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거절어·명령어 글쓰기

사회환경 따라 줄어든 거절
별 볼 일 없음을 경험하라
의무감에 휩싸였던 기억도
스스로를 옭아매는 장애물

싫다거절어 돌아보기

싫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다. 동네 친구들과 비석치기에 한창 열 올리고 있을 때 밥 먹어라고 부르는 소리에 대놓고 싫다고 할 수 없었다. 학교 가야한다는 말에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허깨비처럼 기신기신 일어나야 했다. 학원가라는 말에 싫다고 하지 못했고, 일 좀 똑바로 하라는 말에 일하기 싫다고 하지 못했다. 엄격한 위계 속, 듣기 싫은 말 앞에서 싫다고 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내 멋대로 살리라, 그런 날이 오리라 하면서 살다보니, 어느 한 때 싫어!”라고 속 시원히 질러대본 기억이 없다.

그러는 동안 내면의 싫다는 세월 따라 상황 따라 맞습니다괜찮습니다로 변질되지 않았을까. 가족의 행복, 조직의 안녕, 규범의 논리 앞에서 거절과 저항의 언어는 일찌감치 기절했거나 곰뱅이 젓갈처럼 물리화학적 변이를 일으켜서 내면 어딘가에 썩어문드러져 있는 건 아닐까. 심지어 당신은 싫어!”라고 꽥 소리 지르는 그 시절의 강렬하고 싱싱했던 감정조차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어른이 되어 내가 이른바 꼰대세대가 됐을 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분노 표현의 배후에 지난 세월 꾹꾹 억눌렀던 싫어!’들이 있지는 않을까.

싫어!” 의식의 어느 구석에 흉터나 사마귀처럼 박혀있을 충동적 거부의 언어. 모르긴 해도, 생애 아득한 원시의 시절, 엄마 젖을 빨면서 당신은 마음껏 싫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의 옹알이 중 상당 부분은 싫어였다. 배가 조금만 부르면 고개를 내저었고, 잠 오는 데 시끄러우면 오만상을 찌푸리거나 울어댔다. 공기나 습도가 조금만 불편해도 젖먹이였던 당신은 단호히 싫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 때가 있었다. 내 생애 그 많던 싫어는 어디로 갔을까.

붓다는 삶 자체가 불만족이라고 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싫어인 것이다. 불교 공부는 그 싫어의 실체를 보고 확인하자는 공부일 수도 있다.

아남 툽텐 린포체는 <모든 순간 껴안기>에서 참된 행복은 불확실한 것을 사랑하기, 안전하지 못함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사실은 싫은 감정을 스스로 드러내지 못하거나 주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싫어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불가측성 따위의 내적 그림자 속에 중추신경처럼 자리 잡고 있는 중심 감정이다. 내 인생에서 그 견고한 감정을 적출해내기 위해서는 일단 드러내야 한다. 드러내서 확인하고, 그것의 실체 없음, 그것의 가벼움, 그것의 별 볼일 없음을 몸으로 경험해야 한다.

- 살면서 아직 누구에게도 토해낼 수 없었던 싫다로 마치는 언어나 감정 쏟아내기.

-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 싫어!’로 마치는 말을 있는 대로, 빠른 속도로 써보기.

- 거부하고 싶은 것을 거부하지 못했던 때를 찾아서, 그 당시 하고 싶었던 거절과 불만의 언어를 따박따박 드러내기.

- 최대한 자신의 감정이 강하게 묻어나는 짧고 단호한 싫어! 글쓰기. 그때의 감정이 활자에 고스란히 묻어나올 것처럼 적는다.

세상에는 의외로 싫다를 허용하지 않는 동네가 많다. 상하관계가 명확한 직장일수록 조직 전체가 싫다표현의 불모지대다. 요즘은 차라리 군대에서 싫다가 청년기 수염처럼 잘 자라고 있기도 하다. 어쩐지 싫다표현의 허용지수가 높은 곳이 좋은 직장일 것 같다. 내가 명상 안내해왔던 가정폭력피해쉼터 여성집단원 대부분은 가정 내에서 가장 격렬히 저항했던 조건으로 싫다가 허용되지 않은 관계를 꼽는다. “당신 그러는 거 싫어!” “, 그런 거 안 할 거야!” “나한테 그러지 마!”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던 가정.

폭력은 인간의 근원적 감정표현이 불편해지는 조건을 먹고 자란다. ‘싫어글쓰기는 그 근원적 감성의 포박을 풀어헤치는 작업이다. 왜 풀어헤쳐야 하는가? 당신의 내면이 그런 포승줄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대한민국의 많은 성인들이 어쩌면, 싫음에 대해 싫다고 질러 대지 못하고 성장해왔으므로. 알게 모르게 당신도 그 싫어를 허용하지 않는, 상처의 세습자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므로. 당신 안에 곪아 있는 싫어를 손수 부려놓고 살펴보라.

밥 먹기 싫어! / 공부 싫어! 똥통에나 처박아버려 / 아침에 세수 하기 싫어 죽겠어 / 욕 듣기 싫어 / 나 깔보지 마. 듣기 싫어 / 그냥 싫어 / 나한테 그런 표정 짓지마 / 당신 같은 사람, 죽어도 보기 싫어 / 엄마 싫어. 내 인생 갖고 왜, 당신 멋대로야!

