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몽중설몽(夢中說夢)

몽중설몽(夢中說夢)은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다. <대반야경>에 나오는 사자성어인데, 일반적으로는 ‘허황된 이야기’, ‘두서없이 하는 말’, 또는 ‘무엇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 없음’을 이를 때 쓰인다. 불교 용어가 널리 애용되다 보니 단장취의(斷章取義, 뜻 전체를 취한 것이 아니고 단편적, 부분적으로 취한 것)하여 일반어처럼 된 것이다.

다음은 <대반야경>의 내용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꿈속에서 보았던 갖가지 현상들은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꿈도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꿈속의 일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상이 <대반야경> 596권에 나오는 법문이다. 그 의미는 꿈이란 허망하여 의존하거나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뜻이다. 우리 인생도 그와 같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 말이 변천하여 ‘헛소리’, ‘횡설수설’, ‘당치도 않는 말(胡言亂語)’ 등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생 100년을 ‘대몽(大夢, 큰 꿈)’이라고 한다. 멋있는 말이다. 하룻밤의 꿈만 꿈이 아니고 ‘인생도 꿈이라는 것’이다. 꿈이고 소설이다. 중단편소설이 아니고 장편소설이다.

우리의 삶은 대몽(大夢)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이거나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꿈인지도 모르고 아옹다옹, 티격태격하면서 살아간다. 별것도 아닌 소소한 일을 가지고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시시비비를 가린다. 조물주가 보면 웃을 노릇이다.

‘꿈’에 대해서라면 유명한 장주(莊周,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이야기’가 있다.

“지난밤 꿈속에서 장주가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유유자적하게 날아다녔는데, 얼마나 즐거웠던지 자신이 ‘장주’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불현듯 잠(꿈)에서 깨어 보니 호랑나비가 아니라, 틀림없는 인간 장주였다. 도대체 자신이 꿈에 호랑나비가 된 것인지, 호랑나비가 꿈에 장자로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장주는 ‘물화(物化)’라고 하였는데, 물화란 호접몽에서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피차의 구별이나 구분은 무의미하므로 물아일체(物我一體), 만물일여의 관점에서 보라는 것이다. 그대가 곧 나이고 내가 곧 그대이므로 옳고 그름(是是非非)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기준도 없고, 또 그것은 각자의 관점이나 입장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구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호접몽과 같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의 쟁점은 ‘너는 그르고 나는 옳다’는 관점에서 싸운다. 그런데 얼마 지나고 보면 그것은 입장 차이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날 정쟁(政爭)도,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도 모두 ‘강한 자기주장’, ‘고집’ 곧 ‘너는 나쁘고 그르며, 나는 옳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속에는 고집과 집단이기주의, 권력 유지 목적이 깔려 있었다. 한 가정이나 형제간, 부부간의 다툼도 슬프지만 이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는 “지인무몽(至人無夢)”이라고 했다. 지인(至人, 도를 깨달은 사람)은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한다. 허망한 꿈을 꾸지 않는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덕이 높은 사람은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꿈을 꿀 때 우리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악몽 속에서 헛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치고 나서야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헛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치는 이유는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가 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 인생 100년도 꿈이 아닐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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