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다 자식이다 하는 건 바로 영원한 도반이자 친구예요

 

마음 도리 모르고 몸을 벗는다면…

질문 우리가 이 마음의 도리를 모르고 몸을 벗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답변 우리가 이 공부를 안 하면 무서운 도리가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 학으로만 배우고 이렇게 해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그 도리를 모르고, 둘이 아님을 모르고, 둘 아닌 데서 참나라는 것이 있는 거를 모르고, 우주 전체와 내가 더불어 같이 있는 거를 모를 때, 너무나 애석한 것은 우리가 이 도리를 모르고 만약에 이 옷을 벗는다면 식(識)만 있지 분별이 없어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식만 있죠. 그래서 분간을 못합니다. 여러분, 금방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었다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부닥침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식만 남았으니 지금 그것을 증명해 보시려면 지금 아주 오관을 딱 가려 보세요, 눈도 막고 귀도 막고 다.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사람은 눈 아닌 눈이 있어야 하고 귀 아닌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분별을 하죠. 그리고 책정을 하고 판단을 해서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는 뭐가 있지, 도대체 식만 남아 가지고서 아니, 보기를 합니까, 듣기를 합니까? 사람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그 도리를 몰라요. 집이 어떤 집인지, 요만한 굴속인지 큰 집인지 그것도 몰라요. 그 굴속도 크게 보이죠. 그리고 기와집으로도 보이고 아주 그 보석으로도 보이고. 이렇게 하니 눈이 없다 이겁니다. 욕심에 꽉 찬 그 눈은 바로 식만 남아서, 생시에 살던 그 식으로서, 그 좋은 것만 가지려고 했던 그 식만 남아서 그저, 하다못해 돌 틈을 봐도 그 돌기둥으로 보고 돌집으로 보고, 공부를 하겠다고 들어가니 그렇게 될 수밖에요.

관하면 뭐가 나오느냐.
인과응보가 무너지고 습이 녹아지고
나를 발견하게 되고 진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해서, 지금 살았다고 해서 그걸 아무렇게나 생각할 수는 없죠. 그저 값싼 말로, 붙을 데가 없는데 뭐 붙을 게 있어서, 내가 없는데 뭐 붙을 게 있느냐고 이렇게들 허영 말해 버리고 마는데 그 무서운 도리는 누가 처리할까요?

한번은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어느 때 길을 가다 보니까 한 노파가 병이 들어서 가다가 엎드러져서 헤맸습니다. 나는 그런 꼴을 많이 봤으니까요. 그래서 구더기 눈에는 똥만 뵌다고, 여북하면 중얼중얼하고 갔겠습니다마는 말이에요. 그래 인제 가다 보니까 엎드려서 저거 하더니 고만 다 죽어 버리는 겁니다. 순간, 죽는 그 순간 뭘 생각했느냐 하면 그때의 그 식이 아무 분간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놓고 갈 수가 없는 겁니다. 다시금 거기다가 혼합을 시켜서 거기 다시 붙여 놓은 겁니다, 그걸 잡아서. 그래야 무슨 자손들이 있으면 자손들, 그래도 그 집에 가서나 어떻게 해결을 해야지 어떡합니까? 그러고 생각을 했습니다. ‘응, 집으로 찾아가든지 어디로 가든지 간에 내가 이 자리에서 본 것만이라도 인연이야. 그 즉시 본 게 인연이야. 그러니까 그게 나한테 닿은 게 아닌가. 그 또한 누군가. 옛날에 내가 모를 때 내 모습이야.’ 그래서 그렇게 하고 나는 뚜벅뚜벅 갔습니다. 조금 있더니, 한 오 분 죽더니 깨어나더군요. 그래서 가는 걸 봤습니다.

