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향기 에너지는 상대까지도 다 밝아지게 합니다

사계절이 있으면서 나날이 화창하게 햇볕만 나는 것도 아니고 구름도 끼고 비도 오고 눈도 오고 춥기도 하고 바람도 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계절을 지낼 때에 우리는 모두 그런 역경을 겪으면서 돌아가야만 하는 인생살이입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설법하는 것도 여러분에 의해서 때에 따라서는 하치 못하게, 때에 따라서는 귀중하게, 때에 따라서는 ‘그 별것도 아닌데….’ 할 수 있으리만큼 이렇게 그대로 말이 나가는 것입니다.

망상이 없다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으니
망상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녹이라는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 배우려고 하고 글로 배우려는 생각은 하지 마시고 항상 자기 공한 주인공, 즉 말하자면 자기 몸이 공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리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공했기 때문에 세상도 공했듯이 전체가 공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모든 것을,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가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쑥 빼 놓으시고 항상 놓는 습을 가지십시오.

그 놓는 것을 본다면, 엊그저께도 그랬고 항상 말을 하고 나가지마는, 그렇게 많은 나날을, 나날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억겁 년을 거쳐 오면서, ‘년’ 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억겁을 거쳐 오면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등장을 했습니다. 그럼 사람으로서 이렇게 형성된 지금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억겁을 거쳐 온 그 자체의 습이 지금 현실의 나한테 있는 것입니다, 각자.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시점에서 내가 공한 줄 알고, 공한 데서 나오는 거 바로 공한 나 자체가 화두인 줄 알고 거기다가 모든 것을 놓는다면, 진심으로 맡겨 놓을 수 있다면 거기에서는 자기 자신의 일체 생동력 있는 생수 물이 자기에게 맛을 보일 수 있고 상봉할 수 있겠지마는, 우리가 배우려고 한다거나, 경이 자기를 보고 자기가 경을 보고 학으로다가, 말로다가, 이론으로다가 이렇게 배우려고 한다면 우리는 백네 날이 가도 공부는 못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날이 밝고 아주 화창한데 꽃이 피었다고 합시다. 봄이 돼서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떨어지면 왜 여러분의 마음이 허황되고 또는 쓸쓸해지고 외로워지고 그러겠습니까? 꽃이 핀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면, 꽃이 진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아니요,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좋은 것이겠습니까?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일체 이익이 될 수 있는, 근본에 이익이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꽃이 피는 것도 아니요, 지는 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그 가운데 무엇이…. 나한테 일체 이익하게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일러 보실 수 있다면 일러 보십시오. (잠시 사이) 피는 것도 아니고 지는 것도 아니라면 무엇인가를 일러 보시라는데 여기에서 이 대중이….

