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일상에서 얻는 깨달음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이치 알아 지혜롭게 살라는
聖人들의 한결같은 가르침
물음의 씨앗 마음속에 심어
궁리하다보면 답을 찾게 돼

한국참선지도자협회(회장 각산)720일까지 참선아카데미 대강좌 이것이 수행이다를 운영한다. 61일에는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가 일상에서 얻는 깨달음을 주제로 강의했다. 백성호 기자의 강의내용을 정리해 소개한다.

백성호 기자.

오늘은 깨달음을 일상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일상을 벗어난 깨달음은 필요가 없고,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2600년 전, ‘아힘사라는 이름의 인도 청년이 있었습니다. 아힘사는 한자로 불해(不害), 즉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름만큼이나 아힘사는 심성이 착한 청년이었습니다. 아힘사는 자기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돌아다니다가 한 수행그룹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힘사의 스승이 옆 도시로 출타했는데요. 이때 스승의 부인이 아힘사를 유혹합니다. 그러자 아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스승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님의 아내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힘사가 정중히 거절의 뜻을 표하자 스승의 부인은 수치스럽고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온 뒤 거짓말을 합니다. 당신이 없을 때 아힘사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말이죠. 그 얘기를 들은 남편은 당연히 분노가 치밀었고, 아힘사를 파멸의 길로 가게 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는 아힘사를 불러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힘사야, 네가 열반에 들기 위해서는 100명의 사람을 죽여 엄지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들어라. 그리하면 너는 열반에 들 것이다.”

마음의 평화를 찾던 아힘사는 스승의 말을 듣고 실천에 옮깁니다. 사람을 한 명씩 죽여서 엄지손가락을 잘라 목걸이에 꿰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사람들은 아힘사를 앙굴리마라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손가락목걸이를 뜻하는데요. 앙굴리마라가 어느덧 99개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었을 때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때마침 그 지역 근처에 있었고, 부처님 제자들은 동네에 살인귀가 나타나니 그곳으로 가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물론 부처님은 제자들의 말에 개의치 않고 그곳을 찾아갑니다.

100번째 마지막 희생양을 찾느라 혈안이던 앙굴리마라는 부처님을 발견합니다. 드디어 열반에 들 수 있는 기회, 앙굴리마라는 부처님을 향해 달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천천히 걸어가는 부처님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다급한 마음에 부처님에게 멈춰라!”라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뒤를 돌아보면서 나는 멈춘 지 오래다. 멈추지 않은 것은 바로 너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앙굴리마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앙굴리마라는 자기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한 겁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한 앙굴리마라가 이미 멈춘 사람을 만난 것이죠. 이미 멈춘 자리에서 부처님이 한 말이 우리를 평화롭고 자유롭고 지혜롭게 합니다.

끝내 싹이 튼 물음의 씨앗

사실 우리는 모두 멈춰있는데 착각을 하고 삽니다. 저도 사춘기 때 멈춰보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한 적이 있는데요. 저의 외삼촌 한 분이 스님입니다. 초등학생 때 뵈면 불교 얘기도 딱히 안 하시지만, 집에 들렀다 돌아갈 때 단 한 번도 돌아간다고 얘기한 적이 없으셨죠. 어머니에게 스님이 안 보인다고 물어보면 어머니는 바랑을 찾아보라고 하셨고, 바랑이 없으면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종교담당기자를 하면서 그게 뭔지 알게 됐어요. 결제가 끝나고 만행할 때 들른 것이었죠. 사춘기 때 저는 사는 게 뭔가라는 생각을 줄곧 했습니다. 나는 누굴까, 존재의 근원을 뭘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돌아보면 스님께서 물음의 씨앗을 던진 것 같습니다. 스님을 보면서 저 사람은 뭘 찾기 위해 인생을 다 걸고 정면승부를 할까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근데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대학도 가야하고, 여자친구도 사귀고, 결혼도 하고 싶었거든요. 많은 것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말이죠. 그래서 결국에는 이번 생에 깨달음이라는 걸 찾는 건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일상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포기하니까 결국 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소멸해가는 존재 하나요. 삶이 기차를 타고 달리는 것이라면, 철로가 끝에 끊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거기서 오는 허무함과 공허함이 정말 컸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인도를 처음 갔을 때인데요. 인도에 가기 전, 저는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어디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갠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가 좋았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엄청 기대했습니다. 도대체 뭐가 있기에 그렇게 좋다고 하는지 궁금했죠.

