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와 공자는 모두 시인이다

남해는 시의 고장이다
남해에는 유독 시인들이 많다. 지역 신문을 보면 주마다 시 한 편 안 실리는 날이 드물다. 남해의 명소를 자랑하거나 개인의 추억담을 읊은 작품들인데, 남해가 정말 시혼(詩魂)이 가득한 땅임을 일깨워준다. 그런 시를 읽을 때면 나도 한 수 멋들어지게 지어 읊어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

작품을 싣는 사람들은 대개 정식 등단한 시인들인데, 딱히 신문을 안 읽더라도 나는 날마다 시나 다름없는 아름다운 언어의 꽃밭을 만나곤 한다. 가만히 남해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에 귀 기울이면 생각지도 못한 산뜻하고 감칠 맛 나는 언어들이 두름 엮듯 연이어 들려오는 것이다. 남해 사람들은 살면서 겪는 이런저런 어려움이나 즐거움, 기쁨을 시에 가까운 문구들로 표현하는 데 익숙한 것 같다.

‘시’는 수행경지 담은 표현
깨달음의 경지 옅보여
시심은 수행심, 시력을 키우자

며칠 전 잘 아는 분과 함께 내가 사는 탑동에서 이순신순국공원까지 산책을 갔다. 차를 타면 5분도 안 걸리는 거린데, 걸어가면 한 30분 정도 걸린다. 산길을 걸으며 새 소리도 듣고 해안을 따라 밀려오고 멀어지는 파도를 보면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좋은 사람과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걷는 남해의 길에는 말 그대로 평화와 휴식으로 그득하다.

마침 순국공원에서 아는 분을 만났다. 일흔을 훌쩍 넘긴 분인데, 고현집들이굿놀음 연습을 할 때 자주 만나는 분이셨다.(역할이 ‘조리중’이라 우리 불교하고도 인연이 깊다.) 들에서 자란 야관문을 따 막걸리를 만들어 나눠 주시면서 혼자 사는 사람은 사고 치기 쉬우니 마시지 말라고 너스레를 떨어 웃음보를 터뜨리는, 유쾌하기 그지없는 낙천가이시기도 하다. 소일거리로 공원에 난 잡초를 뽑으러 오셨다는데, 공원 안 식당에서 파는 짬뽕 비빔밥을 점심 삼아 들고 계셨다. 나이와 밭일 때문에 몸이 조금 불편하신 분인데, 자신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면서 이런 비유를 들었다.

“이젠 쓸 데가 하나도 없어. 매운탕 거리도 안 된다니깐.”

본인은 천연덕스럽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속으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매운탕은 회를 다 뜨고 난 뒤 남은 자투리들을 모아 끓인 음식이다. 버리기도 아깝고 더 발라낼 곳도 없어 채소와 고춧가루를 풀어 만든 탕이다. 자신의 다소 누추해진 몸을 이렇게 귀에 쏙 들어오게 엮어내는 솜씨를 어디서 빌려오셨는지 감탄을 감출 길 없었다. 그 분은 자신을 낮춰 그렇게 불렀지만, 내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회도 맛있지만, 매운탕만큼 입맛을 돌게 하는 음식이 또 어디 있는가? 얼큰해서 술안주로도 그만이지만 저녁을 먹을 때 국거리로도 이만한 게 없다. 그 분은 자신을 낮춰 ‘매운탕 거리’라 부르셨지만, 내게는 우리 삶에 참으로 요긴한 사람이란 뜻으로 들렸다. 이렇게 중의적(重意的)인 표현을 쓸 줄 아는 분을 ‘시인’ 말고 달리 뭐라 부를 수 있겠는가!

선시(禪詩)의 남상, 혜능과 신수 두 선사의 시

석가모니 부처님도 따져보면 타고난 시인이다. 경전에 나오는 수없이 많은 비유담은 가만히 들어보고 새겨보면 어김없이 심오한 시구와 다름이 없다. 불경에는 게송(偈頌) 또는 가타(伽陀)라 해서 불교의 이치를 산문으로 풀고 그 의미를 시로 요약한 부분이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열려 있기도 하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고승대덕의 설법을 들으면 절로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 빠져 감동이 솟구치는 게 아닐까?

옛날의 뛰어난 스님들은 깨달음의 경지를 줄곧 시로 노래하곤 했는데, 이를 선시라 일컫는다. 언제 누가 읊은 시가 선시의 시작인지 따지는 것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역시 육조 혜능(慧能, 638-713) 스님과 신수(神秀, 605-706) 스님이 자신의 깨달음의 깊이를 견줘 쓴 시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싶다.

혜능과 신수 사이에 있었던 일화는 혜능 선사의 생애와 사유를 풀이한 〈육조단경(六祖壇經)〉이란 책에 자세히 실려 있다. 혜능 선사는 글을 몰랐던 스님이니 이 책이 스님의 저작인지는 더 살펴볼 일이지만, 선종(禪宗)의 발원과 그 계승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문헌이니 많은 사람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나이차만 30년이 넘을 만큼 신수 스님은 일찍부터 오조(五祖) 홍인(弘忍, 601-674) 선사의 문하에 들어와 수양을 거듭한 수행자였다. 한편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던 혜능 선사는 세속의 배움은 옅었는데, 어느 날 장터에서 누가 〈금강경(金剛經)〉 읽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바 있어 홍인 선사를 찾았다. 혜능의 법력을 엿본 홍인은 일단 불목하니로 두어 때를 기다렸다.