우리가 여태 놓는다 안 놓는다는 말 없이, 여여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런 문구 자체를 내 스스로서 함이 없이 이르실 수 없다면 저, 아주 날은 창창하지마는 안개와 아지랑이가 끼어서 앞을 가릴 수밖에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른 거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선지식들은 “이 눈을 봤느냐? 봤으면 일러라!” 하고서 주장자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르지 못했을 때는 “그 참, 날은 어둡구나!” 하고선 그냥, 그렇게 한마디 한마디 읊으시고 내려가고 이러한 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런 걸 떠나서, 우린 근본적으로 말과 그 흉내 내는 거를 떠나서 진실한 나의 참나를 알고자 해서 날이면 날마다 이렇게 오는 겁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뭣고’ 화두나 ‘무(無)’ 자 화두나 ‘시심마(是甚投)’ 화두를 쥐어서 외려 겉두더기를 붙이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것을 들면 드는 대로 벌써 상대방에서 나에게 들게 해 줬으니까 의식적으로 벌써 그걸 알고 있습니다. 또 내가 공해서 없다는데도 불구하고 거기다가 그것을 또 받아서 그것을 들고서 온종일 헤매도, 해는 점점 저물어 가는데 온종일 들고 헤매도 도대체 알 길이 없어서 그만 저녁에 옷을 벗게 되는 그런 이치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어저께도 얘기했듯이 우리 몸이 없으면, 공한 몸이 없으면 또 무효입니다. 더하고 덜함이 없어서 무효니만큼 우리 몸이 있을 때 그 이치를, 부처님이 마음을 전달하신 것을, 그 뜻을 알면 부처님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부터 헤아릴 줄 알아야 부처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몸이 무너지기 전에. 무너지면 더하고 덜함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어저께도 얘기했죠? 무너지면 차원에 따라서 넝마면 넝마로 그대로 있을 거고, 무쇠면 무쇠대로 그대로 있을 거고, 금이면 금대로 그대로 있을 거다 하지마는, 금은 금대로 금이기 때문에 더하고 덜함이 없어도 그대로 여여하고, 여러분이 있는 대로 그 부처도 계시니까요. 그러나 무쇠나 넝마, 이러한 차원에 따라서 더하고 덜함도 없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몸이 있을 때에 공부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몸이 있어야 되는 건데 고정됨이 하나도 없어서…. 아주 없어서 “무” 했던 게 아닙니다. 텅 비어서 빈 게 아니라 꽉 찼기 때문에 비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바로 나투면서…. 나투는 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여기서 이렇게 돼 있다가, 즉 말하자면 몇 해 전에 조그마한 사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랬는데 누가 거기에다가 잘라 버리고 접을 붙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 굵은 거를 접을 붙였더니 그만 그 잔 것이 굵은 걸로 됐습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개발해서 옮기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금방 찰나찰나 옮겨 가는 것입니다. 찰나찰나 옮겨서 화하는 것입니다. 다른 걸로 화하고 다른 걸로 화하고. 만약에 고정되게 물을 한 컵을 가지고 요렇게 옮겨 놨다면 옮겨 놓은 걸로 고정되게 그냥 옮겨지기만 하겠지만, 요 물이 요리로 옮겨질 때는 바로 빈 그릇이 될 수도 있고 더 많은 물품을 담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해지고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툰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옮겨지면서 바꿔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수차적으로 이런 말을 해 드립니다. 우리는 24시간 살면서도 항상 마음이 고정되지 못하고 화해서 돌아간다고요. 금방 어머니 만났을 때 마음, 친구 만났을 때 마음이 달라지고 또 동생 만났을 때 달라지고 이러듯이, 고정되게 옮겨 가는 게 아니라 그렇게 화해서 옮겨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없다 있다 할 수도 없거니와 또는 내세울 것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는 것은 꽉 찼기 때문에, 그렇게 나투고 한시도, 일분일초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한 것이지 없어서 없다고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니 참선이 어떻게 돼서 생활 속에서 그대로 참선인가 하는 걸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화두를 쥐고 좌선을 할 때는 반드시 좌선을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그럴 때는 계율을 지키고, 물론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 상식과 더불어 계율은 스스로 지킬 거지마는, 그렇게 시간을 지켜서 참선을 합니다. 참선을 하면 벌써 ‘참선을 하러 가야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거는 그런 말을 안 해도 생각이 그렇게 듭니다. ‘참선을 다 했으니까 집에 가야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선이 끊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평상시에 일분일초도 떼어 놓지 않는 참선이, 우리 생활 그대로 자고 깨고 똥 싸고 먹고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일 초도 떼 놓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그러한 참선입니다. 그러니 끊어지지 않죠. 그러니 그 도리를 알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돌아가면서도 아는 거 모르는 거 몽땅 바로 내가 믿고 주인공에 일임해서 놓는다면 거기에서 새싹이 나오듯…. 지금 육이 나온 것은 육의 탄생이지 참나의 탄생은 아닙니다. 참나의 탄생을 하려면 그만큼 마음의 근본인 참나가 새싹이 터지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다시금 씨가 여물어서 무르익어야만이 우리가 맛이 난다고 합니다. 그런다면 내 나무에서 무르익은 실과는 온 누리의 모든 여러분이 같이 맛을 볼 수가 있고 같이 먹을 수가 있고 같이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기가 없으면 왜 죽는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바로 그 뜻입니다.

