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나는 누구일까?

그림. 김흥인

내 이름은 김선. 10살이야. 사람들은 나를 ‘써니’라고 불러. 써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별명이야. 태양을 떠올리게 하니까. 태양은 밝고, 환하고, 따뜻하지. 그리고 아주 높이 떠 있어. 모든 것을 내려다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게는 모든 것이 다 높이 있어. 엄마 아빠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칠판도, 텔레비전도. 나는 항상 고개를 한껏 젖히고 올려다봐야 해. 내 눈높이에서 보이는 건 아빠의 다리, 엄마의 엉덩이, 친구들의 어깨, 그런 것들뿐이니까.

아저씨의 이름은? ……노을 씨. 와, 이름이 엄청 예쁘네. 노을 씨라고 부르려니까 좀 어색해. 아이들은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으니까. 노을 씨는 화가구나. 그런데 어째서 그림을 그리지 않아? 노을 씨 스케치북은 언제나 텅 비어 있잖아. 지난번에도 지지난번에도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지? 하긴, 화가에게 미술치료라니 좀 웃긴 것 같아.

난 이 교실이 싫어. 그림으로 마음을 읽는다니 정말 웃겨. 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만 여기만 오면 그림 그리기가 싫어져. 내 그림을 보고 이 아이의 마음은 이렇구나 저렇구나 판단하는 게 기분 나빠. 그래서 장난을 좀 치지. 태양을 까맣게 칠하면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물어보거든.

“요즘 아빠가 써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니?”
바보 같지 않아? 난 일식을 그린 건데 말이야.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다면 일식이라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을 거야. 사람들이 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태양을 보고 있었으니까.
지금 나를 이렇게 그리는 것도 장난을 치는 거야. 일부러 거인처럼 커다랗게 그렸어. 집도 사람들도 조그맣게 그렸지. 모두 밟아버릴 것처럼 한쪽 다리를 들고.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게.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거야.

“선이는 작은 키 콤플렉스 때문에 화가 많이 나 있어.” 후후, 웃기지?
나도 알아. 난 심술궂어. 까칠하지. 난 ‘모난 아이’야. 엄마가 그랬어. 엄마는 이삼일에 한 번씩 학교에 불려왔어. 내가 수업시간에 소리를 지르거나 친구들을 때리거나 교실 바닥에서 뒹굴며 울 때마다. 한번은 엄마가 학교에 다녀와서 말했어.

“써니야, 좀 둥글둥글하게 살 수 없을까?”
둥글둥글하게 사는 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난 아이라는 말이 나를 찔렀어. 난 그냥 화가 나서 화를 냈을 뿐인데.

사실 나를 써니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아. 엄마, 아빠, 담임선생님, 유치원 때부터 내 친구였던 율이. 내 별명은 꼬마, 꼬꼬마, 꼬마 요정. 키가 작아서 붙은 별명이야. 3학년이 되면서 내 키는 100cm가 되었어. 1학년 때는 99cm였고, 2학년 때는 99.5cm였지. 1년에 딱 0.5cm씩 자란 거야. 1학년 때에는 그래도 괜찮았어. 반에서 제일 작긴 했지만 작은 아이들은 나랑 비슷비슷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 키는 아이들 어깨 아래에 있어. 내년에는 그다음 해에는 어떻게 될까.

꼬마라는 말을 들으면 몸속에서 불이 화라락 타오르는 것 같아. 어른들은 말하지. 꼬마라는 별명은 나쁘지 않다고. 그 안에 귀엽다는 뜻이 숨어 있다고. 난쟁이나 고블린 같은 별명보다는 훨씬 다정한 말이라고. 하지만 내 별명은 접힌 말이야. 꼬마라고 적힌 종이를 펼치면 ‘꼬마 악마’라는 말이 나온다고.

처음에는 내 키를 가지고 놀릴 때만 화가 났어. 화가 날 때마다 소리 지르고, 욕하고, 할퀴고, 달려들었어. 그런데 참 이상하지. 화를 내면 낼수록 점점 더 화가 많이 나는 거야. 내가 소리 지를 때 움츠러드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또 화가 나고, 복도에서 어깨가 부딪쳐도 화가 나고, 나를 쳐다보기만 해도 화가 났어. 아이들은 점점 나를 피하게 됐고, 더는 누구도 나를 꼬마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지.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래서 난 또 화가 났어.

3학년이 되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담임선생님은 처음으로 담임 반을 맡은 여자 선생님이었어. 정말 예쁘고 상냥했지. 우리는 모두 선생님을 좋아했어. 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굴이었어. 어떤 경우에도 큰소리를 치거나 무서운 얼굴을 하지 않았어. 내가 말썽을 피울 때도 다정하게 대해 주었지.

“우리 써니가 화가 많이 났구나.”
“정말 서운했겠다.”
“써니도 미안한 마음이 들 거야. 괜찮아. 친구에게 사과하고 화해하면 돼.”

처음에는 어라, 하는 마음이었지. 그래서 더 심하게 굴곤 했어. 아이들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 코피를 내고, 팔뚝에 할퀸 자국을 냈지. 의자를 발로 차고, 책상을 집어던졌어. 이래도? 이래도? 나는 자꾸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선생님이 언제까지 나를 참아줄 수 있는지.

