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규 통해 동아시아 禪 기틀 세우다

‘一日不作 一日不食’ 대표된
당시 선원만의 청규를 제정해
율원서 독립… 울력의 생활화
나말여초 유입, 현재까지 계승

백장사 조사전에 모셔진 백장 선사의 진신상.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로 대표되는 선원 청규를 제정한 백장 선사의 사상은 동아시아 선의 기틀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몇 년 전 조계종 종단쇄신위원회에서 이 시대에 맞는 ‘승가 청규’를 발표하였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당시 청규를 제정한 어른들께서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고 했지만, 공포되어 공식적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청규(淸規)라는 율장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선종 승려들의 수행 패턴에 맞게 제정된 것으로, 당나라 때 백장에 의해서 처음 시도되었다. 

청규를 최초로 제정한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는 어떤 인물인가? 백장은 ‘왕(王)’ 씨며, 복건성 복주(福州) 장락현(長樂縣) 사람이다. 백장의 휘호는 회해(懷海), 서산혜조(西山慧照)를 의지해 출가하였고, 형산법조(衡山法朝)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대장경을 열람한 뒤 마조(709~788)에게 가서 수학하였다. 백장은 마조가 입적한 뒤에도 석문산(石門山)에 있는 마조의 사리탑(보봉사) 옆에 머물렀다. 그 후 신도들의 청에 의해 강서성(江西省) 남창부(南昌府) 봉신현 백장산(百丈山, 大雄山)으로 들어갔다.

백장산은 산세가 지극히 우람하고 가팔라서 ‘백장’이라고 불렀다. 필자는 이곳에 10년 전에 방문했는데, 중국의 선종 사찰 가운데 깊은 산속인데다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찾아가는데도 대도시에서 이틀이 걸렸다. 선사가 이곳에서 선풍을 전개하다 814년 입적했는데, 세수 66세, 승랍 47년이다. 821년 ‘대지선사(大智禪師)’ 시호를 받았다. 몇 가지 일화를 통해 백장의 면모를 보자. 

어느 날 백장은 스승 마조와 들판을 지나다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마조가 백장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슨 물건인고?”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갔는가?”
“이미 날아갔습니다.”
마조가 머리를 돌려 백장의 코를 한번 비틀었다. 백장은 아픔을 참느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조가 말했다.
“다시 한번 날아갔다고 말해봐라.” 백장은 마조의 말끝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백장야압(百丈野鴨, 백장과 들오리)’라는 공안이다. 여기서 마조가 백장에게 물었던 시심마(是甚投)는 단순히 들오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들오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듣는 그 작용이나, 코를 비틀었을 때 코가 아프다고 인식하는 본체가 무엇인가를 직관적으로 깨달을 것을 제자에게 보인 것이다. 들오리가 이미 날아가 버렸든 바로 그 자리에 있는지에 상관없이 일상의 보고 듣는 작용은 생멸(生滅)이 없는 불생불멸이건만 어리석은 제자는 현상적으로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들오리가 날아갔다고 대답하고 있다.

스승이 제자를 지도하는 선문답이 후대에 문자화되고, 이 문자선이 다시 공안(公案)으로 전환되었다. 이 공안을 방법화한 것이 간화선이다. 이렇게 간화선의 주제인 공안이 성립하는데, 그 기원이 마조와 백장과의 일화에서 발단되었다. 또 마조와 백장 사이에 이런 일화가 전한다.

백장이 법상 모서리에 있는 불자(拂子)를 보고 마조선사에게 물었다. 
“이 불자에 즉(卽)해서 작용합니까?, 아니면 이 불자를 여의고(離) 작용합니까?”
“그대가 훗날에 법을 설하게 되면 무엇을 가지고 대중을 제접할 것인가?” 
백장이 대답대신 불자를 잡아 세웠다. 마조가 이를 보고 물었다. “이것(불자)에 즉해서 작용하는가?, 아니면 이것을 여의고 작용하는가?”
백장이 불자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마조가 순간, ‘악’하고 고함을 질렀다. 백장은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

앞의 내용을 ‘삼일이롱(三日耳聾)’이라고 한다. 이 공안은 선종에서 최초의 ‘할(喝)’이라고 한다. 이 할은 현재 한국의 스님들도 상당설법을 할 때, 자주 활용되는 선풍의 한 일면이다.

그러면 서두에서 언급했던 청규에 대해 보자. 청규가 제정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당시 선종 승려들이 율원(律院)에 거주하여 율종 승려와 생활이 맞지 않았다. 이에 선종 승려에 맞는 규율이 필요했다.

둘째는 안사의 난(755~763) 당시, 하택 신회가 도첩을 팔아 왕권을 도왔고 난이 끝난 후에도 도첩 매매가 성행해 교단이 문란하였다. 이에 선사들은 세속적인 유혹을 끊고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내부로부터 개혁이 필요했다.

셋째는 당나라 때 마조의 사상은 전통이나 경전의 권위를 빌리지 않고 살아있는 인간의 현실성에 중점을 두었다. 이렇게 일상의 선으로 전개되어 ‘선=노동’으로 자연스럽게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청규 내용으로 크게 몇 가지만 언급하면 이러하다.

중국 강서성 봉신에 위치한 백장사의 전경. 백장 선사는 이곳에서 선풍을 날리다가 814년 원적에 들었다.

