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 가르침, 한반도로 이어지다

중국 강서성 공주 보화사 대각전의 모습. 안에 서당지장의 사리탑이 봉안돼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禪) 전래자는 7세기 신라 진덕왕대(647~653 재위) 법랑(法郞)이다. 최치원이 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의하면, “법랑이 중국으로 건너가 4조 도신(580~651)의 법을 이어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선이 크게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은 신라 말 고려 초에 해당한다. 이때 아홉 산에 산문(山門)이 개산되었다고 하여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홉 산문 가운데 일곱 산문이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의 법손이다.

즉, 마조의 수제자 가운데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받은 제자는 도의·홍척·혜철이다. 도의(道義)국사가 개산한 산문은 가지산문으로 현 조계종의 종조에 해당한다. 홍척(洪陟)은 실상산문(남원 실상사), 혜철(惠哲)은 동리산문(곡성 태안사)이다.

또한 마조의 제자인 염관 제안의 법을 받은 범일은 사굴산문(강원도 강릉), 마곡 보철의 법을 받은 무염은 성주산문(충남 보령), 남전 보원의 법을 받은 도윤은 사자산문(강원도 사자산 법흥사), 장경 회휘의 법을 받은 현욱은 봉림산문(경남 창원)을 개산했다. 또한 마조계 가운데 쌍계산문을 개산한 진감 혜소(774~850)도 마조의 제자인 창주 신감(滄州神鑑)의 법을 받아왔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산문 가운데 중요한 위치에 점하는 세 산문인 가지산문·실상산문·동리산문의 스승이 서당이다. 먼저 스승 마조와 서당을 포함한 제자들의 일화를 보자.

어느 날 서당·백장·남전이 마조와 함께 달맞이를 갔다. 그 자리에서 마조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바로 지금 같은 때에 무엇을 하면 가장 좋겠는가?”

서당지장이 말했다. “공양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이에 백장회해는 “수행하기에 가장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남전만 소매를 뿌리치면서 그냥 가버렸다.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경(經)은 서당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백장에게로 돌아가는데, 오직 남전만이 경계에서 벗어났구나.” -<경덕전등록> 中

앞의 내용은 ‘마조완월(馬祖玩月)’이라고 하는 공안이다. 이 공안을 세밀히 보면, 세 선사 가운데 남전 선사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남전은 조주 종심(趙州從?, 778~897)의 스승이다. 후세에 무자(無字), 끽다거(喫茶去) 공안으로 유명한 조주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면서 스승인 남전이 부각되었다. 또한 남전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공안을 내세운 장사 경잠의 스승이기도 하다.

보화사 대각전의 옥석탑. 서당지장의 사리탑이다.

한편 선종사에서 청규(淸規)를 제정한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는 제자 황벽(黃檗, ?~850)에 이어 임제(臨濟, ?~867)가 배출되면서 선종사에 백장이 부각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서당의 활약과 법력이 축소된 감이 있다.

하지만 서당은 마조 문하를 대표하는 수제자로, 근자에 서당에 관한 연구가 학계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어찌되었든 서당은 우리나라 산문과 밀접한 법연(法緣)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당지장은 강서성(江西省) 남강부 출신으로 8세에 출가, 13세 때 임천(臨川) 서리산(西裏山)에서 마조를 시봉하였고, 7년 뒤에 스승으로부터 법을 받았다. 서당은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하였다. 서당은 마조가 처음 개당(開堂) 설법할 무렵(35세 복건성 성적사)의 제자이니, 마조 문하 가운데 장손 격에 해당한다.

하루는 마조가 서당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찌하여 경을 보지 않는가?”
“경에 뭐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어찌되었든 자네가 뒷날 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할걸세.”
“저 자신도 제 병을 치료하기 어려운데, 감히 남을 위하라고 하십니까?”
“말년에 자네의 선풍이 반드시 세상에 흥기할 것이다.”

마조는 강서성 건주(?州) 공공산(?共山) 보화사(寶華寺)에서 법을 펼쳤다. 이때, 군수 배공(裵公)의 귀의를 받아 마조 교단이 크게 번창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마조는 보화사에서 홍주(洪州, 현 남창) 개원사(開元寺 현 우민사)로 옮겨갔다. 마조가 개원사로 옮겨간 뒤에도 서당은 보화사에 남아 법을 펼쳤다. 이때 서당의 가르침을 따라 대중이 운집하는 것이 마치 마조가 살았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당시 태수(太守) 이공주(李公舟)는 <공주부지(?州府志)>에 “서당은 천하에 유명한 사람이었다. 서당이 마조를 정성스럽게 섬기는 것이 마치 안회가 공자를 섬기는 것처럼 극진한 제자였다”고 평하였다. 공공산 보화사는 마조의 전법도량이기도 하지만, 서당의 개당 설법 도량이기도 하다.

