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되는 것을 그대로 보면서 보지 말고 안에다 놔 버려라

오늘은 이 땅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얘기해 봅시다. 지구에 관한 건도 옛부터 활동하고 시각적으로 움죽거리던 장소가 지금 장소와 둘이 아니라는 거, 예전에도 우리가 있었고 지금도 우리가 이렇게 있노라고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할 때, 재차 말씀드리지마는 모든 것을 놓는다,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 하는 그것이 방하착(放下着)이라면 첫째, 모든 잡념과 전자에서부터 얻은 그 습성을 다 녹여 버리고 자기의 그 참 생수 맛을 봐서 자기가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또 이차적으로 자기를 다시 한번 체험하면서 상대방과 나와 다시 죽는 법을 또 배워야 된다. 다음에 세 번째, 상대방과 나와 더불어 같이 나툴 줄 알아야 한다. 만약에 상대방과 나와 죽지 않는다면 상대방과 나와 같이 나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을 재차 하는 겁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누가 어떠한 잘못을 하더라도 그건 보지 말라.
지금 나 가기도 바쁜데 왜 거길 보느냐.
그거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만날 그 그릇에서 헤어나지 못해.
그게 습이거든

우리는 이러한 경험 저러한 경험을 살림살이에서 다 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아주 놔 버리는 데, 맡겨 놓고 사는 데에 여념이 없어야 하는 것이, 온갖 작동을 하면서도 그 작동하는 것이 바로 자기 주인공에서 다 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운전수가 차를 몰고 다니는데 그 운전수에 모든 것이 달려 있듯이 모든 걸 거기에 맡겨 놓음으로써 전자부터의 자기 종 문서를 몰락 태워 버릴 수 있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탄생했을 때 내가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엉뚱하게 이 세상에 걸맞지 않는 말과 행이 솟아나올 때도 있거든요. 그럴 때는 오관을 통해서 내가 보고 이것이 걸맞지 않는다면 자기가 제재해서 거기다 다시 놔야 되는 법입니다. 밖에서 보는 대로 듣는 대로 해야 되는 것도 잘못이지만 안팎이 다 그렇겠죠? 그래서 양면을 다 쥐고 갈피를 잡고 즉각적으로, 이게 잘못됐다는 거 잘됐다는 걸 번연히 안다면은 이것을 믿고 들어가라. 믿지 않는다면은 상대가 걸리고 상대가 걸리면 불평이 나옵니다. 믿고 상대가 없다면 불평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여기에서 만약에 이 소릴 들었다 저기에서 저 소릴 들었다, 저걸 봤다 이걸 봤다 했을 때에 믿지 못하면 나는 어떠한 말을 한다, 행을 한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에 저 사람이 나라면, 둘로 보지 않았다면, 믿는다면 ‘아, 그렇기도 하겠지. 고정됨이 없으니까 때에 따라서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겠지.’ 하는 믿음이 있다면 거기에 한마디 할 것도 없고 안 할 것도 없는 거죠.

자기 안에다 모든 것을 굴려서 ‘아, 어찌 저렇게, 내가 지금 생각할 때는 이러한데, 전에는 안 그랬는데 어찌 이렇게 될까?’하고 안으로 굴려서 자기가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세 단계가 없는 세 단계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도리를 거기에서 넘기지 못한다면은 같이 죽어서 같이 나툴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심사숙고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더 이건 심사숙고해야 된다.

여러분이 선원에 오시는데 만약에 여기 오시는 분들만 구제를 하는 부처님이 계시다면, 그게 부처님이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 어디 앉아 있는 거나 서 있는 거나 고정되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여러분의 살림살이처럼 남편이 급하면은 급한 대로 나가서 뛰다가 사흘도 못 들어오고 나흘도 못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남은 바빠서 돌아치는데 불평불만 하겠습니까? 그걸 안다면 말입니다. 제때에 밥도 못 먹고, 제때에 잠도 못 자고, 참, 피로한 몸을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들어온 사람더러 말하겠습니까?

