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나만의 인연사전 만들기

사람 이름 써놓고 끄적이며
소소한 기억을 표현해보자
그를 향한 마음이 꾸밈없이
서서히 내면에서 드러난다

나만의 인연사전 만들기는 저자 겸 편집자가 나 자신이다. 나를 중심으로 한 인연의 정의를 내리는 일이다.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스스로 질문하고 받아 적는 일이다. 사전(事典)이라고는 하지만 단 한 장짜리 사전이어도 무슨 문제겠는가. 글로 적은 후 당장 소멸시킬 원고다. 그런 의미에서 부담 없이, 솔직하게, 나오는 대로 편찬하는 나만의 사전이다. 관점 디자인의 저자 박용후는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자신만의 정의를 가지라고 한다. 나 아니면 발견할 수 없는 관점과 정의를 통해 차별화된 를 탄생시키기.

인연사전을 적다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가령, 나의 아내나 남편의 이름을 백지에 적어놓고 끄적인다고 하자. 이 사람의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뭘까. 사랑스런 강아지? , 그렇군. 이 사람의 감촉을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반질반질한 유리창에 뺨을 댄 느낌? 이 사람의 냄새를 딱 잘라 말한다면? 봄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수건 내음? 내가 알고 있는 이 사람의 삶을 한 줄로 압축한다면? 이 사람의 색깔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뭘까. 이 사람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한 말, 한 마디만 적는다면? 내가 알고 있는 이 사람, 삶의 스토리를 석 줄만 적는다면? , 이렇게 한번 적어보자.

- 나의 배우자, 자녀, 형제, 부모 등 애착관계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고 그의 인상착의나 최근에 나눈 대화, 기억나는 일, 그의 언어 습관, 태도, 특이한 버릇, 발걸음 따위 등을 적어본다.

- 친구 혹은 그 누군가의 이름을 적는다. 그런 후 그를 색깔로 표현하면 어떤 색깔일지, 모양으로 표현하면 어떤 모양일지, 소리나 맛, 냄새 감촉 따위로 표현하면 어떤 말이 나오는지, 생각대로 적어보기.

- 친구 혹은 그 누군가의 이름을 적는다. 그와 나눈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지금 일어나는 생각대로, 시나리오 형식으로 적어가기(기억대로 쓰지 않아도 됨).

- 친구 혹은 그 누군가의 이름을 적은 후, 내가 알고 있는 그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적는다. , 몸무게, 언제 적부터 인연이 됐는지. 그동안 함께 겪은 일 따위에 대해 나의 생각도 적고, 평소 하고 싶은 말도 적는다. 애써 삼갔던 조언, 충고 등도 마음껏 드러내본다.

나에게는 몇 명의 죽마고우들이 있다. 어느 날 이들과 오랜 세월 엮여온 날들을 가만히 되돌아보니, 지내오는 동안 여러 차례 관계가 비틀리거나 왜곡되는 일들이 있었다. 소소한 돈 문제나 가족 모임 중 던진 농담이 예기치 않게 내밀한 상처를 건드려서 서로 서먹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어떤 친구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그것을 대하는 친구들의 반응이 서로를 눈치 보게 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어떤 친구는 결혼하고 애 키우면서 다른 관점들이 생긴 거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구러 섞여서 지내왔다. 벌써 20여 년이다. 그동안 우리는 몇 달 동안 서로 통화 한번 없이 지내기도 하고, 어느 시절에는 한두 달에 한 번씩 전 가족이 뭉치기도 했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나도 변할 것 같지 않은 죽마고우도 세월과 조건에 따라 끊기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고, 서먹해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싶었다. 다른 친구들끼리 갈등이 생기면, 그냥 그 친구들 일이거니 했다. 이런 일들은 친밀한 사이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일터에서도 일어났고, 일회성 여행지에도 발생했다. 가족이건, 친구건, 여행지에서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사람 간에는 늘 크고 작은 마음의 파도가 일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오래 묵은 사이일수록 높고 깊고 예리해서 아프기도 깊이 아팠다. 오래 묵은 사이일수록, ‘, 모르겠어!’하는 탄식 또한 깊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그 친구는 어디가고 딴 친구가 있어? 나만의 인연사전을 만드는 일은, 그런 점에서 특효다. 이런 사태의 근원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 친구에 대한 인연사전이다.

한양률 : 13살 무렵 그가 흘렸던 눈물이 잊히지 않음. 울 때나 웃을 때, 입을 벌리면 오른쪽 위에 긴 뻐드렁니. 기묘한 부조화. 양률이를 떠올리면, 튀김 냄새와 튀김 색 또는 눈물처럼 투명한 색이 떠오른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첫 말이 경음으로 터지는 경상도 사투리 억양도 인상 깊다. 이 친구를 맛으로 표현한다면 짜면서 맵고 단맛의 느낌(무교동 낙지 비빔밥 같은)이다. 이 친구라는 존재를 소리로 표현한다면, 절의 목어(木魚) 두들기는 소리 같다. 1 시절 만화가게로 나를 데리고 가서, 내 앞에서 담배를 피움으로써 내 자존심을 긁어댄 친구.

인연사전을 적다보면 차츰 선명해지는 게 있다. 그는 내 생각이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존재일 뿐이구나. 그의 실체를 지금 이 순간에 만나거나 만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코를 큼큼대며 냄새 맡고 있는 것도 아니구나. 하지만 당신은 마치 지금 이 순간 그를 보고 있는 것처럼, 그 일이 지금 일어난 것처럼 느끼며 적게 된다. 당신은 당신 안에 갇혀 있던 그의 이미지, 기억, 대화들을 드러내면서 사실은, 당신의 내면을 보게 된다. 그에 대한 내 마음의 스펙트럼을 카드 펼치듯 펼쳐본 셈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들켰다.

