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심여화사(心如畵師)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형체없는 ‘마음’ 깨달음”

 

‘심여화사(心如畵師)’는 ‘우리의 마음이란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다’는 뜻이다. 〈화엄경〉에 나오는 ‘불교 사자성어’로서 변화무쌍한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다.

우리의 마음은 수시로 변한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을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변한다.’고 풍자한다. 어느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은 미세하게는 하루에 만 번 정도 움직인다고 한다.

한 끼 식사를 하면서도 우리는 ‘무슨 반찬부터 먹을까?’하고 생각한다. 실제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젓가락을 잡고서도 1~2초 사이에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어떤 반찬을 먹을까? 반찬의 가짓수와 종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고민이 반짝거린다. 옛적의 어느 학자는 그런 고민이 싫어서 무조건 앞에 있는 것부터 먹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하나보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늑대인가 양인가?’라고 하여 우리의 마음은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맹자는 성선설을,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지만, 에리히 프롬의 분석과 같이 성선(性善)과 성악 모두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더 확실한 파악일지도 모른다.

유심(唯心)의 철학을 설하고 있는 대승경전인 〈화엄경〉에는 “마음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心如工畵師), 마음대로 모든 세간상들을 그려 낸다(能畵諸世間)”고 하였는데 여기서 ‘세간’이란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갖가지 번뇌와 망상을 가리킨다. 물론 부처님 같은 생각도 그려 낸다.

슬픔도 마음이 그려 낸 것이고 기쁨과 근심 걱정도, 그리고 웃음과 눈물도 자신의 마음이 그려낸다. 극락도 지옥도 마찬가지고,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고 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말이다.

우리는 똑같은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욕망이 가득하면 그것이 곧 고통의 세계, 지옥의 세계이다. 그러나 무욕하게 지혜의 마음으로 보면 곧 극락이 된다. 무지로 인해 방황하면 그곳이 곧 살아 있는 지옥이고 반야지혜로 자신을 지키면 그곳이 유토피아인 극락이다.

사바세계와 극락은 곧 우리의 마음, 자기 자신의 마음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것, 나쁘다 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또 〈화엄경〉에는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심멸즉 종종법멸(心滅則 種種法滅)”이라고 하여, “우리의 이 한 마음, 즉 번뇌가 일어나면 일체 모든 현상들이 발생하게 되고, 한 마음이 사라지면 일체 모든 현상들도 동시에 다 사라져 없어진다”고 하였다.

달마의 〈혈맥론〉에는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찾을 수가 없구나. 넓을 때는 온 세상을 다 감싸고 포용하다가도, 좁아지면 바늘구멍도 받아들이지(수용) 못한다”고 하여, 신기한 마음의 세계, 변화무쌍한 마음의 다양성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선에서는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고 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 이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고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라고 한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바로 포착 불가능한 형체가 없는 이 마음을 깨닫는 데 있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도 중생의 마음속에 ‘부처가 되는 마음과 중생으로 전락하는 마음(심진여문, 심생멸문)’, 이 두 가지가 공존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깨달은 부처가 되기도 하고, 미망의 가을 들판을 헤매고 다니는 중생이 되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마음’, 그 마음에서 ‘위대한 부처’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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