그걸 모르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겁니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당신 어디 갔다 왔어?”하고, “나는 죽도록 가정을 위해서 했는데, 당신이 좀 더 집에서 잘해 줬으면 자식들과 모든 것이 평안할 거를 왜 당신은 나가서 그렇게 돌보지 않느냐? 전에는 안 그러더니 맘 변했다.” 이거거든. 그러나 남편은 그게 아니라 제 속을, 나가서 일하는 걸 일일이 말할 수는 없고, 또 만약에 말을 해서 어떠한 불리한 조건이 생길 수 있는 말이라면 말을 못 하는 거라. 그렇다면은 말을 못 하고 “나를 믿어라. 믿으면은 모든 것이 잘될 거다.” 이러겠죠. 이렇게 하는 것도 믿어지고 저렇게 하는 것도 믿어진다면 아무 말 대상이 없는 거죠.

아, 그리고 우리가 지혜를 넓혀서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여러분이 세상 돌아가는 거 다 잘 알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고, 국내 돌아가는 것도 알고, 모든 거를 보고 알죠. 그러면서 답답하게 마음을 좁게 생각하면서 내 생활이나 가정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걸리는 일들이 오죽이나 많겠습니까. 우리가 여기 선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마음으로 하는 일이니까 몸뚱이는 나와도 좋고 안 나와도 좋고 뭐 괜찮지 않냐 이런 말도 하지 말아야 하고, 일할 때에는 말도 그렇고 몸뚱이도 그렇고 그것은 가만히 있어야 돼요.

때에 따라서, 그냥 순간순간 급하게 돌아가면서도 여러분을 만나 주는 이 마음들을 좀 더 생각해 본다면 어떠할까? 좀 지혜를 넓힌다면 어떠할까? 하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둘을 생각하고 셋을 생각하고 넷을 생각하고 백을 생각할 때 얼마나 그것이 유리할까? 여러분을 위해서지 여러분을 위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죠. 누구나가 목탁이나 쳐 주고 염불이나 해 주고 얼굴이나 봐 주고 말이나 조금 해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나도 편안하겠죠.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을 알지 못하고,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그걸 알 텐데 그걸 모르고 좁게 생각한다면 아니 됩니다. 그래서 또 스님네들, 보살님들, 보살행 하는 분들도 여러 분 계시면서 처음에 오시는 분들을 인도해 가면서, 그러한 문제들을 커버해 가면서 한마음으로 갈 수 있는 그 마음이 있다면 오죽이나 아쉽지 않고 좋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내가 항상 말해서 알고 계시죠. 지금 시대가 바꿔져서 호국 불교나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일을 하려고 해도 몸은 가만히 놔두고도 할 수 있다는 얘기를요. 그러면 지금 시점에서 봐서 어떠한 것이 제일 문제일까요? 그걸로 말미암아 ‘저 스님은 뭐를 하길래 그러나?’ 하고 의정을 가지고 한번 관(觀)해 볼 수 있는 거죠. 그 마음을 안으로 굴려 봐야지 이게 이렇고 저게 이렇고…, 돌아오면은 더 커질 수가 없습니다. 한 발을 한 번 뛰어넘을 수가 없이 거기에서 멈춰지는 그런 경향이 있으니 참지혜를 넓히도록 하시기를 바라고요.

예전에 얘기했듯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그 마음과 모습과 이 뜻이, 장소와 모든 것이 전달이 돼서 지구가 생겼고 이 땅에서 나는 모든 것에 의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지난번에 지수화풍 네 친구가 동업을 해서 회사와 같이 형성을 해 가지고 그걸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쪽쪽이 나누다 보니까는 대천세계(大千世界)니 중천세계(中千世界)니 소천세계(小千世界)니 이런 문제가 나왔고, 오늘날에 수많은 별들과 수많은 행성이 생겼고 은하계가 생겼고 또 우주라는 이름이 생겼고 지구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지구의 모든 형태나 모든 작동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지난번에 삼각원형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만 원자력으로써 돌아갈 때는 무전자력, 즉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떠한 생명의 근원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무전자력과 전자력, 또는 유전자력 그것이 한데 합쳐지니까 원자력으로 통하게 돼 있죠. 그래서 그 원자력에서 나가는 그 자체로 인간이 형성된 거와 같이, 좀 다르지마는 말을 하자면 그와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원자력에서 그 힘으로써 작동하는 데는 삼 단계가 있다, 인간에게도 있고…. 우린 그 원자력에서 나오는 작동하는 분비물에 지나지 않는다. 분비물에 지나지 않는 그 물이, 액체가, 찬물의 액체나 더운 가스의 액체가 한데 어우러져서 나올 때는 1키로에 한 점 빠지는 그런 거리마다 이렇게 사이가 벌어져 있으면서 자동적으로 벌어졌다 오므라졌다 합니다. 이 지구 자체의 그 내막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저절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지금 차가 돌아가는데 차 안에 그냥 서 있듯이,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밑으로는 지금 돌아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지금, 시간과 공간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빠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지금 가만히 앉았어도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우리 인간은 도대체 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것이 내고 들이고 내고 들이고 하는 까닭에 이 지금 땅에서나 물에서나 지진이 일어나고 또는 파워가 일어나고 가스가 일어나고, 즉 말하자면 화산이 일어나죠. 이러는 문제가 일어나는 것 중에 거기에서 그렇게 나지 않는다면, 돌아가면서 그게 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언급되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디에서부터 그렇게 생겼는가를 얘기해 봅시다. 바로 그 분비물입니다. 그 분비물에서 물과 흙이 조화가 되지 않는다면 생명이란 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뛰어넘읍시다, 그전에도 얘기했으니까. 그 생물에서부터 억겁을 거쳐서 넘어온 걸 뛰어넘어서 말입니다.

