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국 관장, 2차 비문 판독서 ‘김생서’ 확인

탁본 조사를 통해 수도암 비문에서 김생서(金生書)·원화삼년(元和三年)·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등 21자가 추가로 확인됐다. 사진 왼쪽 붉은 선 부분이 ‘김생서’로 판독된 모습. 사진 오른쪽의 붉은 선 부분이 ‘비로자나불’로 판독된 것이다.

김천 청암사 수도암의 ‘도선국사비’가 신라 명필 김생이 원화3년(서기 808년)에 썼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불교고고학자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김천 수도암비를 조사한 결과 기존에 읽은 22자 외에 김생서(金生書)·원화삼년(元和三年)·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등 21자를 더 판독했다”고 6월 4일 밝혔다. 조사에는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 이영호 경북대 교수가 함께 참여했다.

‘비로자나불’ 등 21자 추가로
수도암 비로자나불 연대 확인
비문도 불상 조성 관련일 듯
“김생 생몰연대 수정도 필요”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은 수도암 약광전 앞에 있으며, 크기는 높이 177㎝·너비 60∼61㎝·두께 42∼44㎝다. 일제강점기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창주도선국사’라는 글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본래 세로 길이 4∼5.5㎝인 글자를 8행에 26자씩 새겼다.

박 관장은 “비석 끝부분 8행에서 흐릿하지만 조금 작게 새긴 ‘김생서’ 세 자를 찾았다”며 “‘원화삼년’이라는 연호는 6행 중간에 있었다. 후대에 판 도(道)자에 의해 원(元)자가 가로로 절단됐으나 일부 획이 남아 판독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비석 조성의 목적은 박방룡 원장이 ‘비로자나불’을 판독해 가능했다”며 “수도암비는 신라 말기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307호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조성 연대를 알려주는 자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박 관장은 수도암비를 ‘김생서 수도암 비로자나불 조성비’로 부를 것을 제안하며 “앞으로 불교 용어와 고자(古字)에 밝은 연구자들이 모여 판독하면 15~25글자를 더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천 청암사 수도암의 도선국사비. 비문 판독 결과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임이 확인됐다. 제공= 오세윤 작가

이와 함께 박 관장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김생의 생몰연대가 잘못됐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실제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생은 경운 2년(711)년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고, 예서와 행서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숭녕 연간에 고려 사신이 김생의 행초를 송나라 관리에게 보여줬더니 중국 최고 명필인 왕희지(王羲之)의 작품으로 오인했다는 일화도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김생의 출생년도는 711년으로 수도암 제작 시기인 808년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신라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김생이 활발하게 활동했을 시기로 추정되는 741~791년 사이 그의 진적 비문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의문으로 제기됐다.

이에 대해 박 관장은 “〈삼국사기〉 열전 중 출생연도가 확인되는 사람은 김유신과 김생뿐”이라며 “김부식과 편찬학자들이 김생 출생 연도의 전거로 삼았던 원전이 정확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또한 비문의 필체를 근거로 김천 갈항사지 동탑 상층 기단 명문,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 글씨도 김생 친필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영호 교수는 “이제 김생 글씨는 집자비인 태자사비가 아니라 김생 진적이 확실시되는 수도암비를 기준으로 연구해야 한다”며 “수도암비 보존 방안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조사단은 수도암비 추가 판독 결과를 정리한 연구 논문을 신라사학회가 펴내는 학술지 〈신라사학보〉에 게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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