가는 걸로 끝난 게 아닙니다. 언제나 사람이 밥을 했으면 밥을 해 먹고서 그릇을 닦아서 다 마무릴 지어 놔야 밥을 해 먹고 치웠다고 하는 겁니다. 이 도리가 아주 작고 협소하지마는 이 우주를 굴릴 수가 있는 그런 도립니다. 요 밥이라고 한다고 그래서 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조그만 방편이든 큰 방편이든 그것은 방편이자 진실입니다. 하도 버릴 게 없고 진실이기에, 나온 게 없기 때문에 갈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참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보아 왔고 그랬는데, 옛날에도 사람이 죽으면 재를 이렇게 놓거나 쌀을 놓거나 그래서 뭐가 됐나 하고 볼 때에 새 발자국도 있고 뱀이 기어 간 것도 있고 또 사람 발자국도 있고 별의별 발자국이 다 난다 합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됐는가. 그것이 식만 남아서 자기가 분간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눈 가리고 귀 막고 코를 막아서 만약에 그렇게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암흑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밝은 불빛을 못 봐요. 내 마음의 불빛을. 불빛이 없으니 어찌 보겠습니까? 그래서 일로도 가고 절로도 가고. 저 토끼굴로 안 들어가나 개집으로 안 들어가나, 뱀굴로 안 들어가나 까치굴로 안 들어가나. 또 그 집안의 소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소가 사람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천차만별입니다. 이렇게 분간을 못하니 어쩌다가 인연이 돼서 사람 만나면 사람으로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 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몸을 받아 가지고 우리가 또 그런 분간을 못해서 또 좌천이 되고, 좌천이 안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자기 차원대로 그렇게 또 울고 아프고 부닥치고 서로 모였다가 또 헤어져서 또 그렇게 되시렵니까.

그러니 우리가 이 공부의 도리를 모르면 그렇게 우리가 눈 가리고 코 막고 귀 막고 다 이렇게 아주, 송장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분별하겠습니까? 고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금방 이 자리에서 죽었다 하면은 썩지도 않은 그 송장이 왜 보지 못합니까. 죽었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없습니다. 분별이 없습니다. 선천적인 식만 남아서 이리저리 이렇게 자기가 분간을 못하고, 캄캄하니까, 암흑인데 어떻게 발을 한 발 떼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똑같은 겁니다.

부처님의 그 뜻은, 만사만생이 다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고 이렇게도 되는 원리가, 누구나 잘되고 싶지 못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못되고 싶어서 못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눈이 없고 귀가 없으니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무서운 법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한생각에 들었다가 놨다가 들었다가 놨다가 하는 이 도리를, 이 만법의 이치를 참답게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확고히 하고 싶어요

질문 평소에는 내가 내 자신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몸이 좀 아프고 보니 자신감이 상실되는 것 같아요. 믿음을 확고히 하고 싶은데 도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예전에 한번 이런 예가 있었죠. 너무나 배가 고파서 엉금엉금 기다가 쓰러져 있었어요. 그런데 그 옆에 큰 나무가 있었어요. 나무에서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나와요. 나와서 물을 떠다 주는 거예요. 그걸 먹고 일어났어요. 그것이 꿈일까요? 이 마음이라는 게 꿈같이 그렇게 보이질 않기 때문에 꿈이라고 그러는 것뿐이에요. 실제예요, 우리 살아가는 데.

한번은 이런 예가 있었어요. 누가 꼭 수만 명이 있어야만 뭐가 된다고 그랬는데, 그래 지극하든 지극하지 않든 간에 한번 내가 알았다고 대답을 했으니 그거를 어떡하겠습니까. 벌써 내가 움죽거리지 않는다면 거짓이 되는 거죠. 우리가 거짓을 그냥 말로 하는 거보다도 진짜 이게 거짓을 한다면 그 거짓의 대가가 반드시 있는 거거든요.

어느 날은 차를 타고 오는데 말이에요, 묘지가 그냥 아파트같이 쫙 올라가고 쫙 올라가고, 많은 묘지가 있더군요. 그래서 거기 묘지에 있는 분들을 다 동원했어요. 이런 말 하면 여러분들이 이해가 안 가기 때문에 내가 말을 못 하죠. 그러나 말을 할 수 있어요. 여러분도 위급할 때는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깐. 주인공으로 하여금 전부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래서 그분은 성립이 됐고, 그러고 한 번도 찾아오질 않았어요. 그러나 나 할 일만 하면 됐지 그 사람한테 고맙다 뭐, 어쨌다 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한 건 아니거든요. 여러분도 남한테 고맙다는 소리 들으려고 하고, 또 무엇을 받으려고 하고, 내가 주면 그 대가를 받으려고 한다면 그거는 이 공부에는 어긋나는 짓이죠. 평소 때에 그냥, 내가 어쩔 수 없는 사람에 한해서는 그대로 대가를 받으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하는 그 마음 말입니다, 그게 한마음의 도리예요.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참, 이 깊은 뜻을 얼마나 해야 알아들을는지 모르지만 우습게 생각하진 마세요. 여러분 불성이 수억겁을 통해서 형성되게 한 장본인이에요. 그리고 진화시켜서 이렇게까지 이끌고 온 장본인이라고요. 얼마나 소중한 보배인지 모르시죠. 꼭 알아야 돼요. 못났든 잘났든 말이에요. 한 생 살아나가는 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모두 주어진 모습, 주어진 삶, 이 주어진 어려움. 이런 거를 누구에다 항거를 합니까? 자기가 몰랐을 때 모두 그렇게 잘못 행한 것이 더 많지, 잘 행한 것이 더 많겠습니까?

