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걸으며 ‘심신 치유’ 느끼다

계곡사이로 난 길을 따라 이어지는 아침의 순례길. 38번 사찰로 가기 위해서는 2일을 꼬박 걸어야 한다.

새벽 한기에 몸을 뒤척이며 일어났다. 37번에서 7km가량 떨어진 휴게소에서 노숙한 하룻밤. 두 사람이 정원인 휴게소에 세 사람의 순례자가 묵었다. 사람들이 걷는 속도가 고만고만하고, 또 묵는 포인트들이 뻔하다 보니 노숙 순례자들은 자주 마주치게 된다. 어젯밤 같이 묵은 순례자들도 모두 길에서 봤던지 같은 곳에서 하룻밤 같이 묵었던 이들이었다.

보름 지나니 신체 밸런스 좋아져
걸음도 많이 개선… 변화들 확인
자살 시도자들 순례 후 새사람 돼
사찰에도 영험담 많은 ‘치유의 길’

38번 콘고후쿠지(金剛福寺)는 여기서 부지런히 걸어서 이틀 길. 시코쿠의 땅끝인 아시즈리(足摺) 곶을 향해 가는 길이다. 처음 순례할 땐 한여름 땡볕에 덜컥 겁을 먹고 중간까진 전차를 타고 이동했었다. 하지만 순례길이 국도를 따라 걸어가는 길이라 중간 중간 쉴 수 있는 곳도 있고 마을들도 지나치기에 지루하지 않다. 전날 묵은 휴게소에서 꼬박하루, 35km 정도 걸어가면 다시 묵을 수 있는 포인트들이 있다.

아직 자는 이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짐을 싸는데 다른 순례자들도 일어난다. 다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짐을 싼다. 노숙 순례자들이다 보니 짐을 매일 싸고 푸는 것에 이골들이 나 금새 배낭을 다 챙기곤 멍하니 벤치에 걸터앉는다.

“다들 커피 어떤가?” 버너를 들고 다니는 순례자가 물을 끓이며 묻는다. 지난번 국민숙사 토사에서 같이 묵었던 오카야마 할아버지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눈이 뜨이지 않는다며 일부러 코펠과 커피를 들고 다닌다고 했다.

거절하지 않고 냉큼 발우를 들이밀었다. 컵을 따로 들고 다니지 않으니 발우가 컵이다. 셋이서 커피를 나누자 할아버지는 조금 남은 커피를 컵에 담아 휴게소에 모셔진 코보대사상 앞에 올렸다.

“안계시면 모를까, 계시는 분을 빼고선 우리만 마실 순 없잖아?” 할아버진 없던 신심도 생겼다며 웃고선 커피를 마셨다. 나도 발우를 두 손으로 들고 선 공양게송을 외우고 커피를 들이켰다. 뜨거운 커피에 산속의 한기가 한순 가신다. 오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니 다들 목적지로 생각하는 곳들이 예상범위 내였다. 나는 시만토(四万十)강변 있는 대사당을 목표로 잡았다.

발우를 닦아 배낭에 넣고서 일어났다. 주머니에 넣어둔 염주를 두 손 사이에 넣어 합장하고서 오늘도 진언을 염송하기 시작했다. 팔이 움직이며 염주가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제법 듣기 좋다.

순례를 시작한지 보름이 넘어 가다보니 몸의 균형이 좋은 방향으로 변해간다. 첫날엔 땀이 비오듯 흘러 앞이 안보이고,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는데 이제는 아주 가뿐하다. 어느 때엔 스스로 놀랄 정도다. 허기짐도 딱 몸이 필요할 때 허기져 하루 세끼를 정확히 먹게 되고, 또 과식하는 등의 몸이 무리하는 일을 스스로 하지 않게 된다.

순례 중에 만난 한 일본 스님은 몸의 독소가 빠져나가면서 자연 그대로의 몸이 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이런 사례를 들었다.

“어느 순례자가 매일 아침 자신의 얼굴을 찍었어요. 그리고 순례를 마치고선 첫날의 자신과 마지막 날의 자신의 사진을 비교해 보았더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고 합니다.”

나도 이 이야기에 조금 자극을 받아 매일 사진을 찍어 보겠노라 다짐해 봤는데 결국 지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순례를 마치고 찍은 사진과 순례 첫날에 찍은 내 사진을 비교해 봤을 때 뭔가 스스로 달라졌다는 느낌이 보였다.

많은 순례자들은 순례길을 “오헨로(순례) 병원”이라고 한다. 몸은 조금 피곤할지언정 점차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치유되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에서는 시코쿠 순례를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나 등교 거부 학생들을 갱생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위의 이야기를 해준 일본 스님은 자신이 만난 어느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모인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자살을 하고자 시코쿠 순례를 왔었단다. 죽기 전날 마지막 추억삼아 어느 순례자 휴게소에 둘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스님이 노숙을 하게 됐고, 같이 한잔 두잔 걸치다보니 속내를 듣게 됐다.

스님은 이야길 다 듣고서 기왕 죽을 것이면, 순례 공덕이라도 짓고 세상을 떠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들이 미리 써둔 유서와 신분증들은 스님이 거두고선 88번까지 다함께 걸었다. 회향하던 날, 88번 사찰의 산문에서 유서와 신분증을 돌려주며 스님은 이제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자신들이 써둔 유서를 다시 읽어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유서를 버리고 새사람이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모여서 시코쿠에 온 것도, 내가 그날 마침 그곳에서 묵게 된 것도, 모두 대사의 인도하심이겠지요. 이곳 88개소는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시겠다는 발원으로 대사가 연 길입니다. 사찰들 중에는 병고에서 벗어났다는 영험이 왕왕 전한답니다.”

