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믿음 편 19

붓다의 가르침을 신앙하는 이들을 가리켜 흔히 ‘불자’라고 한다. 처음 불교를 접했을 때 불자는 불교인을 가리키기 때문에 당연히 부처 불(佛)에 놈 자(者) 자를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붓다의 자식이라는 의미로 아들 자(子) 자를 쓴다는 걸 알고서 조금 의아했다. 왜 불교인이 아니라 붓다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초기경전인 〈디가 니까야〉 제3품 27번의 이름은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이다. 여기에는 바라문 출신으로 붓다의 제자가 된 사문들의 아픔이 소개되어 있다. 어떻게 최고의 계급인 바라문이 크샤트리아 출신의 붓다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느냐는 비난이 그들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향한 열정과 붓다의 인격에 매료되어 출가했지만, 자신들을 향한 바라문들의 비난에 못내 힘겨워했다.

붓다가 활동했던 당시 인도는 엄격한 계급사회였다. 바라문들은 신의 입에서 나온 적자이기 때문에 신의 팔이나 다리, 발에서 나온 계급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절대원칙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문화를 담당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그들뿐이었다. 그런데 크샤트리아 출신의 붓다가 진리를 깨닫고 바라문들이 그의 제자가 되어 정신문화를 전수받았으니, 그들 스스로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오랫동안 독점했던 영역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그들은 불편한 심기를 참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환히 알고 있던 붓다는 바라문 제자를 불러 따뜻하게 위로하고 사람의 귀천은 출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있음을 강조한다. 붓다에 의하면 사람의 귀천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진리대로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하면서 진리대로 살면 수드라도 귀한 존재이며, 악한 행위를 하면 아무리 바라문이라 하더라도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인간존중과 평등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당시 출가한 사문들은 계급과 가문, 성씨 등 모든 배경이 달랐다. 그러나 출가한 순간 그러한 배경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사람 그 자체만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하였다.

“나는 사문 석가의 아들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불자로서 당당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한 이들은 정신적으로 모두 그의 아들과 딸이 된다. 성(姓)도 이 씨(氏)나 박 씨가 아니라 모두 석(釋) 씨가 된다. 부모님께서 주신 내 이름은 이창구지만, 불교에 귀의하여 계를 받은 사람으로서 나는 석일야(釋一也)가 된다.

그런데 아들과 딸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닮기 마련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DNA가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문 석가의 자녀로서 정신적 DNA는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성(佛性)이 바로 그것이다. 붓다의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님(佛)의 성품(性)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불성을 잘 가꾸어 바르게 성장하면 붓다와 같은 부모가 될 수 있다. 즉, 중생이 열심히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붓다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를 신앙하는 이들을 불교인이 아니라 붓다의 아들, 딸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붓다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불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돈이나 출신이 아니라 법, 즉 진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붓다도 세속적 권위에 무릎을 꿇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지향하는 진리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곧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닮아가는 신앙인의 삶이다. 불자라고 하면서 진리의 상속자가 아니라 돈이나 권력의 상속자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태어나면서 흙수저, 금수저 등으로 신분이 결정되는 오늘날 ‘나는 사문 석가의 아들이다’라는 외침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 안에 차별이 아닌 평등과 인간존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불자로서 부끄러운 아들, 딸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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