아까 얘기했죠? 원자력으로 그렇게 돌아온 얘기. 그런데 거기에는 또 해 줄 받침이 있다 이겁니다. 촉각, 지각, 시각, 미각 또는 청각, 감각이 전부 거기에 뒷받침이 돼 줘야 된단 말입니다. 그 뒷받침이 돼 줌으로써 어떻게 활용을 할 수 있는 작동을 하느냐? 줄창 말했죠. 오신통에 관한 건. 천안통, 천이통, 숙명통, 타심통, 신족통, 누진통 여섯 가지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시쳇말로 하자면, 즉 컴퓨터나 탐지기나 책정기나 또는 망원경이나 통신기 또는 영사기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다 첨부된 겁니다. 그래서 열여덟 가지에 관한 건이 첨부돼서 같이 돌아가면서 이것이 활동을 하는 겁니다. 활용을 하는 거죠.

인간에게도 그렇게 주어져 있단 말입니다. 인간에게도 그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아무 생명이 없다고 하지만 지구가 작동을 하고 돌아가는 데 생명이 없으면 어떻게 그렇게 작동을 하고 돌아가느냐는 얘깁니다. 만약에 바람신이 아니라면, 바람이 생명이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불고 돌아가느냐 이겁니다. 흙도 생명이 있고 흙신이 있고, 목신이 있고, 바람신이 있고, 불신이 있고, 모두 신이야. 인간들도 다 각종 신이란 말입니다, 자신(自神). 그런데 다 자신인데 차원에 따라서 자신이 악신이냐, 귀신이냐, 선신이냐, 선신도 악신도 아닌 부처냐. 이게 문제인 것입니다.

참 묘한 거는 우리가 이 미생물이 되기 이전에도 우린 그때도 거기 있었다는 얘깁니다. 우린 그때도 그렇게 작동을 하고 있었다 이겁니다. 지구가 생기기 이전에도 우리는 작동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비교를 해서 얘길 하는데 끝없는 전자의 작동이, 그 장소가 다른 게 아니라 오늘의 장소고 오늘의 모습이고 끝없는 그 진리가 오늘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교를 할 때에 자식을 낳았는데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다. 부모의 얼굴 생긴 거, 성격 같은 모든 거를 다 자식이 알아요. 알고 있다고요. 어떻게 하고 지내는 거를 알고 있죠. 그래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다 알고 있다 이겁니다. 자식이 하는 일도 또 다 알고 있고, 그 자식이 부모가 하는 일도 또 다 알고 있어요. 상세히는 몰라도 항상 안에 있던 게 겉으로 나오게 돼 있거든. 숨길 수는 없어요.