해야 한다로 마치는 단문쓰기

내가 만약 한 마리 연어라면 인생은 의무감으로 가득 찬 폭포다. 알 수 없는 원리로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삶은 명령하고 있었다. 나는 끝없이 임무를 부여받는 특수부대원처럼 우주의 원리에 따르고, 부모의 지시에 따르고, 인연의 요구에 매인다. ‘해야 한다는 자신도 모르게 나의 유전자와 신경 세포를 점령했다. 의무감이라는 폭포. 이것은 내가 이번 생을 살게 한 천부적 동기이자 상속 받은 강제력이다. 우리는 미처 그 의무감을 까맣게 잊고 살기도 한다. 물속의 고기가 물을 잊고 살 듯이.

내 안의 명령어들, ‘이러저러한 것을 해야 한다를 주도적으로 선택한 적 있던가. 아침에 해가 뜨면 잠에서 깨어나는 일, 밤이 깊어지면 잠을 자는 일,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일,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 사랑을 하는 일. 내가 주도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 아니면, 당신의 어딘가에 잠복했다가 나타나는 천부적 명령어인가?

천부적 명령어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당신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공부해야 한다, 일해야 한다, 돈 벌어야 한다, 법규 지켜야 한다, 음주운전 하지 않아야 한다, 싸우지 않아야 한다. 이뿐이던가. 당신은 스스로 명령어를 학습하고 재생하는 인공지능형 명령권자가 된다.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해, 승진해야 해, 친구관계 유지해야 해, 성과 올려야 해, 건강관리 잘 해야 해, 잘 놀아야 해, 어른 노릇 잘 해야 해, 돈도 벌고 잘 놀고 잘 써야 해. 그리고 그 명령어는 언젠가 스스로를 겨눈다. 마치 정면의 적을 겨눈 저격수의 총신이 360도 휘어져 자신의 뒤통수를 겨누는 것처럼.

군인이었던 그는 45년 전 베트남 전쟁터에 있었다. 명령이 곧 생사와 직결되는 전쟁터. 그곳에서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쩌면 잠 속에서도 해야 한다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아군은 명령으로 죽이고 적군은 총알로 죽였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세월, 그는 노인이 되어 옛 전적지를 찾게 된다. 15일간 배를 타고 갔던 그 나라를 4시간 비행으로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전적지를 다니던 그는 일행에게 자꾸만 화를 냈다. 계속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하면 소리를 질러댔으며, 양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 새끼들아, 차를 여기서 돌려야 한단 말야!” “바짝 엎드려, 코가 깨지게 엎드리라고!” “커브길 안 보여! 거기선 바짝 기어야 한단 말야!” 그는 일행에게 거듭 소리를 질러대며 명령했다.

전쟁 같은 삶이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자율이나 자유, 평등, 균형, 평화와 같은 정서라인이 파괴된 전쟁터는 당위나 명령어가 총알처럼 난무한다. 당신의 삶은 어떤가. 그 삶 또한 혹시 전쟁 같은 느낌이라면, 당신은 명령어의 폭포에 심신이 절어 있을 수 있다. 국가가 명령하는 시대, 직위가 명령하는 회사, 뭔가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 스스로에게 자꾸만 해야 한다고 속삭이는 이웃, 친지, 나 자신! 이것이 당신의 상처든 아니든 따져볼 일은 아니다. 깊은 내상(內傷)은 의사에게 가봐야 알 수 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의무감은 선량한 동기를 갖는다. 심지어 세상의 모든 범죄조차도 사사로이는 선량한 동기 아닌 게 없다지 않는가.

하지만 판단은 당신 몫이 아니다. 의무감에 찌든 당신의 의식을 햇빛 아래 드러내보는 것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이다. 내 안의 명령어. 이것에 포박된 내 의식들이 스트레스성 질환이나 감정조절 불량 상태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주변을 피폐하게 한다. 45년 전, 저 참전용사처럼.

- 나의 가족, 친지들을 둘러싼 관습적 명령어, 들은 대로 적어보기

- 내가 경험한 사회생활 중 명령어에 관한 속담이나 격언, 표어 적어보기

- 나에게 ‘~해야 해라고 했던 사람 이름 혹은 인상착의와 내용 적어보기

- 내 기억 속 명령어, 하나하나 떠올려 적어보기

- ‘이것만은 해야 해라고 당연시하는 나만의 의무감 드러내보기

해야 한다는 인간의 천부적 의식 비중이 크다. 하지만 자율, 자유, 평등, 평화의 측면에서 보면 꼰대 의식에 가깝다. 붓다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에 방점을 찍는다.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에 기반한 자애(慈愛) 앞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같은 의무적 강제는 심정적으로 이미 폭력이다. 물론 모든 종교 안에 놓여 있는 계율조차 생략하자는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 근세사 중 의무적 규범이 무성했던 시기를 우리는 평화나 자율의 시기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안에는 너무도 많은 해야 한다들이 적들의 총구처럼 스스로를 겨누고 있는 건 아닐까. 당신이 듣고 살아온 해야 한다들을 노출해보라.

남자라면 힘도 세야지 / 여자는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돼야 해 / 영업하려면 술은 기본으로 잘 마셔야 해 / 어른이 되면 결혼해야 해 / 학생은 공부만 해야 하는 거야 / 아프면 잘 먹어야 해 / 공은 이렇게 던져야 해 / 어른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잖아요 / 일을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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