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과 선비들의 끽다거

남해에도 다인(茶人)이 있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나는 읍내에 있는 유배문학관을 찾았다.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있는 섬 남해는 고려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와서 고단한 삶을 살던 곳이기도 하다. 유배하면 제주도의 추사 김정희나 강진의 다산 정약용을 떠올리는데, 남해에도 꽤나 이름난 명사들이 많이 유배를 왔다.

〈화전별곡〉을 남긴 자암 김구(金絿, 1488~ 1534)와 한글소설가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 1692)이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내가 이곳 남해에 정착하게 된 계기도 따지고 보면 유배문학 때문이다. 2012년 나는 남해군에서 김만중의 유배문학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김만중문학상의 세 번째 대상 수상 작가가 되었다. 김만중이 남해에 유배를 와 왜 새삼스럽게 한글로 두 편의 장편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썼는지를 상상한 소설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가 수상작이었다.

삼매를 표현한 ‘차’
儒者들도 인정한 경지
무념으로 번뇌 씻자

이 소설을 투고하고 얼마 뒤, 남해에 온 나는 그의 유배지로 알려진 남해군 노도를 들렀다. 그곳에는 김만중의 초옥(草屋)과 가묘(假墓)가 있다. 가묘 앞에 선 나는 당선이 되면 당신처럼 이곳에 내려와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당선이 되었다. 당선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남해행 버스표를 끊고 짐을 꾸렸다. 그렇게 7년이 세월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남해에서 글을 쓰며 산다.

유배문학관에 간 것은 새삼 수상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날 그곳에서는 한국다도협회 남해다향지부가 주최한 창포다례제(菖蒲茶禮祭)가 열렸는데, 그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작년부터 나는 지역신문 〈남해시대신문〉에 남해의 문화단체를 탐방해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남해다향지부를 이끌고 있는 다도인(茶道人) 이금숙 선생을 취재하려고 연락했다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올해 다례제에서는 남해와 나라를 지킨 여덟 분의 호국영령들을 모시고 헌다(獻茶)하는 행사를 하기로 했다면서, 그 중 한 분인 김만중 선생의 대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나도 분수는 아는지라 사양했지만, 거듭 부탁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외람된 대역을 맡고야 말았다.

우리나라 차의 역사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단다. 백산차(白山茶)라 불리는 차가 있어 당시의 차 문화가 어떠했는지 전해준다. 신라시대 때에도 차를 끓여 공양한 스님들의 행적이 〈삼국유사〉 곳곳에 남아 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때까지 많은 다인(茶人)들이 나와 전통을 이어왔다. 조상을 기리는 행사를 차례(茶禮)라 부르고, 늘 있는 일을 일컬을 때 다반사(茶飯事)란 말을 쓸 만큼 차는 우리들 생활과 밀접한 기호식품이었다. 많은 이들이 차를 즐겨 마셨고, 우리나라 토양과 체질에 맞는 차를 개발하고 개성 넘치는 다구(茶具)와 제다법(製茶法)을 고안해 냈다. 또 차를 음미하면서 그 미덕을 노래한 차시(茶詩)도 끊이지 않고 쓰였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남해에도 차밭이 있다. 남해의 대표적인 고찰 용문사(龍門寺) 뒤편 염불암(念佛庵)에 오르면 그 기슭에 야생 차밭이 잘 보전되어 있다. 상주면 금산 방면에도 차밭이 있다고 한다. 바람 많은 고장 남해에서 고즈넉하게 삶을 꾸려갔던 옛 남해 사람들이 차의 운치를 모를 리 없었을 테니, 그 유적이 지금까지 남은 것을 어찌 별 일이라 하겠는가? 남해다향지부 지부장을 맡고 있는 신차철 선생은 남해농촌지도소에서도 녹차를 시험 재배하는 등 남해의 산과 들에는 그윽한 다향(茶香)이 시나브로 스며들고, 차에 매료된 분들의 발걸음으로 지부 사무실이 분주하다고 전해 주었다.

고승들이 일구어낸 선다풍(禪茶風)

불가의 스님들이 언제부터 차를 마셨는가는 잘 알 수 없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활동하던 시절에도 차는 있었을 듯하다. 깨달음을 얻은 뒤 처음 마셨다는 우유죽도 우유와 찻잎을 넣어 끓인 일종의 차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인도 차는 세계적인 명차(名茶)로 손꼽히는데, 그 연원이 갑작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달마대사의 동진(東進)과 함께 불가의 차 문화도 건너왔을 듯하고, 선종(禪宗)이 태동하면서 선다일여(禪茶一如)의 기풍도 우러났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공안(公案)에 보면 조주종심(趙州從?, 778-897)과 연관된 화두 ‘끽다거(喫茶去)’가 있다. “차나 한 잔 마시게”란 뜻의 이 화두는 참구(參究)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차 문화의 성행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나라 때 선승 조주선사는 밖에서 수행자가 찾아오면 불러 이렇게 물었다.

“이 절에 와 본 적이 있소?”

어떤 스님은 처음인지라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렇소? 그러면 차나 한 잔 마시구려”하며 차를 따라 주었다.

얼마 뒤 다른 수행자가 방문했는데, 마찬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번엔 몇 번 와본 스님인지라 “전에 와 봤습지요”라 대답했는데, 역시 “그렇소? 그러면 차나 한 잔 마시구려”하며 차를 따라 주는 게 아닌가.

이를 본 시봉이 이상하게 여겨 “스님, 처음 온 이나 여러 번 온 이나 똑같이 ‘끽다거’라니 거 뭔 말씀입니까?”하며 제 딴엔 큰 의문을 제기했다.

이런 아둔한 시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주가 씩 웃으며 그 시봉에게도 한 마디 던졌다.

