ㆍ확산되어 소우주의 무궁함으로 표현된다. 선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부처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만다라의 세계와 우주의 삼라만상과 인간의 세계가 서로 끝없이 이어지는 인드라망의 그물코처럼 무한하게 펼쳐진다.허회태의 글씨는 이제 보이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보고 있어도 볼 수 없는 것이 허회태의 글씨고,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이 허회태의 글씨다. 허회태의 서예다.

108번뇌불 800×200cm 2008.
억만부처불 800×200cm 2008.
생명의꽃 65x60cm 한지 및 혼합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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