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랑쿠시와 미라레빠

오귀스트 로댕, 〈입맞춤〉, 1880-1898년, 대리석, 117 x 112.3 x 181.5 cm, 프랑스 로댕 미술관 소장.
콘스탄틴 브랑쿠시, 〈입맞춤〉, 1916년, 석회암, 58.4 x 33.7 x 25.4cm,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직육면체의 크지 않은 돌조각. 전체 덩어리를 수직으로 반분하는 단면은 이 남녀가 각자 분리된 존재임을 말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수평의 완만한 선으로 묘사된 두 팔은 서로를 감싸 안고 있으며, 분리된 좌우의 매스는 딱 한 부분 입맞춤하는 남녀의 입술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두 눈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으나 마치 하나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전체의 형상은 두 인물의 인체의 사실적인 윤곽을 따르기보다는 두 대상이 마치 하나로 합쳐진 듯한 직육면체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브랑쿠시의 〈입맞춤(The Kiss)〉이다.

조각가 브랑쿠시 ‘입맞춤’
거장 로댕 작품과 비견
‘직관 강조’ 미라레빠 영향
영성 함축한 선시와 같아

루마니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자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는 어릴 적부터 나무 따위를 깎아 물건을 만드는 일에 놀라운 재주를 보였다고 한다. 18세 때 그는 우연히 자신의 일터 근처에서 구한 재료로 수제 바이올린을 만들었는데 이에 감명을 받은 한 공장주가 그를 크라이요바 예술공예학교(Craiova School of Arts and Crafts)에 입학하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그는 부카레스트 미술 학교(Bucharest School of Fine Arts)에 진학하여 조각을 전공하였다.

루마니아를 떠난 브랑쿠시는 파리에서 새로운 예술적 사상을 지닌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국립예술학교에 소속된 앙토냉 메르시에의 워크숍에서 2년간 작업을 하게 된다. 이미 조각가로 명성이 높았던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과의 조우는 이때 이루어졌다. 브랑쿠시의 재능을 인정한 로댕은 그를 자신의 조수로 두기를 원하였으나, 브랑쿠시는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2개월 만에 로댕의 스튜디오를 떠난다. 로댕과 결별하면서부터 시작된 브랑쿠시의 〈입맞춤〉 연작은 이후 36년간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총 6점이 남아있다.

국내에서도 상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영화 ‘까미유 끌로델’은 조각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여인이 로댕을 만나게 되어 애증의 관계를 이어가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비극적인 줄거리이다. 까미유는 로댕의 조수이자 연인이었으나 독자적인 예술가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로댕 작품의 표절 내지 아류작을 만드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여, 마침내 여인으로서 로댕의 사랑조차 잃어버리고 정신병원에 갇혀 홀로 쓸쓸히 슬픈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까미유의 비극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영화나 소설이 다큐멘터리처럼 반드시 실제 현실을 정확히 기술하는 것은 아니다. 당대의 조각가로 인정받고 있던 로댕의 제안을 받은 브랑쿠시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가늠해 보며, 적지 않게 고민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로댕의 조각 ‘입맞춤’은 하나의 쇼케이스에 들어갈 대표적 작품이다. 우리가 로댕을 떠올릴 때 ‘생각하는 사람’, ‘발자크’, ‘지옥의 문’ 등을 연상하는 것처럼, ‘입맞춤’ 역시 로댕의 전형적이고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대가 로댕의 문하에서 안정적으로 수입을 얻고 약간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조수 노릇을 뿌리치고, 황량한 벌판으로 뛰어나왔던 젊은 브랑쿠시는 ‘입맞춤’이라는 같은 주제로 전혀 다른 표현방식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로댕의 ‘입맞춤’은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Paolo and Francesca)’의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이다. 대리석으로 빚어낸 두 연인의 모습은 마치 열정이 극에 달한 정점의 멈춤을 포착한 듯한데, 역설적으로 보는 이들을 영원한 시간의 끝점으로 이끄는 것 같다. 그러나 로댕의 ‘입맞춤’은 브랑쿠시의 작품과는 달리 조형적으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제 외형을 충실하게 모사하고 있다. 인물의 비례, 조화, 균형 그리고 인체 근육의 양감, 질감 및 동세, 이 모든 것들은 실재하는 사물을 재현하는 전통적인 표현 기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러시아의 문예 이론가 빅토르 시클롭스키(Viktor Borisovich Shklovski)는 “새로운 양식은 새로운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예술적 가치를 상실한 낡은 양식을 대체하기 위해서 나타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문예에서 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브랑쿠시가 재해석한 ‘입맞춤’은 동일한 주제로 앞서 제작된 로댕의 작품에 대한 헌정이나 오마쥬라기보다는, 오히려 ‘거부’인 것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브랑쿠시가 새로운 양식의 예술 정신을 추구할 무렵, 로댕의 작품세계는 이미 낡아 있었다.

“모든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처럼,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주류 문명에서의 조각 작품은 비록 정신적 특질을 중시한다 해도, 조형적으로는 실제 사물을 사실과 흡사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로댕을 굳이 사실주의 내지 리얼리즘이라는 특정한 사조로 분류하기는 어렵겠지만, 조형적 측면에서 사실주의적 전통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조각가로 이해할 수 있다.

브랑쿠시의 작품 중 하나는 이것이 과연 미술품인지 아닌지를 놓고, 실제로 재판까지 벌어진 일화가 있다. 1928년 사진작가인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이 브랑쿠시의 작품 ‘공간 속의 새(Bird in Space)’를 소지하고 뉴욕 세관을 통과하려다 관세를 물게 되면서 비롯된 사건이다.