속에서 불화가 나면 욕을 한마디 해 대니까 그것도 알게 된 거다 이겁니다. 네 속을 알고 있는 겁니다, 다. 또 한마디 따뜻하게 해 주는 것도 그 속을 알 수 있는 거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속 다르고 겉 다른 사람도 있거든. 그러나 겉 다르고 속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을 고쳐서 그렇게 하지 말고, 말이 차마 안 나오걸랑 안으로 굴리고서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좋다. 얼굴 표정을 좋게 해라. 참, 종교라든가 심리학자라든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천체물리학이라고 말할 거는 없지마는 우리 하나하나 살아나가는 데도 과학적인 문제가 거론되지 않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연방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됩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되고, 모습과 모습으로 전달이 되고, 물건과 물건으로 전달이 돼요. 예를 들어서 옛날 원시 시절에 만약에 그릇이 없어서 뭘 끓여 먹지 못했다 할 때 어딘가가 마음에서 이걸 이렇게라도 해 보자 해서, 흙을 개서 뚱그렇게 해서 말려서 불에다 놓으니까 그것이 익었다 했을 때, 그 사람은 그걸 몰라서 그렇게 해서 거기다 끓여 먹었는데, 그 사람이 없어지고 그 그릇이 부서졌어도 부서진 그 쪼가리는 있었더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먹는 야쿠르트나 뭐, 이런 것도 그렇고 그냥 먹습니다. 석유로도 그릇을 만들어서 쓰고, 수많은 일들이 그렇게 발전이 된 것이 어디에서 비롯됐느냐는 얘깁니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에서 발전을 했고 흙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꼭 흙에서 와서 흙으로 발전이 되고 흙으로 가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선 천만 가지 만만 가지가 다양하게 나왔습니다. 보석도, 모든 게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나의 원형을 이룬 이 원자력의 한 점의 마음에서 그 큰 성을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게 허망하다, 이 몸뚱이는 허망하다 그러죠? 그런데 그 몸뚱이는 없어졌어도, 만약에 이 물건을 하나 해 놨다 합시다. 그런데 이게 몇천 년이 가면 없어진다고 합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자라 가면서 이걸 보고 바탕을 삼아서 바로 연구를 하고 또 개발을 해내고 그러니까 이것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겁니다. 이게 없어진 게 아닙니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거를 벌써 마음으로, 벌써 눈으로 오관을 통해서 보고 자기가 물건을 만들면서 딴 물건을 만들면서 바로 진화시키면서 자기는 발전하면서 자기 마음으로 벌써 받아들였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왜 죽은 겁니까? 산 겁니다. 이 물질은 남이 볼 땐 이것이 망그러지고 다 없어졌지만, 목이 떨어지고 쪽이 다 떨어졌지만 그것은 바로 마음으로 마음을 전달해서 벌써 그건 발전이 돼서 딴 걸로 생산이 된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도 죽는다, 몸뚱이 이건 다 늙어 빠졌으니 허무하다 이러죠. 그러나 허무하다는 생각은 마세요. 이것이 없어진다고 해도 마음과 마음으로 벌써 전달을 한 겁니다. 모습도 전달을 했고 마음도 전달을 했습니다. 그래 놓고 자기는 옷을 싹 벗고선 전달이 된 자기의 생산처로 또 준비를 한 거니까요. 그렇게 가고 오고 한 찰나에 가고 오는데 무엇을 죽었다고 하고 무엇을 살았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걸 왜 얘기 안 해 주고 이런 말을 하냐고 하겠지만 세상을 밝게 보십시오. 귀를 열고 눈으로 밝게 보신다면 이 세상 돌아가는 이 자체가 바로 팔만대장경이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 그 시절의 방편을 써서 말씀하신 그 언어가 오늘날 시절이 바뀌어서 지금 젊은 사람들한테 시체(時體)의 언어로 말을 해 줘야 알아들을 만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도 잘 모르지만 그렇게 좀 더 애를 쓰고 하는 거죠. 나도 지금 시대의 사람이니까.

그런데도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보다 또 나이를 먹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이가 들었어도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년 만년 수억년이 간다 하더라도 죽지 않는다. 이 모습은 작동하는 대로, 시공간이 없이 돌아가는 이 작동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이 몸은 늙는다. 이 몸은 늙으나 육신은 벗어 버리고 다시 갈아입으면 될 것이고, 언제나 죽는다 산다 하는 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까 얘기했듯 그렇게만 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됐고, 벌써 이거를 보고서 이거보다 저게 좀 낫겠다 해서 저걸로 발전을 해서 바로 다른 걸로 생산이 됐고 발전이 됐어요.