우리가 돈을 내지 않고 사지 않고 이렇게 생명을 유지하니까 아주 값싸게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공생 공용 공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렇게 생명을 유지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절실히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공심으로 공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체로서 이렇게 일체 만물이 생기고 만생이 이렇게 같이 융합해서 조화를 이루고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내가, 나, 내가 줬고, 내가 망했고 또는 내가 가졌고’ 이렇게 생각하니까 항상 그 껍질은 벗어날 수가 없고, 그 습은 벗어날 수가 없고, 그 욕심은 뗄 수가 없고…. 도대체 자기 겁니까? 여러분이 지금 사시는 데에 모든 게, 자기가 관리인밖에는 안 되지, 자기 겁니까? 돌고 도는 것인데! 돈도 자기 것만이 아닙니다. 돌고 도는 거기 때문에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니고 관리인밖에는 안 돼요. 그런데 자기 거라고 하거든요. 자기 거라고 자꾸 독재를 쓰니까 돈이 생각을 할 때 ‘흥! 네 거라고? 좋아하네.’ 그러고선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돈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관리를 잘해 주면 ‘아! 여기 가면 관리를 잘해 줘. 그러니까 내가 가야지.’ 하고서 스스로서 돈이 들어오는 거지, 돈이 달아난 거를 쫓아가고 내 거라고 쫓아간다면 한없이 달아나갑니다. 가난도 붙을 데가 없어서 주인공에다 맡겨서 다 일임해 버린다면 ‘어어, 내가 이거 정말 원수를 갚으려고, 저 속을 썩이려고 이렇게 나왔는데 씻은 듯 부신 듯 하니까 에이, 이거 뭐, 안 되겠어!’ 그러고서는 달리 생각을 하고, 착한 마음과 더불어 자기도 그 뜻을 알고서 착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마음 한뜻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망상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녹이라는 겁니다. 놔서 녹이라는 거지 끊을 게 어디 있습니까? 망상이 없다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으니 망상을 끊는 게 아니라 녹이는 것이고 한마음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부지간에 살면서도 내 마음이 ‘저놈! 조거! 너! 너, 두고 보자. 들어오기만 해 봐라.’ 하고 있어 보십시오. 들어오면 미안한 거를 갖는 게 아니라 엉뚱나가게, “야! 뭐!” 그러고 꽥꽥 악을 쓰고 외려 한술 더 뜹니다. 그러나 한마음으로 굴리고 돌리고 놓고 이렇게 하다 보면 더 싸울 수가 없는 거죠. 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로 본다면, 자기와 같이만 본다면 자비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의리도 나오고 도의도 나오고, 거기에서는 무궁무진하게 자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자비가 향기와 같이 거기까지 풍겨서 에너지와 같이 거기에, 바로 여러분이 공생을 하고 있으니까 공심으로 공용을 하고 있고 공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가고 옴이 없이 그 마음의 향기 에너지는 거기까지도 다 밝아지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 외려 들어오기도 전에 바깥에서는 ‘아, 이거 미안한데….’ 하고서 들어오게 되죠. 그러면서 “여보! 나 참 미안했어.” 하고서 이런 말 한마디를 들을 때 겨울에 고드름이 그냥 녹아서 떨어지듯이 그렇게 녹아 떨어지죠. 그러한 마음이 녹아 떨어질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장본인입니다.