내가 항상 그러죠. 이 정수에 정수봉이 있는데 그 정수봉은 바로 자동적인 컴퓨터라고요. 그 자동적인 컴퓨터에 자기가 한 것대로 들어가면 바로 앞서 한 건 없어지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아주 쉽게 가르치는 얘기죠. 여러분은 그냥 관하면 그냥 거기에 입력되면서 앞서의 입력은 자꾸자꾸 없어지니까 소멸되는 거죠, 어떠한 문제든지. 하다못해 살인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지죠. 왜 없어지느냐. 바로 그 당시에, 관하는 그 당시에 바로 그 살인을 한 사람은 건져지는 거니깐. 그냥 없어지면서 그게 건져져요. 그러니까 그게 없어지죠. 무명의 업이 없어진다는 얘기죠. 그러니깐 이 마음공부라는 게 참 위대하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그때 그러니까 스물 몇 살이었어요. 그때도 그냥 쓰러지니까 이만한 저, 소똥 있죠? 소똥에다가 머리를 박곤 쓰러진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뭐, 소똥이다 뭐다 그럴 능력이, 힘이 있었으면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근데 넘어지긴 했는데 누가 와서 그냥 그 개천에다가 놓고는 닦아 주는 거예요. 그래 누군가 생각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 언저리에는 전부 갈대나무가 그냥 빽빽하게 들어섰었어요. 그 갈대나무조차도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다 알게 돼 있어요. 마음공부 안 하는 사람은 그냥 통하질 않지만 알게 돼 있다고요.

근데 그 갈대 속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섰더군요. 거기서 주동을 해서 나를 씻겨 준 거예요. 물론 보기에는 씻어지지를 않았겠죠. 그런데 다 씻어 주니까 내가 정신을 차려서 내가 스스로 가서 머리를 전부 씻은 거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몸으로 가서 머리를 씻었는데, 그에 앞서 모두 와서 머리를 씻어 줬다. 씻어 주니까 내가 일어나게 됐다. 그래서 내가 씻은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씻어 준 것도 아니다. 단, 일체제불도 한마음이요, 왜, ‘일체제불의 마음’ 노래 부르시죠? 일체제불의 마음. 그 마음이 일체 만물까지 더불어 같이 하는 이치거든요. 그러니깐 일체제불의 마음이 관찰을 해서 모든 일체 중생들을 다 이끌어서 진화되게 하는 거거든요. 하다못해 나무 이파리 하나라도 자기가 참, 나무가 악신으로 되질 않고 착한 목신으로서 자기를 지키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 나무는 다 응신으로 화해서 그렇게 진화를 시키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도 한바다가 되도록 내 모든 것을 다 보림해서 그 어떤 더러운 거든지 깨끗한 거든지 다 바다에 물 흘러가듯, 흘러 들어가듯 그렇게 되면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그건 다 정화가 된다, 그 물이. 왜? 여러분이 더 잘 아시죠? 수증기로 올라가서 다시 내려온다는 걸. 그럼 그게 수증기로 올라가서 다시 내려올 때 그냥 내려오는 게 아니에요. 정화가 돼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니깐 세세히 알고 본다면 그게 정화가 되지 않는다면 오물이나 모두 그 세균덩어리 모두 그런 거죠. 그런데 정화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만물이 다 그 물을 먹고 살죠. 나무가 크면 큰 대로 먹고 작으면 작은 대로 먹고. 산에 걷다 보면 요만한 떡이파리가 하나가 나와서 나불나불거리죠. 그것도 자기 생긴 대로 먹어요. 그래서 평등공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늠름하고 과감하고 물러서지 않는 그 진정한 마음이라면 왜 자기를 자기가 못 믿겠어요? 자기 자성을 왜 자기가 못 믿느냐고요. 그리고 또 못 믿는다 하더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죽는다 하면은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아요. 죽고 사는 그거를 생각해서 내가 무섭다, 두렵다 이럭하고선 물러선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 그거는 육신에 치우쳐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이에요.

