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 그 질긴 사랑과 집착 사이

모성만큼 뜨겁고 복잡하고 오색찬란한 사랑이 있을까.

‘내 뱃속에서 나와서 내 손으로 키운 나의 일부’가 자식이니, ‘내 생명보다 소중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라고 여긴다. 절대의 사랑은 상대에게는 한편으로 협박이고 구속이다. 원치 않아도 사랑이라서 받아들여야 한다니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가.

자식이 행복한 삶을 만들어나가기를 바라는 사랑과,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집착은 가깝게 붙어 있다.

“다 지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잘된다는 건 무엇이며 누거 그걸 판단하는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윽박지르고 원하지 않는 길을 강요하고 굴레에 가두는 일. 사랑이 비뚤어져 집착이 되어버린, 빗나간 모성의 함정에 갇힌 어머니들의 하소연은 익숙하지만 절박하다.

아들에 대한 대리만족
학업 강요의 집착 이어져
모성과 집착서 중도 찾자

8개월째 엄마와 대화 거부하는 아들

기옥 씨는 뒤돌아서는 아들 뒤통수에 대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힘껏 눌렀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서 식탁에서도 얼굴을 들지 않던 아들은 인사도 없이 배낭을 메고 집을 빠져나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플라스틱 컵을 부엌 바닥에 집어 던졌다. 마음 같아서는 유리잔을 대여섯 개 박살내고 싶었다. 유리창에 부딪쳐 와장창 박살나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녀는 깨어진 유리조각이 자신을 할퀴는 듯 고통을 느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은 8개월째 엄마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으로 처박히고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외출할 일이 있으면 나갔다. 엄마의 묻는 말에는 일체 대꾸하지 않았고 전달할 말은 아버지를 통했다. 기옥 씨는 호통도 쳐보고 달래도 보고 애원도 해보았지만 아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배고프면 지가 어쩌겠나 싶어 식탁을 차리지 않았더니 편의점 김밥이나 라면으로 혼자 방에서 해결했다. 용돈도 끊어보았지만, 마음이 약해져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아들이 등을 보인 이후 그녀는 체중이 5킬로나 빠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아들은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나

기옥 씨의 코칭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녀에게 아들은 어떤 존재이며, 그녀가 바라는 아들의 미래는 무엇이었는지. 지난 17년간 아들 곁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돌이켜보게 했다.

마흔이 넘어서 어렵게 얻은 외아들은 인생의 전부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제대로 못 마친 기옥 씨는 아들만큼은 모든 것을 바쳐 지원하고 싶었다. 남편의 사업도 순조로워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아들도 엄마의 정성에 보답하듯 잘 따라와 주었다. 사립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보냈다.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일류 학원 강사들로 팀을 짜는 과외그룹을 조직하는 돼지엄마 노릇을 했다. 동네에서 학원이나 선행학습의 정보가 필요하면 먼저 기옥 씨를 찾았다.

그녀의 모든 일정은 아들의 학업이 최우선이었고, 공부에 도움 되는 사교가 아니면 동창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우수한 성적을 받아오는 아들의 미래는 그녀의 사는 이유였고 목표였다. 주변에서 아들 칭찬을 하면 자신의 인생이 성공한 듯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꼈다. 일류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그 성공의 정점이 될 터였다.

돈 잘 버는 남편과 공부 잘 하는 아들, 기옥씨의 인생은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아들이 지금처럼만 해준다면 최상위권 대학 진학이 무난하다고 말하는 학원 교사와의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지난해 가을 그날까지는.

그날 아들은 폭탄선언을 했다.

“이제 앞으로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해요. 엄마는 간섭하지 마세요.”

귀도 입도 닫아버린 아들

뭣 때문이냐, 과외를 줄이고 싶냐, 하고 싶은 일이 있냐, 공부는 안 해도 좋으니 엄마와 대화를 하자… 아들이 왜 한순간에 변했는지 알아보려했으나 아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들은 귀도 입도 닫았다. 완벽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아들과 한 집에서 지내는 시간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아들은 엄마를 무시하고 못 본 척 해도 엄마는 깨어 있는 모든 순간에 아들의 기척과 동정에 온 마음이 가있었다. 혹 문자라도 보냈을까, 오늘은 집에 오면 엄마 얼굴을 보고 말을 걸려나. 기옥씨는 하루하루 애가 타고 살이 마르는 시간이었다.