서당은 보화사를 떠나지 않고 줄곧 이곳에서 머물며 법을 펴다가 80세에 입적하였다. 당나라 헌종이 ‘대선교(大宣敎)’라고 하사했으며, 8년 후 목종이 다시 호를 ‘대각(大覺)’, 탑 이름을 대보광(大寶光)이라 하사하였다. 또한 ‘옥석탑(玉石塔)’이라고도 불린다. 서당과 제자들의 기연을 보기로 하자.

서당의 한 제자가 죽어서 화장을 해 마쳤다. 어느 날, 죽은 제자가 서당에게 나타나 말했다.

“스님, 부디 제 목숨을 다시 찾아 주십시오.”

서당이 말했다. “그대는 진정 죽은 자인가?, 산 자인가?”

죽은 제자가 “저는 죽은 자입니다”라고 답했다.

“이미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목숨을 찾고자 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서당이 답하자 죽은 제자는 다시는 서당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몇 가지 일화를 더 살펴보자.

제공(制空)이라는 승려가 서당에게 말했다. “해가 너무 일찍 뜨네요.” 서당 설하길 “바로 이때일세(正是時)!”

유학자인 이고( 774~836)가 찾아와 서당에게 물었다. “스님은 마조대사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받으셨습니까.”

“이고야! 이게 바로 북과 피리가 서로 상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네.”

세 번째 내용은 ‘서당고각(西堂鼓角)’이라는 공안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도의국사와 서당과의 기연(機緣)을 보기로 하자. 서당이 홍주 개원사에 머물 때이다. 도의가 당나라에 들어가 행각을 하다 개원사에 입문했다. 도의가 서당의 수행 지도를 받고 있던 차, 어느 날 서당이 도의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와 인연이 된 것은 돌더미에서 아름다운 옥(玉)을 얻어 조개 가운데서 진주를 줍는 것과 같도다.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

2008년 중국 우민사서 열린 ‘도의국사 구법기념비’ 제막식 모습.

도의는 서당에게 깨달음의 인가를 받고, 명적(明寂)에서 도의(道義)라는 호를 받았다. 이렇게 도의 국사가 강서성 남창 개원사에서 서당에게 법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나라 조계종 총무원에서 2008년, 이곳에 ‘도의국사 구법기념비’를 세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당은 마조계에서 백장이나 남전에 비해 축소된 감이 있지만, 서당은 마조계의 장손으로 마조의 선풍을 드날린 일인자이다. 당시 중앙에 진출한 마조의 제자들 중 일부는 북쪽(당대의 수도 장안)에서 활동했고, 서당은 남쪽(강서성)에서 선풍을 전개했다. 마조선에 있어 ‘남쪽과 북쪽의 대립’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장안에 진출한 제자들을 북쪽이라고 지칭했다면, 남쪽의 대표 선사를 서당으로 보았다.

또한 당나라 때, 사천성 혜의정사(慧義精舍, 현 금천사) 남선원(南禪院) 조사당 안에 무상(無相)·무주(無住)·마조·서당의 진영을 모셔 놓고 공양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즉 신라 왕자 출신 무상과 무주(둘은 스승과 제자), 마조와 서당의 네 진영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는 기록이다.

이는 851년에 시인 이상은(李商隱, 812~858)이 쓴 ‘당재주혜의정사남선원사증당비(唐梓州慧義精舍南禪院四證堂碑)’의 기록이다. 여기서 무상 대사는 신라 때 왕자출신인데, 중국에서 모시는 오백나한 가운데 455번째 나한으로 모셔져 있으며, 당시 정중종(淨衆宗)의 개조(開祖)로서 초기 선종사에 입지가 매우 큰 분이다. 또한 무상 대사와 마조를 스승과 제자라고 종밀(圭峰宗密, 780~841)이 주장한 이래 즉금에까지 연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서당은 선종사에서의 위치는 물론이요, 한국불교사와 밀접한 선사이다. 서당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새로이 연구하고 정립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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