조카가 정신이 좀 이상해졌는데…

질문 요즘 저의 가까운 주변만 보더라도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의 조카도 작년부터 좀 이상해져서 천도재를 한 번 지냈는데 크게 차도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하는지요.

답변 여러분이 생활을 하시면서 제일 어려운 게 지금 가난과 병고와 우환과, 이 자식들을 이끌어 가는 데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참 괴로움이 한두 건이 아니죠. 요새 가만히 보면 머리가 상스럽지 않게 바깥에서 유전이 오든, 안에서 인과로 인해서 벌어지든, 영계가 들고 영계가 안에서도 일고 이러는 동안에, 사람들은 이 신경이 급박해지면 그런 게 일어나거든요. 생활을 하다가 뭐 회사가 망했다든가 또는 공부를 하다가 그냥 지친다든가,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다든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거. 그리고 생활 속에서 가정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거. 이거를 가만히 보면 여간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만 그 문제를 다 물리치고 녹이고 나갈 수 있느냐? 여러분은, 즉 말하자면 용도에 따라서 오는 대로 거기에 맡겨 놓고, ‘거기서밖에는 해결을 못한다!’ 하고선 거기다 딱 맡겨 놓고 지켜보는 게 관하는 겁니다. 지켜보고 관한다. 기도가 아니라 관하는 거다 이겁니다. 그럼 관하면 뭐가 나오느냐. 인과응보가 무너지고 습이 녹아지고 나를 발견하게 되고 진짜 공부를 하게 된다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또 한 가지 그것이 바로 입력입니다. 입력. 컴퓨터에 입력하듯. 용도에 따라서 오는 대로 컴퓨터에 입력을 한다. 오는 대로 입력을 해 놓으면 그게 돌아간다.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돼 있는 자동기입니다. 이 물질적인 것을 떠나서 말입니다.

그러니깐 예를 들어서 인제는 둘이 아니게 내 주인공에, 아들이 아파도 내 주인공에다가 모든 걸 놨는데 웬만치 해 가서 그것이 완벽하게 이게 선다면, 아, 그러면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이죠. 둘이 아닌 까닭에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나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상대방의 병을 고쳐 주려면, 이 더군다나 정신질환은 더합니다. ‘어, 이건 네 주인공만이 너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이 네 주인공만이 너를 이끌어 갈 수 있다 하는데, 거기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묘한 생각이 있어요. ‘에이고, 이거는 무슨 어머니 조상이 붙었고 무슨 누구 영계가 이렇게 죽었는데 여기 붙어서 이럭하고….’ 아, 요런 생각들을 한다 말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생각을 떠나야 할 텐데, 놔야 할 텐데 고런 생각들을 하니 이게 떨어집니까? 뭐가 붙었습니까? 물 한 그릇에다 물방울 하나 넣은 거와 같은데. 항상 그렇게 일러 드려도 그것을 놓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하는 겁니다. 그래, 딴 영계가 들어왔다 합시다. 이렇게 부었습니다. 그럼 이게 물 한 그릇이, 그대로 물 한 그릇이 따로 있습니까? 마음은 체가 없어요. 그래서 의식이 돌아와서 딴 영계가 내 집 주인 노릇을 하더라도, 바로 내가 부족한 것도 내가 부족한 거지만 모두 한 그릇에 있어요.

그런데 거기 한데 들어갔으니까 천 명이 들어가도 두 명이 들어가도 한 명이 들어가도 ‘아이고, 이렇게 죽은 사람이 이렇게 들어와서 우리 아들이 이렇고 우리 딸이 이렇고, 무슨 내가 이렇고 무슨 누구가 이렇고….’ 이런 생각일랑은 아예 하지 말라 이겁니다. 그건 왜냐. 여기 들어갔으면 벌써 한 그릇이에요. 한 물이에요. 영에다가 영을 넣으니까 몇이 됩니까? 예? 그냥 영이죠? 스무 개를 넣으면 또 더 두드러집니까? 그냥 영이죠? 그런데 거기 뭐가 붙었다고 합니까? 참 이상스럽단 말입니다. 고렇게 생각들을 하니 십 년이고 몇 년이고 그냥 그 고통을 받고 앨 쓰는 거예요. 왜 각각 보시느냐 이겁니다. 둘이 아닌 도리를 가르치는데 왜 각각 보십니까.