이런 경우에 코칭으로 해줄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코치도 고민이 되었다. 기옥 씨의 상태는 우울증 초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들의 성공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주변의 모두에게서 공부 잘하는 아들을 둔 엄마로 칭송을 받던 그녀는 아들이 자신을 외면하는 지금, 정체성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코칭의 목표가 아들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일 순 없다. 코칭 당사자가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코치인 엄마가 아들을 이해하는 일이 첫 순서라고 여겼다.

관점을 바꿔보는 롤플레이, 메타미러 모델

관계의 갈등을 이슈로 서로의 다른 입장을 이해할 때, 코칭의 메타미러(Meta Mirror) 모델이 유용하다. 메타미러 기법은 관계의 역할을 바꿔서 다른 관점을 경험하는 롤플레이(Role Play) 중의 하나다. 관계의 갈등이 실제로는 상대방보다 자신의 욕구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모델이다. 이는 심리학의 투사(Projection)로 설명할 수 있다. 자녀의 성공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자신의 감정이나 소망을 타인에게 이전시키는 투사의 부정적인 형태로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옥 씨에게 아들과의 위치 이동을 경험하게 했다. 아들은 늘 책상에 앉아서 엄마의 말을 들어왔다고 했다. 기옥 씨는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오늘 학교수업은 어땠니?” “학원에선 공부 잘했니?” “시험 준비는 잘 되고 있니?” 등 엄마가 자주하는 말을 듣는 아들이 되어 책상에 앉고 침대에 눕고 식탁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디랭귀지로 표현하게 했다.

기옥 씨는 메타미러를 하면서 한동안 팔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이고 그저 끄덕이기만 했다. 코치는 아들이 된 기옥 씨에게 “엄마가 자신의 등을 바라보고 말을 거는 순간 어떤 기분이었을까요?”라고 물었다. 뒤에 서있는 엄마를 느끼는 아들은 불안하고 가슴이 뛰고 있을 것이라고 아들이 된 엄마는 말했다.

다음으로 기옥 씨에게, 자신과 아들을 제 3자의 위치에서 바라보도록 했다. 메타미러 모델에서 위치 이동은 중요하다. 코치는 “아들의 등을 바라보고 말을 거는 엄마를 볼 때 어떤 느낌이 드나요?“ 라고 물었다. 그녀는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울음을 터뜨렸다.

기옥 씨는 5번의 코칭을 받았고, 매번 자신의 미션을 만들어갔다. 다섯 번째, 그녀의 미션은 그녀에게 등을 돌린 아들이 집을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오랫동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녀의 관심은 여전히 성적과 대학입시였다

코칭 과정에서 아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기옥씨는 계속 아들과 대화를 언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궁금해 했다. 그 과제는 아들이 풀어야 하는 것이고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기다리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냐고 말하는 코치에게 그녀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내신이 곤두박질 쳐서 성적이 떨어졌는데 아들이 빨리 공부를 다시 해야 대학입시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아들의 입시에 목을 매고 있는 수험생의 엄마였다.

그 말을 듣자, 코치는 아들이 엄마에게 입을 열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엄마와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아들은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들은 엄마의 제일 관심사가 목표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런 엄마의 바람에 맞추어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지금 어머니는 자신에게 등 돌린 아들과 서로 마음을 터 놓는 게 중요한가요? 어떻든 아들이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리는 게 중요한가요?”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고통의 시작인 집착하는 마음

붓다는 무언가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집착이라고 하며 그것을 곧 탐(貪)이라고 하였다, 삼독의 첫 번째이며, 모든 고통의 시작이다. 불교의 기본 가르침인 사성제에서 번뇌의 뭉치인 집(集)도 탐착에서 비롯된다.

자식이 일류대학을 가서 좋은 직장을 갖고 남보다 나은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 부모의 바램이 잘못된 일일까. 핵심은 아들이 어떤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지 관심을 갖지 않은 데 있다. 기옥씨의 관심은 우수한 성적과 일류대학 입학이다. 엄마가 아들의 갈 길을 정하고 무조건 그 길을 가기를 원하는 욕망이다. 아들이 일류대학에 가서 남들의 찬사를 받아야 하는 엄마의 집착이며 탐이다.

하지만 집착하는 모성을 무조건 나무랄 수는 없다는 데 우리의 괴로움이 있다. 어디까지가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모성이며 어디부터 집착이 되는 것일까. 집착으로 가지 않기 위해 본능의 모든 애욕을 시작하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자녀를 가진 사람은 자녀 때문에 걱정하고,

소를 사람은 가진 사람은 소 때문에 걱정한다.

인간의 근심 걱정은 이런 집착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나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근심도 걱정도 있을 수 없다.” <숫타니파타>

미욱한 존재는 오늘도 붓다 한 말씀을 찾는 수행을 계속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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