신수 스님은 홍인의 문하에 들어와 진즉에 자질을 보여 동료 스님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아 교수사(敎授師)가 되어 상좌(上座)로 불렸다. 스님들은 신수가 오조의 의발(衣鉢)을 이을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홍인 선사로서는 다소 난처해졌는데, 그래서 제자들에게 각자 자신이 수양하고 깨달은 바를 게송으로 써서 내라고 주문했다.

신수의 위상을 알고 있는 제자들은 아무도 시를 써 내지 않았다. 이에 신수 스님은 부족한 줄 알면서도 먼저 시를 써서 기둥에 걸어 놓았다.

몸은 보리수(진리의 나무)요,

마음은 명경대(밝은 거울)라.

날마다 열심히 닦고 털어내

먼지가 일지 않게 하리라.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惹塵埃

신수 스님은 비록 법력은 혜능 선사만 못했어도 겸손하고 성실했던 분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몸은 진리가 담긴 나무고 마음은 깨달음을 비추는 거울이란 비유가 벌써 남다르다. 그런 몸과 마음에 세상의 티끌이 묻지 않도록 늘 닦고 털어내면서 본연의 풍광(風光)을 간직하겠다는 다짐을 시에 담았다.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음을 자각하면서 그 길을 향한 구도의 행진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잘 보여주었다.

다음날 아침 신수 스님의 시를 읽은 제자들은 감탄을 하며 웅성거렸지만, 홍인 선사는 아직 그릇이 다 차지 않았음을 이해했다. 마침 지나가던 혜능이 시를 보고 옆 스님에게 물었고, 스님은 시의 내용을 풀어주었다. 이를 들은 혜능은 자신도 한 수 지을 테니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보리는 원래 나무가 아니고,

명경도 또한 대가 아니라네.

본래 한 가지 물건도 없는데,

어디서 먼지가 일어나겠는가?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확실히 깨달음의 경지는 혜능 선사가 한 수 위였다. 나무니 거울이니 하는 외물(外物)에 얽매여 어찌 깨달음을 얻겠는가? 눈에 보이는 물건에 미혹되고서는 함정에 빠져 장애를 넘어설 수 없다고 혜능 선사는 갈파했던 것이다. 원래 깨달음이란 텅 빈[空] 것이니, 먼지나 티끌이 나올 바가 없다는 것이다.

두 시를 모두 본 홍인 선사는 혜능이 의발을 이을 사람이라 꿰뚫어보았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발을 염려해 밤에 몰래 의발을 전하면서 절을 떠나라고 재촉했다. 그리하여 혜능은 6조가 되었고, 선사의 깨달음은 많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선종의 역사에서 남종선(南宗禪)이 되었다. 남종선은 선리(禪理)를 돈오(頓悟)에 두었다.

그러면 신수 스님은 어땠을까? 의발이 혜능에게 전해진 것을 당연하다 받아들였고, 스님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수양법을 갈고 닦아 점오(漸悟)를 선리로 한 북종선(北宗禪)을 완성했다. 두 스님이 살던 시대는 중국사에서 유일한 여왕(女王)이었던 측천무후가 다스리던 때였다. 신수 스님은 그녀의 신임을 얻어 널리 선리를 펼쳤다. 측천무후가 정통을 이으려면 혜능이 장애가 될 테니 없애주마고 했을 때 자신은 혜능의 법력을 따를 수 없다며 만류하는 미덕도 보인, 인격을 두루 갖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넉넉한 마음 때문인지 신수 스님은 102살이라는 장수를 누리고 열반에 들었다.

청천벽력의 깨침을 담기는 혜능의 선시가 윗길이지만, 시의 아기자기한 맛으로 보면 신수의 선시에도 얕잡아 볼 수 없는 비범함이 스며 있다. 오늘날 널리 회자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선가의 수양법은 이 두 거승(巨僧)의 선시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공자의 범접하기 어려운 시력(詩力)
‘공자왈맹자왈’이란 허튼소리 때문에 공자의 문학적 재능이 주목을 받진 못하지만, 공자의 문학적 공력도 대단히 높았다. 그간의 민요들을 정리한 〈시경(詩經)〉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짐작할 수 있다. 유가 지식인치고 (그 수준에서는 편차가 있긴 하지만) 시를 읊지 않은 이가 없는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한다.

공자가 썼다는 시는 현재 남은 게 없다. 〈논어〉에도 공자의 시는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말이면서도 시라고 봐도 좋을 구절은 여러 군데서 찾을 수 있다. 그 중 한 구절만 소개하겠다. 〈논어〉술이편(述而篇)에 나온다.

거친 밥을 먹고 맹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구나.

의롭지 못한 짓을 저질러 부귀해지는 일은

내게는 하늘의 뜬구름과 같다네.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즐거움을 담아낸 이 구절은, 거의 5언시의 형식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비유나 함축한 의미로만 봐도 시라 불러 손색이 없다. 〈논어〉에는 자신의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무작정 고상하게만 포장하지 않고 알기 쉬우면서도 아주 적절한 표현이나 상황을 들어 이해하기 쉽게 들려주는 장면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이 역시 시인으로서의 공자를 가늠하게 만든다.

소설가 박상은 자신의 소설 <가지고 있는 시(詩) 다 내놔>에서 시를 안 읽은 이 시대의 메마른 풍조를 아주 걸쭉하게 풍자했다. 봄이 무르익는 오월, 우리 모두 짬을 내어 시심(詩心)에 잠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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