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문화진흥원 학술대회... S.R.바트 인도철학회 의장

주제 : 한국불교 사상과 문화-가야불교를 중심으로

가야문화진흥원, 동명대 인도문화연구소, 한국인도학회는 525일 가야대학교 대강당 국제회의실에서 가야불교의 전래과정과 인도를 주제로 가야문화의 원형탐색과 콘텐츠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한반도 불교 전래의 루트로 바닷길을 주목하는 논문들이 발표됐다. 또한 저명 학자인 S.R.바트 인도철학회 의장이 기조강연을 진행했다.

 

한국-인도 교류 고대부터 바탕
인도인 허왕옥과 김수로 혼례는
해양루트 통한 불교 전래 증거
공식 인정보다 이른 시기 전파

바트(S. R. Bhatt) 교수는… 현재 인도철학회 의장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인도 철학연구위원회 의장 및 델리대학교 철학과 학과장을 역임했다. 그의 명저인 '불교인식론'은 한국에도 번역·소개됐다.

아시아 전반과 특히 한국에서 불교의 도입, 동화, 흡수 및 전승은 진지한 문화적 연구가 요구되는 놀랍고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양국이 지금처럼 물질적 재화를 거래 했을 뿐 아니라 인간과 보편적 타당함을 위해 다르마(Dharma)를 공유했습니다. 양국의 문화적 유대 관계를 심층적으로 검토하고 더 깊이 고무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인도와 한국의 문화적 접촉은 고대부터 있었고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고대 교류에 대한 증거가 많지 않습니다. 불교에 대한 초기 흔적이 있지만 조사가 필요합니다. 고대 역사서술은 말로 시작해 신화와 전설로 확고해지는 구전으로 전하는 전통이 유행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 진실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화로만 치부해 믿을 수 없다고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신화의 진실성에 대해 논의할 때 신뢰할 만한 증거와 자료가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불교 도입과 전파는 신비한 장막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명확한 역사적 기록이 부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불교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바닷길을 따라서 전해졌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보다 좀 더 일찍 한국에 전해졌다는 점은 주목해야 합니다.

 

허왕후의 유전적 후손들

고려의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삼국편, 34)>에 인도 불교의 중심지였던 아요디아에서 온 인도 공주가 김수로왕(42~199)과 결혼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왕후 허황옥이었습니다. 그녀는 바다를 통해 한국에 와서 부처상과 물품을 가지고 가야왕국의 수도 김해에 있던 호계사에 석탑을 세웠습니다. 이후 기원후 452년 이 사원은 칠지왕(King Chilji)에 의해서 보수되었습니다. 공주는 불교경전을 가지고 왔다고 적혀있습니다.

결혼에 관한 신화 및 전설은 역사성을 기초로 한 진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설화와 민요 그리고 기타 문학적 증거들이 문화유산의 일부로 수집되어야하고 부족한 증거는 현대 과학기술들을 통해 발견된 사실들과 유전적 검사 및 계보 등을 통해 좀 더 보완될 수 있습니다.

허 왕후의 자손이고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의 이야기는 한국에 역사로 인정돼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허 왕후의 후손들이 700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그리고 인천 이씨들은 한국에서 친척입니다. 최근에는 한국인과 학자들이 오래된 유대를 발견하는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주목할 만한 노력입니다.

1954년에 이미 유전적인 친인척 관계를 돌아보고 확인하기 위해 현동화씨가 인도에 왔었고 그는 인도-한국 관계의 개척가였습니다. 김해 김씨 종친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가 인도에 와서 기념비 건립을 제안하였습니다. 2000년에 허 왕후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한국에서 특별하게 가져온 거대한 비석과 함께 한국 스타일로 세워졌습니다. 그곳은 한국인의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2001년 가락 종친회의 김정준 회장이 방문하였습니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아요디야를 방문하였고 또한 인도인들도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쌍카라나라얀 (Sankaranarayan) 교수는 기원후 1세기에 김수로가 가야 왕조를 건국하였고 김수로왕과 허 왕후의 혼례를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한국-인도 교류, 언어학적 증거

