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동물&불교] 불교계 유기동물쉼터를 찾아서
경남 사천 견공선원(청솔아토유기견묘쉼터)

비구니스님 혼자 쉼터 세워
수년간 유기동물 구조 펼쳐
입양 보낸 견공만 300마리

‘케어 사태’에 대중 멀어져
재정적 어려움 부딪혔지만
유기동물 관심 끊이지 않길

견공선원은 유기견들에게 극락정토와 같다. 이곳에서 청솔 스님은 유기견들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이다. 이런 스님을 향한 유기견들의 애정공세는 멈출 줄 모른다.

견공선원(犬公禪院). 평소 개와 고양이를 비롯해 동물을 좋아하는 기자에게 매우 독특한 절 이름이 뇌리에 박혔다. 우연히 TV프로그램을 보다 알게 된 그곳, 80여 마리의 유기견과 유기묘들이 비구니스님과 살아가는 견공선원(청솔아토유기견묘쉼터)이다.

세상에, 스님과 유기견이 무슨 인연이기에 절 이름까지 견공선원이란 말인가?’

지금껏 능력이 부족해 소위 랜선집사로 온라인에서 남의 집 반려동물만 구경해온 기자에게 견공선원은 마치 영화 쥬만지(Jumanji) 속 매력적인 정글처럼 느껴졌다. ‘한번 가보고 싶다.’ 작은 소망은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됐다.

수소문 끝에 견공선원을 운영하는 청솔 스님과 연락이 닿았다. 휴대전화 너머 스님 목소리는 시원시원했다. “서울에서 오시나요? 주말도 괜찮으면 토요일에 오세요!” 427, 차로 무려 4시간 반을 달려 경남 사천에 도착했다.

부처님 대신한 犬公 무리
사천의 어느 시골 논밭 오솔길을 따라 가다보니 견공들의 합창이 우렁차게 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 좋아 합창이지 견공선원 앞에 서면 수십 마리의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에 조금 기가 눌린다. ‘난 개를 좋아한다, 개를 좋아한다.’ 분명 개를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견공선원에 발을 들이기 전, 이유 모를 중압감에 이렇게 되뇌었다. 살면서 수십 마리의 개를 한꺼번에 만날 일이 없었기에 한편으론 겁도 났다.

견공선원으로 들어가는 역사적인 첫발, 오른쪽 눈 주위에 손바닥만한 검은 무늬를 가진 대형견 점순이가 달려든다. 낯선 이에게 앞발을 번쩍 들며 다가와 연신 침을 묻히는 점순이. ‘우리가 구면인가싶던 그 순간 청솔 스님의 호통이 날아든다. “점순아아아!”

격한 환영인사에 점순이가 대표로 혼쭐났지만 이미 기자의 옷은 여러 견공들의 신고식으로 엉망진창이 됐다. ‘이곳은 쉼터인가 전쟁터인가.’ 견공선원 구역을 나누는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또 다른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아뿔싸!’

견공들의 신고식을 대략 3차전까지 치른 뒤 청솔 스님과 원활한 대화가 가능해졌다. “개들이 좀 많죠? 얘들 밥 주고 똥 치우고 청소하면 하루가 다 가요. 그만 데려오려고 마음먹었다가도 눈앞에 보이면 그게 잘 안 된다니까.” 청솔 스님이 앞치마를 두른 채 빗자루질 하며 먼저 말을 건넸다.

견공선원에는 유기견 70마리와 유기묘 10마리 정도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인연이 닿아 입양자를 만나 떠나는 동물이 있어 견공선원에 거주하는 동물 숫자는 자주 변한다. 도대체 비구니스님이 무슨 연유로 이렇게 많은 유기동물과 생활하게 된 걸까?

원래 여기에 부처님 모시려고 했어요. 그러다 꿈을 꿨는데 개장수가 오더니 도량에 개들을 싹 풀어놓더라고요. 그때는 목탁이·법고·죽비·천진이·새봄이까지 5마리만 있을 때였거든요? 여기가 부처님 모실 곳이 아니라 개들 살 곳인가 싶었죠.”

견공들에게 밥 주고, 청소하고, 빨래하다보면 청솔 스님의 하루가 저문다. 견공들도 그 정성을 알기에 스님을 핥으며 감사를 표한다.

청솔 스님은 약 6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작은 유기견 한 마리를 만났다. 털이 엉키고 씻지 못해 꾀죄죄한 강아지에게 이리 와라고 스님이 말을 걸자 녀석은 쪼르르 다가왔다. ‘간봉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못했던 간봉이는 오래 살지 못했다. 간봉이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낀 청솔 스님은 본격적으로 유기동물을 돕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비영리민간단체 청솔아토유기견묘쉼터도 설립했다.