영과 영이 열 개가 한데 합쳤어도 둘이 아닌 까닭에 아무가 들어왔더라도 주인은 주인 아니겠는가. 그러니 주인공이야, 그냥. 그렇게 그 마음속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바로 주인공 아닌가. 그러니 ‘이 몸을 정상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당신밖에 없어!’ 뜻으로다가 그 속의 주인공을 탁 잡아 주는 겁니다. 아셨습니까?

시식을, 제사를, 천도를 수백 번, 만 번 천 번 드리는 것보다 고 한생각이 필요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땀 흘리고 돈 벌어다가 허탈하게 쓰는 법 좀 버리고 돈 쓰는 법도 배워야 됩니다. 돈 버는 것만 배우지 마시고 쓰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올바르게 써야지 올바르지 못하게 쓰는 것은 귀신놀음이나 한가지고 도깨비장난이나 한가집니다. 여러분이 못사는 것도 여러분의 차원입니다. 모르는 차원. 죄가 있어서 그렇게 고생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차원.

그래서 거기서 ‘그 열 명이 들어갔어도 당신이 바로 주인공 아니겠는가.’ 주인공만이 그 속의 그 뜻을, 말로 하지 말란 말입니다. 뜻으로 그 주인공만이, 당신만이 이 애를 정상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그 신념과 믿음을 가지고선 그저 만날 적마다 그렇게 해 준다면, 만나지 않았어도 그렇고 만나서도 그렇고, 그게 먼 데 있으나 가깝게 있으나 똑같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주를 달린대도, 탐험을 한대도 우리는 둘이 아닌 까닭에 마음은 그저 어디도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산이 높아서 못 넘는 게 아니고 물이 깊어서 못 건너가는 게 아니고 은산철벽이 두꺼워서 못 뚫는 게 아니에요. 사방은 툭 터져 있어요. 고거를 하나 얘기해 드렸으니 인제는 모든 마음을 같이 이렇게 들면서 중용을 하세요. 안팎이 다 들리는 그런 활용 말입니다. 그것이 중용이에요.

부모님이 저만 바라보는 게 힘들어요

질문 안녕하세요. 저는 학생회 법회에 다니고 있는 학생인데요, 부모님이 저만 바라보는 것 같아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어요. 당신들 뜻대로 제가 따르지 않으면 혼내시고 그러니까 갈수록 서로 갈등이 더 심해지는 것 같고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답변 그러니까 이거를 다 따지고 살려면 못 살아요. 여기 천불이 나서 못 사니까 아예 전폐해 놓고 닥치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그냥 나갈 뿐이에요. 우리가 살 뿐이에요, 그냥. 그걸 일일이 따지고 일일이 하지 말고 속으로만 ‘이게 옳은 거다.’ 하면은 여기다 맡겨 놓고 옳게 걸음을 걷고 그냥 갈 뿐이죠. 뭐, 왈가왈부할 거 없이.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나가는 데 얼마나 고통이 많겠어요? 갈등도 많고. 학생들은 더 갈등도 있을 테고. 어떤 땐 부모가 몰라서 자식을 좀 더, 자식이라 할지라도 지금 젊은 세대로서 앞으로 옳게 보고 말하는 그거를 존중해 줘야 될 텐데,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말을 그냥 무조건 자르고 무조건 그냥 박살을 내거든요, 부모들이. 그런 부모들이 많아요. 난 그런 거 원치 않습니다. 이 바로 자식이다 부모다 하는 건 그 영원한 도반이면서 친구란 얘기예요. 그 사람의 그릇은 그 사람의 그릇대로 존중을 하고 내 그릇은 내 그릇대로 존중을 해야 하니까.

그런데 들어 보지도 않고 그냥 무조건 자식이라는 데서 그냥, 아랫사람이라는 데서 무조건 자르고 이런다면 이거 화목할 수가 있나요? 그리고 인정이나 사랑도 샘솟지 않고 말이에요. 자꾸자꾸 차지기만 하고 냉해지기만 하고 말입니다. 따뜻해지지가 않고.

그러니까 그 마음들을, 우리는 공부하는 사람들이니까 부모가 그렇다 할지라도 아, 엄마나 아버지가 그럭하시니까 모든 걸 주인공에 맡기고 ‘아, 저 엄마 아버지가 그러지 않도록 하는 것도 당신밖에 없다.’ 하고 이렇게 거기다 맡기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다면 스스로 또 부모도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커지고 그런 마음이 차츰차츰 적어져서 나와 그 부모가 대동하게 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평불만 이런 거는 다 거기다 놔 버리고 모든 것을 화목하게 돌아가게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를 자기가 다스리는 법이에요.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