내가 사물함 위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고 있으면 선생님은 다가와서 나를 꼭 안아 내렸어. ‘김선, 당장 내려와!’ 같은 말은 선생님의 말의 세계에는 없는 말 같았지. 선생님은 대신 이렇게 말했어.

“높은 곳에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그렇지? 평상시와 다른 각도로 보게 되니까. 하지만 사물함이 망가질 수도 있어. 또 써니가 떨어져서 다칠 수도 있고. 선생님은 그게 걱정이 되는 구나.”

내가 말썽을 부려도 선생님은 엄마를 학교로 부르지 않았어. 대신 아이들의 엄마들이 학교를 찾아오는 일이 늘었지. 방과후 교실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보았어. 선생님이 준영이 엄마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고 있었어. 이상했어. 선생님이 내 엄마도 아닌데, 어째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선생님은 변함이 없었어. 따뜻한 말과 손길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어. 나는 화가 나도 참게 되었어. “화가 많이 났을 텐데 잘 참아 주었구나. 써니는 정말 착하다.”

마음 속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을 거야
화내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겠지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닐까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었거든.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난 거야.
체육 시간이었어. 우리는 꼬리잡기 놀이를 했어. 한참 동안 웃고 뛰면서 놀고 있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나에게 꼬리표가 붙어 있다는 생각. 선생님이 내 뒤에 붙어 있던 ‘모난 아이’ 꼬리표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착한 아이’ 꼬리표를 붙였다는 생각이 들었어. 착해서 착한 아이라고 칭찬한 게 아니라 착한 아이라고 부르니까 착한 아이가 된 게 아닐까. 선생님이 붙인 꼬리표에 나를 맞춰나간 게 아닐까.

그때 준영이가 내 꼬리를 채갔어. 내 꼬리를 흔들면서 노래를 불렀어.
“꼬마 꼬마 꼬꼬마, 꼬꼬마 꼬리는 길기도 하지~”

꼬리와 함께 내 뒤에 붙어 있던 착한 아이 꼬리표도 팔랑팔랑 떨어져 나갔어. 나는 달려가서 준영이 가슴팍에 머리를 박았어. 준영이는 꽈당하고 엉덩방아를 찧었지. 그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안 해도 알겠지?

선생님이 달려와서 내 팔목을 잡았어. 뿌리치려고 했지만 뿌리칠 수 없었어. 선생님이 아주 꽉 잡고 있었거든. 내 몸은 선생님의 다리 사이에 끼어 있었지. 난 그게 무슨 자세인지 잘 알고 있어. 텔레비전에서 봤거든. 엄마가 열심히 봤던, 못된 아이를 착한 아이로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었지. 엄마가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훈육의 자세.

“놔! 놔! 놓으라고!”
나는 몸부림치며 소리쳤어. 아이들이 뒤에서 수근거렸어.
“아, 무서워. 진짜 악마 같아.”
그렇게 말한 건 내 유일한 단짝 친구 율이였어.

나는 선생님에게 욕을 했어. 침을 뱉었어. 선생님은 눈을 꽉 감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어.
“선생님은 써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진정해, 써니야.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해, 써니야.”

그 말은 나에게 이렇게 들렸어.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이 아이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었어. 손목이 가시가 박히는 것처럼 아팠어. 선생님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어. 선생님은 비명을 지르며 내 손목을 놓았고. 선생님의 팔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어.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책에서 배운 것처럼은 되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체육관을 뛰쳐나왔어.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지. 치료를 받기 전에는 등교할 수 없다고 학교에서 알려왔거든. 이게 내가 여기에 앉아서 바보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유야. 내 마음속에는 정말 악마가 살고 있는 걸까.

“마음속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악마가 살고, 천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천사가 살지.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건 악마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야.”

노을 씨는 연필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작은 물방울 하나를 그렸다.

“나는 점점 작아져서 이렇게 작은 물방울이 되었단다. 작고 무겁고 축축해졌어. 내 마음속의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지. 그래서 내 스케치북은 이렇게 텅 비어 있단다.”

화가이기 때문일까. 노을 씨가 그린 물방울은 정말 노을 씨를 닮았다. 웅크린 채 비를 맞고 있는 작은 아이 같다. 선이는 가여운 생각이 들어 노을 씨의 연필을 쥐고 물방울 위에 나뭇잎 하나를 그려놓았다. 노을 씨는 사각사각 그림을 그린다. 나뭇잎을 쥐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마음속의 내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을 거야. 화를 내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겠지. 어떤 말로 꼭 집어 표현해야 한다면 그건 아름다움이 아닐까.”

선이와 노을 씨는 하나씩 그림을 채워 나갔다. 구름과 태양, 새들, 나무, 집과 사람들. 스케치북의 빈 공간에 그림이 채워질수록 연필로 그린 흑백의 그림 속에서 저마다 아름다운 색채가 배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이도 노을 씨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텅 빈 교실에는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이 정적 속을 흐르고 있었다.

우승미 작가는
197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빛이 스며든 자리’가 당선됐고, 장편소설 〈날아라, 잡상인〉으로 제33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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