“너도 차나 한 잔 마셔라.”

조주 스님의 심오한 마음 밭의 갈피를 낸들 알겠는가만, 죽비보다 매서운 조주다풍(趙州茶風)은 이렇게 굽이굽이 전승되었다.

고려 말의 큰 스님 태고보우 스님에게도 〈찻잎을 따면서(摘茶)〉란 시가 전하고 있지만, 다승(茶僧)이라 하면 초의의순(艸衣意詢, 1786~1866) 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아주 오래 전에 나는 초의 스님의 선시(禪詩)를 겁도 없이 번역해 〈초의선집〉(동문선, 1993)이란 책을 냈는데, 그때 나는 초의 스님의 높고 깊은 우리 차 사랑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우리 차의 연원을 읊은 〈동다송(東茶頌)〉과 차의 가치와 제다법을 풀어 쓴 〈다신전(茶神傳)〉도 지었다. 〈동다송〉의 첫 시작은 이렇게 펼쳐진다.

하늘이 좋은 나무를 귤의 덕과 함께 하니

받은 명을 어기지 않고 남쪽 나라에 피었네.

빽빽한 이파리 눈발을 뚫고 겨울 내내 푸르고

하얀 꽃은 서리에 씻겨 가을 꽃잎을 터뜨렸네.

고야산의 신선처럼 고운 피부는 깨끗하고

염부주의 금빛처럼 향기로운 마음 맺었네.

이슬 기운이 푸른 옷 같은 가지를 맑게 씻었고

아침 안개에 젖은 잎은 비취새의 혀와 같구나.

后皇嘉樹配橘德 受命不遷生南國

密葉?霰貫冬靑 素花濯霜發秋榮

姑射仙子粉肌潔 閻浮檀金芳心結

沆瀣漱淸碧玉條 朝霞含潤翠禽舌

차나무가 가진 유래와 미덕, 기질 등등을 풀어나가는 대목이다.

누구보다 차를 사랑한 스님이었기에 차에 관한 시도 많이 지었는데, 그 중 한 편을 읽어보자. 〈석천에서 차를 끓이며(石泉煎茶)〉라는 시다.

하늘빛은 물과 같고 물은 안개와 같아

이곳에 와 지낸 지도 어느덧 반년일세.

따스한 밤 몇 번이나 밝은 달 아래 누웠던가

맑은 강물 바라보며 갈매기와 함께 잠드네.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 원래 없었으니

비방하고 칭찬하는 소리 응당 듣지 않았지.

소매에는 뇌소차가 아직 남아 있으니

구름에 기대어 두릉의 샘물을 기른다네.

天光如水水如烟 此地來遊已半年

良夜幾同明月臥 淸江今對白鷗眠

嫌猜元不留心內 毁譽何曾到耳邊

袖裏尙餘驚雷笑 倚雲更試杜陵泉

스님의 다도는 진즉부터 세상에 알려져 있다. 해남 대흥사에 있는 일지암(一枝庵) 기슭에 차밭을 일구어 늘 차를 마시면서 생애를 보냈다. 위 시는 물설고 낯 설은 타향인 한양에 온 지 반 년이 지난 무렵에 쓴 것이다. 그 즈음에야 짬을 내게 된 스님은 오랜만에 다기(茶器)를 앞에 두고 차를 끓였다. 한강을 마주한 두릉에서 맑은 샘물을 긷고 물을 끓여 다도를 즐기면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마음가짐을 다잡는 모습이 역력하게 새겨져 있다.

선비들의 마음에 어린 다심(茶心)

유가의 지식인인 선비들 역시 차를 가까이 두고 즐겨 마시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는 단순한 음료이기 이전에 몸의 기능이나 기운을 조절해주는 효험도 있어 애호했고, 또 차를 마실 때 배어드는 풍류가 남달라 결코 멀리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팔만대장경 판각이 끝난 뒤 부처님께 올리는 글을 쓸 만큼 불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불자였다. 그러니 그에게 차시가 없다면 이상한 일이다. 그 중 한 수 〈천화사에서 노닐다가 차를 마시면서, 동파의 시운을 쓰다(遊天和寺飮茶 用東坡詩韻)〉를 읽어보자.

한 지팡이가 푸른 이끼를 뚫고 가니

시냇가에서 졸던 오리가 놀래 깨네.

차 끓이는 오묘한 수법에 힘입어

눈 같은 진액 반 그릇으로 번민을 씻노라.

一察穿破綠苔錢 驚起溪邊彩鴨眠

賴有點茶三昧手 半췛雪液洗煩煎

무신정권 시대를 문인으로 살다간 이규보는, 그의 문학은 유쾌하고 해학적인 풍취를 자랑했지만 고민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위안을 주었던 공간은 사찰이었고, 사찰에서 느낀 편안하고 안온한 심경은 차가 있어 담아 둘 수 있었다. 사찰이 깃들어 있는 골짜기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걷다 잠에서 깬 오리의 홰치는 소리를 들으며 불을 지펴 차를 끓였다.

수행 깊은 스님이 삼매를 극한 솜씨로 빚어낸 차는 이미 속세의 때를 모두 털어낸 무념(無念)의 경지였다. 그 해탈의 경지를 흠뻑 맛보면서 시인은 세상에서 달고 온 번뇌의 찌꺼기마저 말끔히 씻어버렸다.

오늘 남해의 창 밖에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 있다. 구름을 몰고 오는 바람소리가 차츰 거세어진다. 때 이른 무더위가 버겁고 더운 바람이 스산한 날이면 가슴을 활짝 열고 차 한 잔을 마시자. 내 집 골방이 어느덧 심산유곡 개울물 소리 정겨운 산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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