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

백련산 일대 정토신앙의 중심지였던 백련사는 억불숭유 시대에도 명맥을 이어 현재까지 정토도량으로 발전하고 있다.

백련산 정토사와 왕실 인연
서대문구 안산을 이어 은평구 녹번동 쪽으로 백련산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사찰이 백련사이다. 백련사 옛 이름은 정토사(淨土寺)였다. 도성 서쪽에 위치한 탓에 일찍부터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정토신앙으로 유명하였다. 한때 서울에 사는 불자들 사이에서 이곳에 다녀와야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만큼 이름이 높았다.

백련산은 산세가 높지 않으면서 숲이 좋았다. 조선의 임금들은 궁궐에서 멀지 않은 이곳으로 사냥을 나와 격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곤 하였다. 성종은 18년(1487) 3월 19일 임금이 정토사 산기슭에 거둥하여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재상들에게 짐승 쫓는 것을 탐하여 밭곡식을 밟아 망가뜨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성종은 21년(1490) 10월에도 이곳으로 사냥을 나왔다.

이런 임금의 사냥은 연산군과 중종 때에도 이어졌다. 연산 12년(1506) 7월 왕이 장령 김지(金祉)와 함께 조준방(調痔坊) 군인을 거느리고 서쪽 금표 안 정토사에서 사냥을 하였다. 중종 역시 15년(1520) 11월 이곳에서 사냥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정토사는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인 태종 13년(1413) 4월 6일 상왕인 정종이 병이 나자 이곳으로 요양을 나왔다.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개경에 머물다 병이 나자 한양 가까운 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곳은 도성에서 가깝고 숲이 우거져 병을 치료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보름 정도 요양한 다음 4월 20일 판원주 목사 권완(權緩)의 집으로 옮겨갔다. 

정토사가 조선의 배불정책에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세조의 장녀 의숙공주(懿淑公主)의 원찰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주의 이름은 세선(世宣)이었다. 영의정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에게 하가하였으나 성종 8년(1477) 12월 3일 슬하에 자식 없이 죽었다. 양주 개좌동(价佐洞)에 장사 지냈다. 정토사는 의숙공주의 제사를 지내면서 배불의 어려움을 피해가고 크게 중창될 수 있었다. 

정토사 수난과 명종 엄단
정토사는 의숙공주의 원찰이 되면서 별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수난이 발생하였다.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탓에 유생들이 독서당으로 이용한 것이다. 독서당은 도성에서 가까운 곳을 성균관 유생들의 독서를 위해 지정한 곳을 말한다. 독서당으로 지정된 곳은 국가적으로 허락된 곳이어서 출입에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허락되지 않은 정토사에 유생들이 무단으로 침범하면서 소란이 벌어졌다.
정토사의 경우 의숙공주의 원찰이어서 독서당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성 서북쪽에 사는 유생들이 볼 때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지만 무단으로 들어가 제멋대로 머물렀다. 사찰의 입장에서 볼 때 골치 아픈 일이었다. 

이 문제가 조정에서 첨예하게 논의된 시기가 명종 즉위 무렵이었다. 사찰의 항의로 유생들의 무단침입을 금지하는 명이 내려졌다. 그런데 이를 번복하려는 관료들의 상소들이 연이어 보이고 있다.

명종 1년(1546) 1월 6일 사헌부에서 유생들의 정거에 대한 철회를 청하였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정토사에서 독서한 유생들을 정거(停擧)하도록 전교하셨다 하니, 신들은 경악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공주의 제전(祭奠)에는 본래 정해진 곳이 있거늘, 어찌 절에서 행하여 제사를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재궁(齋宮)이라 칭탁하고서 내수사로 하여금 제물을 마련해서 삭망제를 지내게 하는 것도 이미 불가한 일인데 더구나 유생들이 절에 올라가는 것은 오로지 독서를 위한 것으로 그 유래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종조에서는 금지한 적이 없었는데 왕위에 오른 초기에 척간(擲奸)의 명을 먼저 학궁(學宮)에 내려서 권면하는 뜻을 보이지 않으시고 도리어 불우(佛宇)에 내리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유생을 정거한 명을 도로 거두고 아울러 공주를 승사(僧寺)에서 제사지내는 일도 금하소서.”

