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부모님 전화 많아졌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엔 걱정·염려만

바로 노인들의 ‘마음 쓰이는 병’이다
자주 연락해 염려와 걱정 덜어드려야

밤낮없는 두견새 울음은 번뇌의 소리
마음이 물러서인가 가족·친구 생각나
잠시 합장하고 그들의 평안 빌어본다

짧은 봄이 다 지나가고 있다. 그리도 분주하게 신명을 다해 준비한 부처님오신날이 반짝 지나고 문득 사월 보름 하안거 결제를 맞았다. 또 한 철이 이렇게 시작된다. 해가 갈수록 봄이 점점 짧아진다고 하는데, 실제로 봄이 짧아지는 걸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늦은 봄비에 마당에 깔렸던 송화들이 다 씻겨가고 젖은 마당을 쓰는 아침이 무척이나 상쾌하다. 길가에 우뚝 솟은 키 큰 아카시아 꽃들은 흐드러지다 못해 누렇게 익어가고, 불현듯 봄을 보내는 마음이 어딘지 모를 아쉬움에 미련 같은 것이 남는다.

어머니께서 안부전화를 주셨다. ‘아픈데 없느냐?’ ‘공양은 하였냐?’ ‘잘 지내느냐?’ 등등 말씀마다 염려와 걱정이 뚝뚝 묻어난다. 초파일에 사찰에 다녀가신지 채 열흘이 안 되었는데 노인네의 걱정은 늘 그렇게 진득하다. 부모의 은혜 가운데 끝끝내 자식을 연민하시는 은혜를 거듭 새기게 된다. 정말 죄송하고 감사하다.

언제부턴가 아버님도 한 손 거든다. 처음 아버님의 전화번호가 화면에 나타났을 때 혹시 무슨 안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닌가하는 걱정이 먼저 일어났었다. 90세를 바라보는 노인의 떨리는 음성과 탁한 숨소리를 통해서 느릿하게 전해오는 당신의 말씀은 그저 평이한 안부 말씀이 용건의 전부였다. 당신 평생의 삶을 돌아보아도 결코 이런 전화를 하실 분이 아닌데 너무 뜻밖의 일이라 놀랍고 황당함을 숨길 수 없었다.

이렇게 전화가 올 때면 눈물이 날만큼 사무치게 감사하지만 또한 아프도록 죄송한 마음도 함께 일어난다.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원해드려야 할 입장인데 도리어 어른들의 염려를 사고 있으니 이런 불효가 없다.

이렇게 전화를 주시는 지금보다 당신들이 젊고 활기찰 때의 무심하고 덤덤함이 훨씬 좋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매년 추석과 설날에 안부전화를 드렸는데 언제부터인가 당신들이 전화를 주시기 시작한 후로 전화를 드리는 일이 줄게 되었다. 노인들의 다정(多情)이 병이다. 마음 쓰이는 병이다. 아무래도 자주 먼저 전화를 드려서 노인네들의 다정으로 인한 염려를 덜고 나의 고민도 덜어내야 할 것 같다.

문득 학창시절 배웠던 다정가(多情歌)’라고 하는 옛 시조 한 수가 떠오른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산사에 사는 사람만큼 꽃과 달에 친근한 사람들이 있을까. 새벽예불 때 만나는 달빛에 비친 봄꽃들은 그야말로 축복이다. 청량하게 들이쉬는 새벽 숨결에는 꽃향기와 달빛 그리고 별들의 반짝임이 흠뻑 배어 있다.

담담한 호흡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담박하고 무심한 산승의 마음에 은근히 춘심(春心)이 배어드는 시간이다. 밤낮없이 울어대는 두견새와 소쩍새들의 애절한 울음소리 또한 잔잔한 일상을 흔드는 번뇌의 소리들이다.

물러진 마음 탓일까 울적한 기운이 스며든다. 부모님의 건강도 걱정이 되고, 형제들도 생각이 난다. 학창시절 불교활동을 함께 했던 옛 친구들도 생각나고 불교의 홍포와 전법을 위해 애쓰는 법우들과 불자들도 생각이 난다. 길거리에서 또는 높고 낮은 곳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의 평등과 평화와 행복을 위해 고생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들어온다.

잠시 두 손 모아 축원의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부디 다들 편안하시길, 행복하시길,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사라지기를, 아름다운 날을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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