모든 대중이 평등하게 공동으로 노동해야 하는 의무규정인 ‘보청법(普請法)’, 덕이 있는 스승을 장로(長老)로 삼아 방장(方丈)에 거주케 하는 것, 불전(佛殿)을 따로 만들지 않고 법당(法堂)만을 세워 생불(生佛)로 추대된 장로로 하여금 법당(法堂)에서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찰에서 부처님이 모셔진 당우를 일반적으로 ‘법당’이라고 하는 것이나 방장 제도, 대중 울력 등이 백장에 의해 제정된 청규에 의해서다. 그러면 선사의 청규 정신을 보기로 하자.

백장은 매일 실시하는 울력만 있으면 대중보다 제일 먼저 나와 일했다. 이점을 안타까워하던 주지가 하루는 연장을 감추고 쉬기를 청하자, 백장이 말했다. “내가 심어 놓은 덕도 없는데 어찌 남들만을 수고롭게 하겠는가?”
그날 저녁, 백장은 공양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찾아와 스님께 공양하기를 청하니, 백장이 말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이 말은 청규의 대표적인 문구가 되었고, 현재 우리나라 어른 스님들도 울력과 수행을 동일시하는 측면으로 발전되어 스님들의 울력이 관습화되었다. 또한 백장과 함께 회자되는 ‘백장야호(百丈野狐)’ 공안을 보자.

백장이 설법할 때마다 한 노인이 청중들 맨 뒤에서 법을 들었다. 어느 날 그 노인은 설법이 끝났는데도 법당에 서 있었다. 백장이 이상히 여겨 “거기 서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 때 노인이 말했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적 가섭불 때,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때 한 학인이 제게 묻기를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라고 하기에, 저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이후부터 저는 500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스님께서 제가 여우의 몸을 벗어나도록 좋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백장이 여우에게 말했다.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과에 어둡지 아니하다,(不昧因果)”
그 말끝에 여우가 법안이 열리었고, 선사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저는 이미 여우의 몸을 벗어나 뒷산에 있으니, 스님께서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여우가 물러난 뒤, 백장이 대중에게 말했다. “공양 후에 승려의 장례식이 있으니 화장할 준비를 하라.”
대중이 절 뒷산으로 올라가보니, 여우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백장은 이 여우의 장례식을 승려의 장례식처럼 여법하게 다비해주었다.

백장의 선풍과 선사상을 보자. 백장은 설법이 끝나고 대중들이 법당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갈 때,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불렀다. “이보게들!”
대중들이 얼떨결에 놀라 고개를 돌리면, 백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고?(是甚)”
선종사에서는 이를 ‘백장하당구(百丈下堂句)’라고 한다. 위 내용은 ‘이 뭣고’라는 화두로 많이 쓰이고 있다. 불성사상이 담긴 〈벽암록〉 26칙에 실려 있는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이 있다.  

어느 승려가 백장에게 물었다.
“무엇이 기특한 일입니까?
“그대가 홀로 대웅봉에 앉는 일이다.” -〈백장록〉   

곧 독좌(獨坐)의 주체인 ‘아(我)’는 곧 깨달아 있는 그 본체인 대아(大我)인 것이다. 대아는 6근·6진을 벗어났고 진상(眞相) 그대로여서 문자에 매이지도 않으며 심성은 물듦이 없어 그 자체가 본래 완전한 여여불(如如佛)의 당체인 것이다. 백장은 돈오법문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어떤 승려가 ‘도(道)에 들어가 돈오하는 대승법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백장이 이렇게 답변했다. 

“우선 그대는 모든 반연(攀緣)을 쉬고 만사를 내려놓아서 선(善)과 불선(不善) 등 세간의 온갖 것들을 모두 놓아버린 뒤에 기억하지도 말고 망상하지도 말라. 몸과 마음을 놓아 버려 자재롭게 되면 마음은 목석 같이 되어 입으로는 말할 것이 없으며, 마음으로는 분별할 길이 사라진다. 마음이 허공과 같이 지혜의 해가 저절로 나타나는데 마치 구름이 흩어지면 해가 나오는 것과 같다.” -〈백장록〉   

이 시중에서 살펴본 대로, 백장은 불성을 태양에, 번뇌를 구름에 비교하여 잠깐 구름에 가려진 태양, 즉 불성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불성을 구족한 존재임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목석처럼 되어 자심(自心)을 관(觀)할 것을 의미한다. 즉 마음에 집착이 없는 무심의 경지를 표현한다. 백장이 주장하는 ‘심여목석(心如木石)’과 같아야 한다는 사상은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과 분별이 없는 고요한 마음으로 달마의 벽관(壁觀) 사상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대로 백장의 선종사적 위치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백장은 큰 인재를 키웠다. 곧 5가 7종 가운데 제일 먼저 위앙종을 개산(開山)한 위산 영우(771~853)와 임제의 스승인 황벽 희운(?~856)을 배출하여 위앙종과 임제종의 연원을 이룬다. 또한 백장의 제자로 신라의 명조안(明照安)이 있다.

둘째, 청규 제정으로 선종 교단이 율원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서 선종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동아시아 선의 기본 틀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또한 나말여초에 백장의 선사상이 유입되어 지금까지 백장의 사상이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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