사랑을 주는 거지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도 주기만 하면 언젠가는 받게끔 돼 있으니까요. 내가 해 놓은 거 어디 가겠습니까? 나쁜 일을 해 놨어도 나한테 올 것이고 좋은 일을 해 놨어도 나한테 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랑을 준다면 자비롭게 의리를 도모하고 참, 그렇게 믿는 데에 인내가 있다면, 물러서지 않는다면 모두가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사랑하고 또 화목하게 이렇게 생활이 진행돼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뿐만 아닙니다. 세세생생입니다. 현실에 나쁘고 좋은 게 다 그냥 우리가 죽어서 끊어진다면 별문젠데, 세세생생에 억겁을 거치면서 또 얽히고설키고, 그것이 자기 한 대로 얽히고설킬 테니 그거를 어떻게 끊으렵니까? 물질이라면 아예 단번에 끊어 버리고 말겠는데 물질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그 찔깃찔깃한 인연줄! 그 인연줄은 아무것으로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온 거 마음으로 끊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는다고 생각을 한다면 둘이 되니까 녹인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모든 것을 당신이 한 것이니 당신한테 놓는다면 당신이 해결해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나왔던 자리로 다시 놓는 거죠. 나온 자리에 다시 놓는다면 다시 들어가서 계발이 돼서 하나가 돼 가지고 만법을 응용하게끔, 거기에서는 생동력 있게 계발돼서 나오죠.

이렇게 일러 드려도 내가 모자라는지 여러분이 모자라는지 분간도 못하겠습니다. 내가 모자란다면 모자라는 대로 할 수밖엔 없는 거죠. 여러분이 모자란다면 나도 모자라고 내가 모자란다면 여러분도 모자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더 높고 낮고 이런 게 없습니다. 만약에 높다고 생각한다면 얕고 얕다고 생각한다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오늘 한자리 한 여러분과 저는 똑같이 인간이자, 부처님의 마음으로 전달한 이 뜻을 서로 파악하고 길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 지금 한 발 한 발 떼어 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 없는 길을 갈 줄 아는 발 없는 발이 된다면 바로 만법을 응용할 수 있는 손 없는 손이 돼서, 눈 없는 청안이 돼서, 참, 평이마가 돼서 평발로서 아주 일체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드디어 우리는 한자리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꽃 핀 것도 아니요, 진 것도 아니니….” 이 말을 그냥 그대로 넘겨 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를 주판을 놓으면 만 원도 주판을 놓을 수가 있습니다. 만 원 안에, 일체 만물 만생 만법이 만 원 안에 들어 있다면 일 전을 놓고 십 원을 놓고 백 원을 놓고 천 원만 놓을 줄 알아도 그 천 원, 이천 원, 만원까지 다 놓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만 원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니까, 내가 천 원을 쓰든지 만 원을 쓰든지 그 안에서 다 씀씀이도 쓰는 것이고 갖다 놓는 것도 그 안에다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마포 황 부자는 새우젓을 팔았는데 요만한 됫박을 해 놓고 말입니다, 팔아도 갖다가 넣고 또는 새우젓을 받으러 가도 그 안에서 꺼내서 받으러 가고 이랬답니다. 여기에서 아주 도가 틔었어요. 한군데서 들이고 내고 하기를 참 수년, 수십 년을 그렇게 했다는 얘깁니다. 그러자 홀연히 어느 날 그 됫박 속에서, 바로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학교도 짓고 그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새우젓 장사지마는, 사람으로서 등장을 해 가지고 다시 탄생을 해 가지고 이 옷을 벗었으니 세세생생에 거리낌 없이 그것은 대 인가를 받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활보할 것입니다.

우리는 늙으면 “아이, 늙은이가 아무렇게나 살다 죽지, 뭐.” 이러지마는 늙은이가 더 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인네들은 천타불 만타불 해야 되겠고…. 천타불 만타불 하는 것은, 얼마나 능통해서 그 어떤 노인께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거는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방편으로써 보살이 한 행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초월돼서 우리는 공했으니까 천타불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타불 해도 천타불이요, 천타불 해도 만타불이요, 그러면 “하나!” 해도 천타불이 될 수 있고 “하나!” 해도 만타불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를 우리 말해 봅시다. 왜 붙을 자리가 없다 하나? ‘공해서 붙을 자리가 없다’ 하는 것을…. 비행기가 말입니다, 앞에 그 뭡니까? 그거 이름이? 그 돌아가는 거.

대중 가운데서 : 프로펠러.