시코쿠 순례의 시작에 대한 여러 이야기 중에, 코보 대사가 중생들의 병고와 재난을 소멸하는 발원으로 길을 열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88개소 곳곳에 재액을 소멸한다고 전하는 불상이나 자연물들이 모셔져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과연 시코쿠 순례가 치유의 길은 맞는 듯하다. 당장 나 자신도 길을 걸으면서 많은 위안과 치유를 받았다. 또 그렇게 받은 힘이 일상 속에 고난과 역경이 왔을 때 나를 지탱해 준다.

오늘의 순례길은 국도 56호를 따라 걷는 길이다. 어젯밤을 보낸 휴게소에서 10km 가량을 걸어 계곡길을 빠져나오니 탁 트인 길이 나타난다. 좌측은 바다, 우측은 산을 끼고 걷는 단조로운 길이지만, 경관을 살려 만든 공원과 전망대들이 드문드문 길 옆에 산재해 있다.

적당한 벤치에 앉아서 아침을 먹을까 했지만 새벽녘에 마신 커피 덕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 그냥 걷기로 한다. 대신 짐 무게도 줄일 겸 예전에 보시 받았던 귤을 까서 우물거리며 걷는다.

그렇게 5시간가량을 꼬박 걷고서 배가 고파 좀 힘들다 싶어서야 배낭을 내린다. 아침이라기엔 늦고, 점심이라기엔 좀 이른 시간이다. 해수욕장 옆에 있는 안내센터에 들어가 배낭을 내리고 미숫가루를 꺼냈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서 안내센터를 휘적휘적 돌아보니 근처 해수욕장이 시코쿠 관광명소인 스나하마 미술관(砂浜美術館)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스나하마 미술관을 우리말로 옮기면 ‘모래사장 미술관’이라는 말이다. 이리노(入野)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부지로 건물을 짓지 않고 작품을 설치해 전시하는 독특한 전시장이다.

스나하마 미술관의 명물은 매년 5월에는 열리는 ‘티셔츠 아트전’. 하얀 티셔츠를 로프에 걸어 빨래를 널 듯 전시하는데, 각 티셔츠에는 전시회에 응모된 그림이나 사진이 프린팅 된다. 올해(2019)로 벌써 31회째. 몇 백 장의 흰 티셔츠가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장관이란다. 순례자들 가운데는 일부러 이 모습을 보기 위해 5월에 맞춰 순례를 오는 이가 있을 정도지만 실제 만나지는 못했다.

지도를 펴서 남은 거리를 가늠해 본다. 지도상엔 오늘 묵을 다케시마 대사당(竹島大師堂)까지 겨우 10km다. 10km면 서둘러 걸었을 때 2시간 반이면 충분히 도착하는 거리. 순간 내가 잘못 계산했나하고 출발한 휴게소부터 다시 거리 계산을 해보니 틀림이 없다. 시코쿠 순례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너무 열심히 걸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 이르게 도착해봤자 남는 시간이 무료하다. 첫 순례 때의 추억이 있는 고츠카 대사당(古津賀大師堂)을 들리기로 하고 계산을 해더니 고츠카 대사당을 들려도 1~2km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조금 지도를 들척이다 보니 지도에 남겨둔 메모가 눈에 들어온다. 다케시마 대사당에서 조금 내려간 곳에 있는 카페에 대한 메모.

그제야 일본 지인이 대사당 근처에 카페를 개점했다는 게 기억났다. 첫 번째 순례에서 만난 치카 씨는 우연히 내가 시코쿠에 처음 발을 딛던 날, 도쿠시마로 향하는 버스를 같이 탄 인연으로 이어졌다.

시코쿠에 사는 치카 씨는 한국여행을 하고 돌아오던 길이었고, 나는 순례를 위해 시코쿠로 향하던 길이었으니 자연스레 이야기가 이어졌다. 덕분에 첫 순례와 두 번째 순례 때는 하룻밤  신세를 졌다. 이후 연락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세 번째 순례 직전에 친환경 카페를 열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위치가 순례길과 이어지지만 빙 돌아가기에 그냥 전화만 하고 지나칠 생각이었는데 이리 되면 한번 들려보는 게 좋아 보인다.

치카 씨의 카페를 들리고, 고츠카 대사당을 참배하면 보통 하루가 마치는 시간인 대여섯 시에 다케시마 대사당에 도착할 듯했다. 경로도 정해졌고 일단 치카 씨에게 전화를 했다.

“치카 씨! 저 순례 또 왔어요! 지금 치카 씨 카페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입니다. 이리노역 앞이에요.”
“바로 근처네요. 그럼 우리 카페 들렸다 가세요.”

불법(佛法)에 우연은 없다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이 연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어제 같이 숙박한 할아버지 덕에 모닝커피를 마셨고, 그 힘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걸으면서 걸음걸음 기도를 했고, 그 덕에 스스로 몸이 변하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인연들이 하나하나 순례를 이어나가게 하고, 또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이는 힘이 되는 것이리라. 코보 대사는 치유의 길을 남겨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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