유기견보호단체에 찾아가서 강아지 몇 마리를 임시보호하려고 데려왔어요. 보호기간이 끝나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절대 안 가려고 하더군요. 차에 실었는데 벌벌 떠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니 차마 못 보내겠더라고. 그때부터 유기견들이 눌러앉기 시작했어요.(웃음) 여기 살면서 얘들 얼굴이 피는 걸 보니까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싶었죠.”

청솔 스님도 처음엔 지금처럼 많은 유기동물과 함께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거리에 버려지거나 개시장에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유기동물이 너무 많았다. 그 모습을 보고 냉정히 돌아서자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조금은 비좁더라도 끼니 걱정, 죽을 걱정 없는 곳에서 함께 살아보자는 마음이 지금의 견공선원을 만들었다. 그렇게 청솔 스님은 모든 공간을 유기동물에게 내주고 방구석 작은 침대에서 매일 견공들과 잠에 든다.

우리나라, 품종 편견 사라지길
청솔 스님이 지금까지 구조하고 해외입양 보낸 유기견은 무려 300마리에 달한다. 이달 중으로만 7마리가 캐나다와 뉴욕으로 입양 갈 예정이다. 이 과정에 필요한 병원비부터 중성화비, 접종비, 항공료까지 전부 스님이 부담했다. 한 마리에 적게는 수십만 원에서 많게는 100만원이 넘는 비용이 필요한 일이다. 청솔 스님은 사천 내 다른 사찰의 기도와 불공을 도우면서 월 100만원이 조금 넘는 보시를 받아 충당하고 있다.

다행히 사료나 물품후원이 이따금 들어오고, 지난해 방송출연 이후에는 한동안 재정적 후원도 이어졌다. 물론 후원금은 유기견들의 병원비로만 사용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올 초 케어 사태발생 이후 뚝 끊어졌다. 유기견을 인편(人便)으로 해외에 입양 보내면서 항공료를 절약하던 것도 사람들 관심이 줄어들어 화물로 대체해야 했다. 스님은 사람에게 부탁해 보내면 20만원에 해결되지만 화물로 보내면 50~60만원이 들어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방송 보고 견공선원을 찾아와 반려견을 유기하고 가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렇게 청솔 스님에게 남은 건 카드빚이었다.

아휴, 돈 생각하면 이 일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도 이게 다 인연이잖아요. 청소·목욕 도와주는 봉사자분들도 오시고, 무엇보다 애들 밥은 안 굶게 사료 후원도 들어오니까요. 다만 국내입양이 너무 안 돼서 걱정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기견도 품종견 아니면 안 데려가거든요. 다행히 해외는 품종에 대한 편견이 없어서 입양비용이 더 들어가더라도 그쪽으로 보내고 있어요.”

칠판에 빼곡히 적힌 견공의 이름. 무림이·무군이·무령이…. 청솔 스님은 80마리에 달하는 유기동물 이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외운다.

청솔 스님은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불자들이 인과법을 잘 새겨 반려동물을 유기하지 않고, 평생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랐다. 또 되도록이면 펫숍에서 동물을 구매하기보다는 유기동물을 반려동물로 삼을 것을 당부했다. 그러면서 일타 스님 법문집에 나오는 제선 스님과 강아지 이야기를 전했다.

제선 스님은 일타 스님이 손꼽는 고승이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제선 스님이 일본 친척아저씨 집에 머물던 어느 날, 오랫동안 함께한 개가 아프기 시작했다. 제선 스님은 교외에 개를 버려달라는 친척아저씨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줬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나 제선 스님은 집 앞에서 그 개를 다시 만났다. 버려진 개는 제선 스님을 섬뜩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사라졌다. 국내로 돌아온 제선 스님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아들은 국민학교 입학 후 갑자기 죽었다. 슬픈 마음을 안고 전국을 떠돌던 제선 스님은 묘향산에서 한 스님을 만나 아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스님은 기도를 해보라고 권했고, 제선 스님은 7일간 잠도 자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그러자 죽은 아들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일본에서 버린 개로 변했다. 인과의 법칙을 깨달은 제선 스님은 그길로 출가해 높은 경지를 이뤘다고 한다.

누군가는 왜 사람 구조 안 하고 동물 구조하느냐고 묻습니다. 사람은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요. 동물은 아무 말도 못해요. 분별심으로 동물을 대하면 안 됩니다. 불자들은 인과를 알고 복을 지어야 합니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 밥 한술 주는 것, 비를 피할 장소를 제공하는 것. 부처님에게 복 달라고 암만 빌어도 지은 게 있어야 받지 않겠어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단순히 TV프로그램 이름만이 아니다. 동물의 행동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고, 이를 나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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