그의 이름을 적고, 그의 이미지를 생생히 현실화시키고, 그와의 대화를 적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제야 그를 더 자세히 알게 됐거나 더 깊이 이해하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와의 관계가 더 깊고, 튼튼하게 교직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아니다. 실은, 세월 따라 더 많이 만날수록 알 수 없는 게 더 많아졌음을 실감하게 되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마치 내가 나를 주시할수록 알 수 없는 게 더 확장되듯이.

욕구 드러내기 - ‘싶다글쓰기

나는 이것을 싶다, 글쓰기라고 한다. 어떤 경우든 한 문장의 종결어미를 싶다로 쓰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할 때는 내 안에서 뭔가 툭툭 끊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때까지 펜을 놓지 않는다. 길든 짧든 끊임없이 싶다. 싶다. 싶다. 싶다를 연발한다. 이 글쓰기를 통해 나는 온갖 관념, 윤리, 도덕, 법률, 율법, 인간관계의 포승줄에 묶여 있었던 마음의 조건을 시원하게 내던진다. 내 안의 모든 싶다들이여, 해방이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더냐. 내면의 감옥에 갇혀 있던 싶다들을 향해 선동의 주먹을 흔들어댄다. ‘싶다앞에서는 모든 억압, 외면, 회피 따위들이 무력해진다. 살아오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욕망의 언어들이 떨치고 일어선다. 어디에? 당신의 백지 위에!

불교에서 득도의 순간은 모든 욕망이 그침으로써 이루어진다. 한 마디로, 모든 싶다의 소멸이다. 먹고 자고 눕고자 하는 본질적 욕구조차 끊어진 경지. 모든 생각이나 감각이 끊긴 자리. 그러다 보니 득도의 경지에 이르면 삶의 의욕조차도 거추장스러운 마음작용이 되어, 사람 속에 섞여 살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사람의 마을을 떠나 숲으로 갈 수밖에 없다.

욕망이 그친다는 것은 모든 싶다의 소멸을 의미한다. ‘싶다의 역동은 그동안 숨기고 눌러왔던 언어의 빗장이 벗겨지는 사건이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드러낼 때 쓰는 희망도 알고 보면 싶다. ‘소망도 젓가락 끝으로 김치를 집는 악력 정도의 싶다. ‘의욕은 불고기를 씹는 어금니 같은 싶다가 아닐까. 욕구는 어떤가. 무게 중심이 분명하고 묵직한 싶다. 욕망은? 어린애 울음처럼 대책없이 노골적인 싶다. 탐욕? 이것은 신경성 장애에 가까운 싶다를 표현한 말 아니겠는가.

지금 열거한 낱말의 의미들을 따지고 보면, 희망, 소망, 의욕, 욕구, 욕망, 탐욕은 각기 다른 표현의 싶다이다. 하나의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처럼 상황과 조건에 따른 심리적 위치만 다를 뿐이다. 어느 순간, 소망이 탐욕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본인은 소망이라고 외치는데 타인이 보기엔 탐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싶다를 당신의 내면에 억눌러 놓을 때와 백지 위에 노출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생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지 느낄 수 있다.

- ‘싶다를 활용하여 지금 원하는 것을 내면에서 나오는 대로 발설하기.

- 이루지 못했던 일, 이루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 등에 대해 싶다로 끝맺는 글쓰기.

- 자신의 과거 기억 중에서 미완성, 미해결 과제 등을 싶다로 완결한다.

- 5분 후부터 10, 15시간을 확장하면서 싶다로 마치는 글쓰기.

불교학자 정준영은 그의 논문 욕망의 다양한 의미에서 초기불교는 욕망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삶을 위한 노동이나 일에 대한 애착, 수행에 대한 열정 등의 싶다는 자타를 돕는 원동력이다. 당신의 내면에는 이와 같은 긍정적 싶다와 부정적 싶다가 혼재돼 있다. 분명한 것은 내 안의 싶다를 드러내놓는 작업은 대체로 즐거움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왜 즐거울까. ‘싶다의 반대 측 언어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싫어, 나빠, 안 해, 못해, 안 가

싶다글쓰기를 하는 동안 가만히 자기 관찰 해보라. 마음의 결이 자연스럽다. 우리 삶 전체가 싶다를 기반으로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싶다를 지속적으로 발설하는 것은 마음의 결을 능동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이 설사 타인에게 감추고 싶은 싶다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열고 열리는 경험을 하는 이득이 있다. 남들에게는 시시하지만 자신에게는 깊고 아득한 마음들이 드러나면서,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싶다를 거듭하면, 생각지도 못한 내면 깊은 소식을 받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지면에 노출할 수 없는 부도덕, 비윤리, 반사회적 역동들이 왜 없겠는가.

집에 가고 싶다 / 된장국에 보리밥 말아먹고 싶어 / 꿈도 없이 자고 싶어 / 실컷 욕하고 싶다 / 길동아 보고 싶다 / 그 사람 품에 안겨서 쉬고 싶어 / 치킨 뜯으면서 게임이나 실컷하고 싶다 / 편지 받고 싶다 / 내 이야기를 맛있게 들어줄 사람 만나고 싶어 / 늦잠 자고 싶어 / 그만저만 일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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