명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문정왕후가 섭정할 때였다. 수렴청정을 하던 왕후는 명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정토사는 다른 사찰에 비할 것이 아니다. 조종조로부터 공주를 위해 창립하여 제사 지낼 장소로 삼고 승려로 하여금 수호하게 한 것이다. 유생의 독서는 다른 사찰이라면 본디 무방하지만 정토사는 공주를 위하여 금하는 것이지 유생의 독서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유생이 절에 올라갈 수 없게 된 것이 본국의 옛 제도인데, 근자에 유생들이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능만(凌慢)하는 풍습만 자라서 거리낌 없이 자행하여 장차 제사를 지낼 수 없어도 그에 대해 금할 수 있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이런 의사로 말했을 뿐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다음날 7일 간원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의숙공주의 제사는 본래 정해진 처소가 있는데도 사찰에서 행하는 것은 참으로 번독한 일입니다. 유생이 절에 오르는 일을 금하는 것이 비록 법전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뜻은 조용한 곳에 가서 독서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정거토록 하라는 분부까지 있었으니, 이 말씀이 한번 발표되자 사방의 선비들이 이 말을 듣고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정거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아울러 정토사에서의 제사도 행하지 마소서.”
왕실은 여전히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윤허하지 않았다.

“정토사는 다른 절에 비할 것이 아닌데 무뢰배들이 분집하여 작폐하고 있다. 때문에 만일 범법 작란하는 자가 있을 경우 정거법을 가할 것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연이은 상소에도 윤허하지 않은 이유
1월 10일에 집의 경혼(慶渾), 장령 김언거(金彦熬), 지평 이추(李樞)가 나섰다. “정토사에서 독서한 유생을 정거하라는 일에 있어서도 마땅히 다시 계품하여 새로운 임금의 누가 중외에 전파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1월 12일에 사인 민기(閔箕)가 앞선 세 사람이 올린 의견을 다시 물었으나 명종의 결단은 변함없었다.

“정토사는 공주를 장사지낸 뒤 그곳을 제막(祭幕)으로 삼고 폐단 없이 제사지내온 지 오래다. 지금은 무뢰배들이 유생을 빙자하여 절을 거처하는 집으로 삼고 산이 빨갛도록 나무를 베어다가 온돌을 덥힘으로써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만드니 어찌 마음이 슬프지 않겠는가. 단지 유생에게는 정거 말고는 죄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정거시키라고 전교했을 뿐이다. 그런데 대간의 아룀이 이에 이르니, 내가 매우 미안하여 대신에게 의논하려 하였는데 대신의 뜻이 또 이와 같아 나의 마음이 더욱 편치 않다. 유생의 독서는 정토사가 아니더라도 어찌 처소가 없겠는가.”

1월 13일 생원 홍천민의 상소,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이명(李蓂)의 차자에도 대답은 한결 같았다.

명종 즉위년 정토사의 수난은 명종 21년(1566)에도 발생하였다. 정토사에서 기거하는 유생을 금지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의 엄단에도 불구하고 독서하러 가는 유생들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명종이 여러 신료들의 끈질긴 요청과 유생들의 행동에도 윤허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명종은 중종의 소생이다. 중종은 진성대군 시절 잠저에 머물며 의숙공주의 시양(侍養)이 되었다. 그런 관계로 의숙공주는 명종에게 조모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토사는 다른 사찰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의숙공주의 삭망을 행할 때 내수사에서 비용을 내어 제물을 장만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왕실에 의한 폐해와 보호
이런 정토사였지만 왕실에 의한 폐해도 있었다. 광해군의 형 임해군은 원당이 무려 15곳이나 되었다. 불교를 좋아해서 원당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절에서 토산물을 받기 위해 지정하다보니 많아진 것이다.

정토사 역시 도성에 가까웠던 탓으로 임해군의 요구로 산채와 동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지만 피해갈 수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임해군이 성격이 포악했기 때문이다.

임해군이 선천적으로 포악한 면도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겪은 정신적 어려움이 그를 더욱 포악하게 만들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에 의하여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김귀영, 윤탁연 등을 대동하고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함경도로 떠났다. 그러나 병사를 모집하지 못하고 오히려 9월 국경인의 배반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졌다. 왕족으로서의 체면을 구긴 그는 여러 차례 협상 끝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포로가 되었던 정신적인 압박으로 인해 포악함은 더욱 심해졌다. 분노를 발산시키기 위하여 길거리를 헤매기도 하고, 민가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일반백성을 구타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성격이 그러했으니 사찰인들 폐해가 없었을까. 정토사 역시 도성에서 가까운 탓에 폐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정토사가 그런 잡역에서 면제될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의 태실을 두면서부터이다. 인조 4년(1626) 8월 예조에서 정토사 앞 봉우리에 대전과 왕세자의 태실을 두고 후일 그곳을 모르게 될 것을 염려하여 표시해 두었다. 그 후 정토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극락왕생의 도량으로 자리하였고, 지금의 백련사로 이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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