원래 미술품은 면세 품목이었다. “이 작품은 새를 표현한 조각 작품이다”라는 스타이켄의 주장과 달리, 세관원의 눈에 ‘공간 속의 새’가 어느 모로 보나 미술품으로 보이지 않았다. 전혀 새처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예술품이라는 스타이켄의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결국 세관원은 이 작품을 ‘가정용품/수술용품’의 범주로 분류하여 240불의 관세를 매겼던 것이다.

비록 브랑쿠시 스스로는 자신의 작품이 추상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마땅찮아 했으나, 그는 뒤이은 추상주의 현대조각가들에게는 횃불을 든 선구자 같은 존재였다.

19세기 교통과 무역의 발달로 유럽인의 지평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등 이전까지 생소했던 미지의 문화권으로 확대되었으며, 이것은 다양한 문화적 요인들이 예술 양식에 혼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기 위해서 사용한 포장지에 그려진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가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줘 ‘자포니즘’이라는 경향을 낳는가 하면, 아메리카 인디언의 음악을 자신의 창작에 반영한 드보르작과 같은 음악가도 있었으며, 아프리카의 민속 공예품과 구조물은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 제작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또 기독교적 지배 질서가 해체되면서 그 이전까지 금기시되었던 러시아, 북유럽, 동유럽, 게르만 등의 민족 신화와 민속 문화 등이 예술 제작의 모티프로 편입되었다. 

작가의 예술 정신은 개인의 경험, 정신적 고뇌, 기원 그리고 해방의 영적 체험 등등, 이 모든 것이 혼합된 토양에서 꽃을 피운다. 작가의 삶은 그의 작품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브랑쿠시는 성년 이후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성장기 루마니아에서의 체험에 기인한 문화적 특성은 그의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어린 브랑쿠시는 투박한 칼로 나무를 깎았을 것이다. 그가 보고 듣고 만지고 체험하는 모든 물건에는 루마니아의 민속예술의 정취가 만져졌다. 또 19세기말 이후 진행된 범세계적인 문화 혼합 현상에 따라, 직접적이든 자료로든 작가는 어렵지 않게 고대의 조각 혹은 아프리카의 토속적 문화유산에 접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브랑쿠시의 손에서 선구적인 모더니즘 조각 작품으로 빚어졌다.

예를 들어, 브랑쿠시의 작품 〈왕들 중의 왕(King of kings)〉의 원래 제목은 ‘부처의 정신(L’ esprit du Bouddha)’이었다. 애초에 이 작품은 1933년 인도의 한 지방 통치자가 브랑쿠시의 명성을 듣고 자신의 명상 사원 건립에 그를 커미셔너로 촉탁하여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계획안을 완성하여 건설을 시작하고자 막상 브랑쿠시가 1937년 인도를 방문했을 때, 그 통치자가 계획에 관심을 잃어 이 작품은 반환되고 말았다. 아프리카 혹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템폴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불교의 교리에서 받은 감명을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무를 소재로 한 브랑쿠시의 작품은 대개 영적 존재나 힘을 암시한다.
앞에 언급한 로댕과 브랑쿠시 작품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로댕의 작품이 마에스트로의 손길이 빚어낸 장대한 서사시라면, 브랑쿠시의 작품은 시적 서정과 영성(靈性)을 몇 개의 단어로 함축된 한 편의 선시(禪詩)처럼 다가온다. 

브랑쿠시의 ‘입맞춤’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재현하기 위한 모든 기술적 표현은 생략되었다. 그 대신 돌의 질감과 양감 그리고 순간의 진리를 완벽하게 포착하기 위한 함축적인 곡선과 직선이 전부이다. 사물을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충동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내적 진실에 더 접근하게 된다. 그저 두 조각으로 나뉜 돌의 왼쪽은 남자이고 오른쪽은 여자일 뿐이다. 또한 브랑쿠시의 ‘입맞춤’은 물질성과 시간성을 초월한다. 그것은 너와 나의 화해이고, 켜켜이 쌓인 슬픔을 딛고 선 마주침이며, 영겁을 돌고 돌아 마주한 눈빛이고, 영원한 진리와의 완전한 만남이다. 브랑쿠시는 사물과 대상의 정수만을 함축적으로 나타냄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더 명징하고 높은 차원의 영성과 진리에 이르게 한다.

브랑쿠시의 예술 정신에 깊은 영감을 불어 넣었던 티벳의 성자 미라레빠(Jetsun Milarepa, 1028/40-1111/23)는 육바라밀의 노래에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사물을 직관하여 아는 것 이외에는”이라고 말한다. 
브랑쿠시에게 조각의 행위는 ‘모든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단단한 진실과 함께 하는 일’이었다. 그 진실은 세상을 더욱 명료하게 만들고, 삶을 빛나게 한다. 깨달음을 위해 수행처럼 이어진 브랑쿠시의 조각 행위는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세상과 타인의 근본에 이르고, 그들이 지닌 단순성에서 오는 진솔한 만남을 갈구한 것이리라. 평생 추구한 맑고 깨끗한 마음과 욕심을 덜어낸 선택과 매일의 성실함과 꾸준한 손길이 빚어낸 브랑쿠시의 조각에서 세상 모든 것의 깊이를 만난다. 브랑쿠시에게 있어, 일체의 불필요함을 덜어낸 단순성은 사물과 대상의 본질에 가 닿는 신비한 주문이었다. 

깨달은 사람은 만물이 마음의 소산임을 아네.
그러니 밤낮으로 마음을 관(觀)하라.
마음을 지켜본다면 그대는 아무런 실체가 없음을 보게 되리.
그러니 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경지에 그대 마음 머물게 하라.
미라레빠의 〈십만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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