그리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느 절이나 어느 곳에 믿음을 가진 데나 또는 위대한 사람을 사람의 모습으로 해 놨지 다른 걸로 해 놓지 않았죠? 요거 한마디만 하고 끝내렵니다. 그리고 내일 그거는 이어서 하고요. 글쎄 사람도 이런 게 있죠. 아까도 얘기했듯이 죽은 사람, 보이지 않는 데의 마음도 그렇지만 보이는 데 마음도, 사람이 악하냐 선하냐에 따라서 무엇을 맡겨도, 악한 사람한테 맡겨지면 아주 고통스러울 거고 선한 사람에게 맡겨지면 좀 유할 테고 이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아서 악한 대로 돌아가고, 자기가 짓고 자기가 한 선한 일은 자기가 한 것만치, 자기가 하는 것대로 끼리끼리 이렇게 맞상대가 되고 모이게 되고 거론이 되고 전달이 되고 이러니 그걸 가지고 업보다, 업보다 하는 겁니다. 유전이다, 업보다, 인과응보다 이런 문제가 돌아가는 겁니다.

저는요, 예전에 이런 걸 봤어요. 아주 가난한 어느 여인이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죽었습니다. 아주 가난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어도 그렇게 마음이 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한테 요만큼도 생명에 언짢음을 주려고 하지 않고, 남의 거를 거저먹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것 그대로 가지고 갔기 때문에 그만 죽어 버리기까지 했죠. 그래서 저는요,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 데 사람이라고 합시다. 또 보이는 사람이라고 그래도 좋습니다. 그 사람을 저는 항상 믿고 열쇠를 맡기고 일을 하게 했습니다. 조금도 깔축은 없는데 융통성이 조금 없어, 좀 더 지혜가 있고 그러면은 좋을 걸. 이런 게 조금 아쉽긴 해도 너무나 착하니까, 우주의 법망에 어디든지 통과가 안 되는 게 없거든. 아까도 얘기했듯이 그게 전부 있기 때문에.

아까 단계 단계 얘기했죠? 원자력으로부터 전자력 또는 그 무전자로부터 무전력, 이게 한데 있었는가 하면 지각이나 촉각이나 이런 문제를 얘기했고 그다음 또 우리가 탐지기나 천안통, 이런 얘기를 했죠? 그래 단계 단계 단계, 이것이 인간에게도 다 주어져 있고 이 지구에도 주어져 있고 어떠한 물체에도 주어져 있습니다. 어떠한 별성에도 그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통신이 되는 겁니다. 천체 통신이 가능하죠.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그렇게 착한 사람은 어디서 돌보든지 돌봐.

그러니까 공부를 하는 분들은 누가 어떠한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그건 보지 말라 이겁니다. 지금 나 가기도 바쁜데 왜 거길 보느냐 이거야. 왜 거길 봐? 그거부터 배워야지, 만약에 그거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이건 만날 작은 그릇에 엎드러져서 그 그릇에서 만날 헤어나질 못해! 그게 습이거든. 그래서 잘못되는 거를 그대로 “보지 마라” 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보면서 보지 말고 안에다 놔 버려라”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잘못된 물건은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물건을 생산을 해서 내도록 자비를 가져라 이 소립니다. 허허허. 물건이 잘못되고 녹이 슬었으면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좀 더 좋게 해서 내면은 좋을 거 아니냐. 언젠가는 그렇게 거기다 넣으면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오게 될 수 있는 그 기간이 있을 거다 이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걸 참지 못해서 이거는 ‘이 접시의 쪽이 떨어졌어!’ 이럭하면서 말을 하게 된다 이겁니다. 쪽이 떨어졌으면 쪽이 안 떨어지게 용광로에 넣어라.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금 쪽이 안 떨어진 것이 나오도록만 용광로에 넣고, 말로 하지 말라 이거야. 왜, 지금 내가 바빠서 죽겠어, 응! 지금 다시 자꾸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생산을 해내야 될 텐데, 생산하는 거는 나중이라도 자꾸 넣어야 될 텐데, 그러면, 스스로 넣게 되면, 스스로 용광로에서 새로 또 발견이 되면 ‘아, 그때는 그렇더니 새로이 이게 나오는구나!’ 하고 또 달리 보일 때가 있고 달리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겁니다. 물건이 다르니까, 달라졌으니까. 그러니까 고정되지 않다는 얘깁니다. 고정되게만 보지 말라.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달라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행을 하고 고정된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한 가지를 보고 고정되게 말을 집어 낼 수 있느냐. 내일 다르고 모레 다르고 일 년 후에 다르고 몇 달 후에 달라질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그러나 고질 병자들은, 고질병이라는 거는 그 습을 놓지 못한다면 고질병이다 이겁니다. 오늘은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6월 21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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