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불교 이끌 사미 학교에 보시하다

빠욱 총림으로 떠나기 전 마하시 선원에 보시했다. 미얀마는 보시를 하면 ‘보시금 증명서’를 발급해준다. 미얀마 가정에도 증명서를 자랑스럽게 걸어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무주상보시를 강조하는 한국 문화와는 다른 점이다.

며칠 전부터 원래 목표였던 몰라민의 빠옥 선원을 위해 마하시를 떠날 준비를 하였다. 먼저 마하시 선원에서 출간된 법문자료가 어떠한 것인지를 파악하여 가능한 모두 구입하였다. 또한 선원의 발전을 위해 보시를 하였다. 물론 보시는 자율이지 의무사항은 아니다. 오래 머물며 마하시의 시설과 제공되는 음식을 누린 것이다.

보통 이곳에서 보시는 대중공양이다. 대중들이 같이할 수 있는 공양비용을 내면 공양청에서 알아서 특별한 공양을 준비해 준다. 많은 미얀마 보시자들이 공양을 올리고 공양청 입구에서 합장하며 대중을 맞이하고 있음을 보아 왔다. 그러면 요기들은 공양청 입구에 들어서며 보시자에 감사한 마음을 일으키며 입장한다.

빠옥 가기 전 마하시에 보시
동자승 학교에도 기부금 전달
두 기관 모두 증명서 발급해
무주상보시 강조 韓과는 달라


하지만 무언가 다른 보시를 생각해 본다. 외국인 수행처의 감독 스님께 어떠한 보시를 하면 좋겠는가를 물으니 마찬가지로 대중공양을 권한다. 다시 다른 보시방법이 없겠는가를 물으니 선원에 숙소가 부족하여 새로운 건물을 짓는 불사를 하는데 보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점심 공양 후 감독 스님과 함께 마하시 선원의 고빠까(사찰운영회) 담당자를 만나 불사금을 전했다.

이곳에서는 불사금을 전하면 ‘보시금 증명서(Donation Certificate)’를 발급해 준다. 그래서 미얀마 가정집을 가서 보면 보시금 증명서를 벽에 전시해 놓은 경우도 볼 수 있다. 무주상보시를 강조하는 우리나라 보시 문화와는 다른 것 같다. 감독 스님이 기념사진까지 찍을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조금은 어색하게 느꼈으나 담당자의 정해진 절차에 따라해 보았다.

다음으로 마하시 선원 밖의 동자승 학교(Children Monastic School)에 보시하고 싶었다. 미얀마를 다니다 보면 여러 곳에서 10세 안팎의 밤색 승복을 입은 동자승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동자승은 주로 고아나 미아 또는 생계가 어려워 위탁된 경우로 몇 십 명이 집단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사미학교는 교장을 비롯하여 교사들이 모두 출가자이다.

오래 전인 11세기부터 있어 왔으며 불교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는 중요한 복지와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미승은 장차 완전한 구족계 출가로 이어질 수 있다. 미얀마 종교국에 의하면 2015년 기준으로 1,597개의 사미 학교에 약 6,000명의 교사와 약 2십6만명의 학생이 있다고 한다.

늘 기웃거리며 보아왔던 동자승 학교는 마하시 선원에서 탁발하는 주요 동선에 있다. 물론 탁발을 따라다니며 보아왔던 것이다. 여기도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선원 감독스님과 함께 갔다. 시장통 가까이 빈민촌처럼 보이는 곳에서 밤색 승복을 입은 동자승 60여 명 정도가 올망졸망 모여 살고 있다. 학교 교장이나 선생님도 모두 비구 스님들이다.

2층 건물의 낡은 학교는 교실과 숙소 등이 함께 있다. 대략 6~7세에서 10세에 이르는 동자승이 귀여워 보였다. 지나가다 길가의 창문을 통해 보면 줄지어 바닥에 앉아 교사 스님 지도하에 칠판을 보며 공부하고 있다. 귀여워하는 나의 표정 때문이었는지 교장 스님이 동자승을 한번 들어 보라 한다. 들어 올리며 순간 너무나도 가뿐한 것에 깜짝 놀랐다. 보기와 다르게 가볍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같은 또래의 어린이와의 체중과 너무나 달랐다. 마치 지푸라기 볏짚이라도 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도 그러한 느낌이 내 손 끝에 남아 있을 정도이다. 교장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기부금을 전했다. 마하시 선원과 이곳에 각각 300달러, 총 600달러를 보시하였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시금 증명서를 발급해 주고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게 하였다. 교장스님과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선원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후 빈대인지 벼룩이 나에게 옮겨왔는지 온 몸에 빈대(혹은 벼룩)에 물려 며칠 동안 고역을 치루었다. 그러면서 6세나 7세의 동자승들은 얼마나 힘들겠는지를 생각했다.

후일 누구에게 물으니 미얀마 동자승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러한지를 물으니 소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진기약(陳棄藥)을 먹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기약을 먹으면 벼룩이나 빈대에 물리지 않는다고 한다. 진기약은 부란약(腐爛藥)이라고도 한역되었는데 일종의 의약(醫藥)이다. 부처님 당시 출가수행자가 약으로 사용했다. 미얀마는 수행처에서 진기약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나중에 빠옥 총림에서도 직접 볼 수 있었다.

2012년 1월 22일, 오늘은 마하시 선원에 입방한지 49일째 날이다. 계획에 따라 빠옥 총림으로 떠나는 날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에서 떠나올 때 빠옥 총림을 최종 목적지로 삼았다. 하지만 마하시 선원은 양곤에 위치한 데다 가장 유명한 오래된 선원이기에 답사의 필수 코스라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에게도 영향을 크게 미친 위빠사나 수행처이기도 하다. 마하시는 사념처 가운데 신념처 수행이 중심이다. 위빠사나 입문에 있어 호흡과 신체적 행위의 알아차림에 중심이 놓여있다.

