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 현도스님(경주 자비사 주지)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이끌어 줄 누군가를 만난다. 때로는 스승이 되어 우리를 안내하고 도움을 준다. 제자를 만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인생의 여정서 사제지간의 만남은 삶의 가장 큰 신비이자 기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현도 스님과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은 것은 분명 축복이자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청출어람 이청어람’이라는 말이나 “스승을 뛰어넘지 못하는 제자는 스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무 힘도 능력도 없고 더군다나 병환까지 깊은 나를 곁에서 끝까지 지키고 보호해주는 제자 현도 스님을 마주대할 때마다 감사한 마음과 함께 기적이라는 단어 이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현도 스님과 나와의 인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 잘아는 재가법사로부터 경주서 소개를 받았다. 사제지간의 인연이 닿을려고 했는지, 현도 스님을 보자마자 당장 상좌를 삼고 싶었다. 시원스런 이목구비에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겸손한 몸가짐과 밝은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 이끌어주면 앞으로 큰 수행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내가 제자 삼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한 지 한달쯤 지났을 때 현도 스님에게 수락의 연락이 왔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현도 스님은 그날 이후 내가 예전에 마련해 놓은 경주 터에 가건물로 법당을 짓고 수행과 포교를 시작했다. 돌이켜 보니 정말 나는 부끄럽게도 현도 스님에게 가사장삼 하나 해준적이 없는 몰인정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현도 스님은 사제지간의 인연 이후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스승 봉양에 최선을 다한다.

 

스승 하는 일이면 물심양면 후원
지극한 스승 봉양 정성에 큰 감동
하심과 겸손을 몸소 실천한 제자

육탄10용사 천도재서 추모 의식을 함께하는 스승과 제자. 사진 왼쪽은 삼중 스님, 오른쪽은 제자 현도 스님.

 

건강했던 젊은 시절, 나는 마음 먹은 일은 많은 이들이 허황되다 느낄지라도 반드시 관철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한마디로 ‘불도저’ 스타일이었다. 지금부터 9년전으로 기억된다. 육탄10용사 동상을 보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을 위해 신명나게 천도재를 지내고 싶어졌다. 1945년 5월 3일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활약한 육탄10용사의 공적을 기리는 동상이었다. 당시 북한은 전쟁 준비를 완료한 후 1949년 5월 3일 새벽 한국군의 전투력을 시험하기 위해 개성의 송악산을 기습침공 하였다. 제 1사단의 서부덕 상사 등 10명의 특공대는 이를 탈환하기 위해 육탄으로 적진에 돌진해 빼앗긴 고지를 되찾았다. 이 때 산화한 10용사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조(浮彫)이다. 당시 나에게는 마음만 있었지 행사를 치룰 돈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현도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그 자리서 선뜻 5백만원을 내놓았다. 자신도 토굴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가고 있을 때여서, 그 보시금은 더없이 소중했다. 스승이 하는 일에 대해선 깊은 신뢰를 갖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묵묵히 후원만 했다. 너무 고마웠다. 현도 스님의 후원으로 행사를 여법하게 치룰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부산 UN공원묘지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장렬히 전사한 이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을때도 마찬가지로 큰 후원을 해줬다. 자신도 어려울텐데 내가 건강이 악화돼 투석을 시작하게 됐을때 역시 거액의 병원비를 보내왔다.

단순히 돈만 후원했다면 제자로서 고마운 마음은 있었겠지만, 그리 큰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도 스님의 행을 보면 아마 내가 친자식이 있었더라도 저렇게 극진히 대접받지는 못했을 거란 확신이 들 정도로 정말 나한테 지극정성을 다한다.

아침 저녁 하루에 두 번씩 별다른 일이 없으면 절서 20분 거리의 내 토굴로 찾아와 꼬박 문안 인사를 한다. 1주일에 세 번 경주 시내로 투석 받으러 갈때에도 내 토굴앞에서 기다렸다가, 병원 갔다온 나를 부축이며 반갑게 맞아 주기도 한다.

제일 크게 내가 현도 스님에게 감동 한 것은 4년전 불교TV 촬영팀과 나의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이다. 열흘을 처음으로 함께 있었는데, 보통은 스승과 불편해서 별도로 방을 쓰려고 할텐데, 현도 스님은 몸이 불편한 나를 시봉하기 위해 오히려 함께 잤다.

새벽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슬그머니 일어나려고 하면 어느새인가 잠에서 깨서 나를 화장실로 부축해 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본 병원으로 투석을 가면, 호텔 문앞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전전긍긍하며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을 모시는 마음이 이렇게 지극한 사람은 처음 봤다. 그 극진과 하심은 신도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절안에 있다가도 차 소리가 밖에서 나면 쫓아나가 환한 미소로 ‘잘 오셨습니다’라고 90도로 인사하며 신도들을 반갑게 맞는다. 하루 몇시간이 걸리든지 매일 수행이라 생각하고 신도들을 위해 축원 기도를 올린다. 자식없고 오갈데 없는 불쌍한 공양주 할머니에게는 매달 생활비를 5년째 후원하고 있다. 이런 선행들이 동네에도 입소문으로 알려져 궂은 일이 생기면 종교를 초월해 현도 스님을 찾는다. 스승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제자를 보면 내가 받는 것보다 더 즐겁고 신난다. 현도 스님이 있어서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마음만은 행복하고 즐겁다. 나에게 과분한 사랑과 대접을 해준 상좌 현도 스님, “스승으로서 해준 것이 없어 면목은 없지만 당신이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감사 인사를 지면을 통해 꼭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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