저녁 무렵 바라나시에 도착했습니다. 시장통을 헤치고 들어가는데 강물이 흐르고, 힌두교 사람들이 종교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딱히 대단한지는 알 수 없었고 이국적이라고만 느꼈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노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도 아릅답긴 한데 뭐가 대단한지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배에서 내려 만진 모래도 부드럽기만 했습니다.

해가 다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졌을 때입니다. 가이드가 특별히 강가에 배를 세우겠다고 하더군요. 배에서 내렸는데 장작들이 쌓여있었습니다. 화장터였죠. 건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강가에 장작만 쌓아놓은 화장터. 시신의 관도 없었고요. 그런 광경을 처음 봤습니다. 보통 장례식장에서 관이 들어가는 것만 봤으니까요.

그걸 보는 순간 큰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저기 누워있는 사람이 바로 나구나. 내가 잠시 후면 저기에 있겠구나. 저렇게 타겠구나. 삶은 참 순간이구나.’ 어떤 논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 순간이었죠. 그 뒤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답은 오래지 않아 올라왔죠. ‘네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지금 당장 해라.’

제 삶에서 간절히 원하는 것, 첫 단추는 사춘기 때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은 마음공부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마음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 이해하게 됐습니다. 출가하고 출가하지 않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구나. 눈곱만큼의 쟁점도 아니구나. 부처님이나 예수님, 공자님이 가르침을 준 건 간단했습니다. 이치를 알아서 지혜롭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라. 오랫동안 멈춰있던 바퀴가 다시 굴러가게 한 것은 화장터였습니다.

모든 종교 수행 핵심은 궁리

부처님에게 한 여인이 찾아옵니다. 죽은 아들을 데리고서 살려 달라고 말이죠. 부처님은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한 번도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움큼만 얻어오라고. 여인은 아들을 살릴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물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었죠. 동네를 다 돌고 여인은 숲에 죽은 아들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치를 안 거죠.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그 여인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기준을 다 따를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그렇게 그 여인은 수행자가 됩니다.

사실 우리는 가만히 놔두면 녹을 눈을 계속 뭉치고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눈을 깊이 들여다보세요. 정말 녹지 않는 눈인지, 아니면 녹을 눈인데 내가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지. 분노, 상처 등의 감정은 유심히 보면 일어났다가 작용하고 사라지는 속성을 갖습니다. 내가 뭉치지 않고 놔두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죠.

종교는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삶의 문제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문제를 푸는 이치를 알려주기 위해서였죠.

제가 강원도의 한 심마니를 취재했을 때 그 심마니가 이런 얘기를 전해줬습니다. 부인과 같이 산을 오르다가 부인에게 근처에 산삼이 있으니 찾아보라고 했는데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팡이로 삼을 가리키자 부인이 그제야 찾았다고요. 산삼은 잎이 보여야 찾을 수 있습니다. 산삼이 우리 삶을 지혜롭게 하는 이치라면, 그것은 잎이 있어야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평화롭다가도 문제를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세운 잣대, 기대에서 어긋났기 때문이죠. 그럴 땐 물음의 씨앗을 내 안에 깊이 심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하고 말이죠. 모든 종교 수행의 핵심이 궁리인 이유입니다. 그렇게 궁리하다보면 답이 올라옵니다. 불성이 있기 때문이죠. 간화선도 비슷합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이 필요한 이유는 이 같은 불성을 완전히 알기 위해섭니다. 궁리 끝에 찾아오는 잠깐의 불성을 언제라도 알고, 사용할 수 있게 말이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다행히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치를 찾아갑니다. 문제해결을 위해 하는 깊은 궁리가 곧 용맹정진이고, 이를 반복하다보면 마음의 근육이 생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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