그렇다고 수념처나 심념처 그리고 법념처가 간과되거나 배제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수행의 입문 그리고 기초와 근본을 확실하게 훈련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기초만 잘 익혀도 저절로 다음 단계로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경전에 기록된 부처님 말씀처럼 이 같은 신념처만 꾸준히 잘 닦더라도 완전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내에서 이러한 기본이나 근본적인 행법조차 건너뛰거나 간과하면서, 하수의 행법처럼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이러한 수행법을 꾸짖고 자신의 행법만이 최상승이라 노래하기도 한다.

빠옥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이유가 있다. 필자는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문제에 있어 ‘지관차제(止觀次第)’를 줄곧 주장했고, 학계의 논쟁으로 확장됐다. 왜냐하면 경전에서 지관차제만이 아니라 관이 먼저이고 지가 나중으로 나오기도 하고, 처음부터 지관이 동시에 수행되는 것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기본은 지관차제 이후의 경우이지 처음부터 누구나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경전 자구를 기계적으로 이해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학술토론회에서 중앙승가대 교수였던 미산 스님은 미얀마의 빠옥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고 하였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하시 선원은 어느 정도 알았지만 빠옥 총림은 잘 알지 못했다. 이후부터 빠옥 총림을 직접 답사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며칠 전에 빠옥 총림이 있는 몰라민행 버스표를 예매해 두었다. 그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 전날 오랫동안의 인연인 옷따라 스님도 만나 양곤을 떠난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하시 선원에서 함께 정진했던 요기들에게도 떠난다고 알렸다. 마침 점심 공양 후 빨래를 하기 위해 다니다가 선원 로비에 있는 한국 스님들을 만났다. 한 스님이 나에게 “떠날 준비를 하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이미 자띨라 선원장 스님에 이어 감독 스님과 관리 모두에게도 인사를 드렸다고 알렸다. 그리고 저녁 7시에 이곳에서 출발할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어느새 지나가다 이를 들은 한국 노스님이 다가와 “갈 때는 소리 없이 가라”고 했다. 스님은 다시 “떠날 때는 인사를 하지 않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 바로 노스님이 무슨 충고를 한 것인지를 알았다. 즉 남아있는 사람들 마음이 들뜨기 쉬우니 말없이 조용히 떠나야한다는 것이다.

버스정류장에서 빠옥행 버스 출발시간은 밤 8시이다. 짐을 챙겨서 조용히 나온다. 버스를 타고 보니 에어컨 바람 방향 조절 장치가 고장 나 있어 가는 내내 에어컨 바람을 직통으로 맞았다. 출발을 기다리는 버스에 사미니 스님이 올라와 보시를 구한다. 있는 잔돈을 모두 드렸다. 버스는 예정시간보다 약 5분 뒤에 출발했다. 버스 안은 삼성 TV에 한국 영화가 방영된다. 버스 안 출입구에는 미얀마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웅산 장군과 그의 딸인 수지의 사진이 붙어있다. 군사 독재정권인데도 반체제 수장의 사진이 어디든지 게재되고 있다는 점이 과거 우리나라와 비교되었다.

밤새 달리던 버스는 다음 날 멈추었다. 알고 보니 밤 12시 전 중간에서 탑승했던 스님과 사미의 오후불식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스님들에게 여행 중이라도 12시 이전에 점심을 마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중간 휴게소에서 30분 후 점심을 들고 떠난다한다. 식사를 마친 후 버스의 옆자리에 앉았던 젊은 청년이 묻는다. 그는 먼저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를 묻고 악수를 청했다. 버스 안에서 외국인 같은 사람이 나 혼자이니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발동하고 궁금했을 것이다.

인도나 미얀마에서 지내다보면 이렇게 주눅 들지 않은 천진한 품성의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의 무게에 눌려 자신을 표현하는 데 눈치보고 조심한다. 괜한 것에도 억눌려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낮추며 벌벌 떠는 사람도 본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도 관심도 조심하고 억압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청년은 다른 미얀마 사람보다 영어 발음도 명료하고 자신의 의사를 주저하지 않고 잘 표현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과정에서 그의 나이는 19살(한국나이 21살)이고 시골에서 사는데 영어교사로 절에 가서 사미들을 가르치기 위해 스님을 따라간다고 한다. 옆에는 주지 스님이 앉아있다.

미얀마를 비롯한 상좌불교권 나라에서는 운전석 뒤쪽이 상석이라 항상 이 좌석에 스님들을 앉게 한다. 다시 나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어 몰라민의 빠옥에 간다고 하니 뜻밖이라는 식으로 불교도냐고 묻는다. 그는 나의 나이도 궁금해 했다. 그러면서 나의 아들이 너보다 한두 살 적은 나이라 하니 놀라워한다. 준비해 간 선물용 샤프연필을 주지 스님과 청년에게 하나씩 선물해 드렸다. 한참을 지나다 자는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파리하고 여리게 여겨진다. 아들 생각이 난다. 그가 깨어나자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갑자기 주지 스님에게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에게 통역을 부탁해 주지 스님에게 “지금 초대해가는 영어 선생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그 자신의 미래가 있다. 때문에 열심히 일하면 월급을 많이 주셔야합니다”라고 서슴지 않고 무례하게 월권의 말을 했다.

그렇게 말하는 나의 겸연쩍은 표정에서인지 아니면 내가 먼저 웃었던지, 나와 주지 스님, 젊은 영어 선생 모두가 동시에 같이 웃었다. 주지 스님이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중간에 보따리를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 스님과 청년 영어 교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보는듯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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