큰스님 : 프로펠러. 그것이 막 공중에서 돌아갈 때 말입니다, 거기 그냥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그냥 이게 보이질 않습니다. 그게 돌아가는 게 보이지 않을 때에 먼지 붙을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갔다가 머물렀다가, 이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거와 같은 것이 이 세상 진립니다. 그렇게 쉬지 않고 이렇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너무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보이길 하나요? 분명코 있기는 있는데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걸 가지고 무전자라고 할 수도 있는 거죠. 분명코 있긴 있는데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서 조금 빠져나온 것은 유전자라고 하죠. 그것은 보이긴 보이나 아주 찾기가 힘들다. 어느 누구한테나 그것은 있다. 그러면 유전자라고 하는 것은 아까 얘기했듯이, ‘자꾸 바꾸어서 나투어 돌아간다’ 이런 거를, 운행하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금방 사람의 모습으로 이렇게 돼 있었는데 금방 또 위대한 사람으로서 모습을 바꿔서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마는, 이건 옷을 벗어야 그렇게 되지만 그 옷을 벗기 이전에 우리가 24시간 살아가면서 사람이 자꾸 바꿔서 이렇게 나투어 돌아가는 걸 짐작할 수 있으시다면, 바로 그 프로펠러가 그와 똑같이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러니 유전자가 보입니까? 유전자라는 것은 그렇게 바꾸어서 돌아가는 걸 말하는 겁니다. 바꾸어서 돌아가는, 운행하는 그 자체를 말입니다. 그래서 무전자와 유전자와 지금 육신, 물질 이 자체와, 색신 자체와 세 가지가 같이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그것은 자꾸 돌아가는 데에 운영을 하기 때문에 찰나찰나 이렇게….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우리 살아나가는 것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를 증명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너무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부동하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너무 빨리 돌아가서 보이지도 않고 그냥 그 자체가 그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라 너무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항상 밝아서”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항상 이게 너무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부동하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걸 표현을 하기를, 항상 밝아서 ‘컴컴하다, 밝다’ 이런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 자체 돌아가는 것도 그렇지만 은하계가 돌아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요, 샛별이 돌아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요, 이 살림살이 모두가 다, 우주 섭류가 다 그렇게 해서 돌아가고, 제가끔들 소임을 맡아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크나 작으나 똑같다는 얘깁니다.

이 도리를 알면 우리 이 도량에서 여러분이 각자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가시는데도 이런 게 있죠. 야! 어린애가 되어서 작은 것만 하는 건 줄 알았더니 큰 거나 작은 거나, 어린애나 어른이나 두루 없고, 한다 안 한다 말 없이 모든 걸 일체 할 수 있으니 할 수 있단 말도 내세울 수가 없다는 거를 알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니 세상의…. (녹음 안됨) … 전체 이 혹성들이 돌아가는 이 이치, 바로 인간의 미분전(未分前) 의 일로부터, 바로 이 시점의 일로부터 모든 것을 못하는 일이 없게 됐기 때문에 세울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생각해 보실 때에 부처님께서 ‘나는 사십구 년 설하고도 한마디도 설한 예가 없다’고 한 이치가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 줄 아십니까? 그렇게 프로펠러가 막 돌아가는데 이전이 있고 이후가 있겠습니까? 그저 돌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흰 구름이 아주 꽃처럼 뭉게뭉게, 백화로서 뭉게뭉게 돌아가면서 꽃을 피우고 있듯이, 돌고 도는 물처럼…. 말을 어떻게 붙일 수가 없는 거죠, 그렇게밖에는.

꽃은 피고 화창하고

꽃이 지니 열매 맺어 무르익으니

이 세상 만 실과가

만 가지 맛이 나고 만 가지 맛을 보니

어찌 이 맛이 좋다 저 맛이 좋다 말할 수 있으랴

이럴 수밖에는 없는 거죠. 이 세상 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배우려고 하지 말고 좀 더 믿고 맡겨 놓을 수 있는 그 공부에 유념하신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그 만 가지로 나는 실과 맛을 꼭 볼 것입니다. 어떻게 거짓이 있겠습니까?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1월 31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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