불교가 기원전 1세기 또는 이른 시기에 바닷길을 통해 직접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것은 바른 관점입니다. 한국에서 베다의 신앙을 실천하는 인도인 정착민에 대한 증거들도 있습니다. 고대 한국에서 환인 또는 천인을 숭배하는 것은 베다신 인드라(Indra)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불의 신을 대표하는 산스크리트어 아그니(Agni)’와 한국어 아궁이의 어원적 유사성을 주목해주세요. 불을 숭배하는 방식도 역시 두 국가 모두 비슷하였습니다. 또한 카스트제도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도 음악의 유입과 ‘Natya Sastra’의 기원과 한국에서 영산회상기원의 공통점을 제안한 바라타(Bharata)의 주장도 있습니다. 저명한 학자인 노기영 교수는 글 한국에서 불교와 민족문화에서 서울의 어원은 빨리어인 ‘Savatthi’에서 소라보(So-Ra-Bo)’로 형태가 변화된 것이라고 주장 합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공식적으로 기원후 372년 한국에 소개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신라는 기원후 527년에 공식적으로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비공개적으로 보다 일찍 한국에 전래되었습니다. 왕실이 수용하는 것이 대중이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시기는 아닙니다. 한국에서 불교가 번창하면서 중국이 중요한 역할을 했었지만 그보다 앞서 초기에 인도와 한국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526년 겸익 스님은 인도에 5년 동안 머물면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고 인도 승려와 함께 돌아갔습니다. 불교를 배우기 위해서 인도를 방문한 몇몇의 승려들도 있었습니다. 6세기, 특히 아쇼카 통치시기에 인도에서 가져온 철기와 물건들과 함께 불상들과 수도원들이 한국에 세워졌습니다.

 

불교 전래 속 불교 위상

불교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어떻게 전래되었는지 언급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서기 522, 고대 한국의 남서쪽에 있었던 백제왕의 명령을 받아 불교가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백제왕은 일본 왕에게 사절단을 보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종교(Dharma)는 모든 가르침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 하지만 중국의 현자들조차 통달하고 이해하기 힘들다. 만약 깨달음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다면(Bodhi), 이것은 측정 할 수 없는 축복과 열매들을(믿는 이들에게) 가져다준다. 더 나아가, 이 종교는 인도로부터 한국에 왔고 양 국가의 대중들은 지금 불교의 가르침을 열렬히 따르고 있다.”(Masaharu Anesaki, <일본종교사>, 53)

위의 글은 인도에서 한국으로 불교가 전해졌고 불교가 한국에서 아주 높게 이미 숭배되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인도불교의 철학적 영향

한국에서 불교는 국가를 보호하는 종교로 여겨졌습니다. 불교는 모든 왕조들에서 왕실의 후원을 받았고 한국의 지배자들에게 사회-정치적 틀을 제공하였습니다. 불교는 많은 지배자들에 의해서 국가 종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국가가 부처님의 땅이라는 점을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영향과 특히 보살(Bodhisattva)의 이념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애국적이고 이타적 봉사를 하게끔 동기 부여를 하였습니다. 화랑이라고 알려진 젊은 엘리트 그룹은 보살 이념에 고무되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원광 스님이 그들을 지도하였습니다. 까르마(karma), 니르바나(nirvana) 등 불교교리는 한국인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한국의 불교 사상가 가운데 원효와 지눌을 특별히 언급할 만합니다. 원효는 실재와 삶의 접근을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조화로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원광의 글들에 영감을 받았고 원광의 세속적 판 카시랄(Secular Pancasila)’의 지지자였습니다.

원효는 정신적 상징으로 널리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82권의 책을 저술 하였으며, 그 중 대부분은 대승 경전에 대한 논평이었습니다. 그는 평화와 통합의 지지자였습니다. 모든 곳에서 조화로운 통합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노기영 교수는 원효의 깊은 이해를 표현하며 그는 인도의 불교가 씨앗으로 파종된 이후 한국 토양에서 자란 훌륭한 과일이다. 물질적 이기심으로 어두운 이 시대를 밝히기 위해 그런 희망의 씨앗이 다시 자라고 번창하기를 소망한다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과 같은 이런 접촉과 연구는 매우 유용하다는 점을 반드시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전통문화들은 서구의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멸종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리나 우리는 그런 위험에 도전해야 할 공동의 기반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화 간 상호 교류의 강화는 상호 이해·공감과 상호 발전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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