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수행자와 유기견의 염화미소

경남 사천에서 수년째 유기동물 구조·입양 활동을 펼치는 청솔 스님과 유기견 무림이. 견공선원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80여 마리의 유기견과 유기묘들이 생활하고 있다. 전부 한 차례 이상 아픔을 겪었지만, 유기동물을 사랑하는 스님의 마음이 견공들의 미소로 표현된다. 유기동물의 이고득락이 실현되는 서방정토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모든 생명은 나고 죽는다. 산 생명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평등한 진리다. 그렇기에 나고 죽는 것은 순리일 뿐 장애가 아니다. 다만 나고 죽는 것 사이에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의 문제다. 부처님이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중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수많은 반려동물들이 길거리에 버려진다. 매우 소중한 짝을 뜻하는 반려(伴侶)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용어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애완(愛玩)’의 개념이다. 가까이 두고 즐기다가 싫증나면 버리는 장난감 같은. 명절 연휴만 되면 명절증후군고속도로 정체에 이어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유기동물이다.

<범망경>에는 생명이 있는 것을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수단을 써서 죽이거나 부추기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을 외워 죽여서도 안 된다고 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계율 불살생(不殺生)이다.

반려동물 유기도 하나의 살생이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이거나 죽길 바라지는 않더라도 독립할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곳에 산 생명을 내던지는 것 자체가 살생이다. 불자들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쩌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국불교는 지금까지 유기동물 문제에 관심 갖지 않았다. 이유는 중요치 않다. 이제는 불자들이 먼저 참회하고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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