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진언 염송하니 고된 길도 ‘가뿐’

37번 이와모토지 전경. 원래는 신사였다가 사찰이 된 곳으로 다섯 신을 모셨던 전통에 따라 본존불도 다섯이다.

변기가 고장이거나 사용금지 표시가 붙은 공중화장실의 장애인 칸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원래 공중화장실에서 자는 것은 노숙 순례자들 사이에선 예의가 아니라고 회자되지만, 모두가 그 어떤 시설보다 좋다는 데엔 두말없이 동의한다. 식수, 화장실, 전기, 보온 등 어느 하나 빼놓을 것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제 자기 전에 지도를 보고 계산한 거리로는 오늘 45km정도를 걸어야한다. 평소 걷는 거리보다는 조금 더 걸어야하기에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출발한다. 일찍 알람을 맞춰뒀지만 내 알람에 스님이 깨실까 걱정해서인지 훨씬 이르게 일어났다.

하룻밤 함께 묵은 스님처럼
걸으며 백자진언 염송 수행
걸음 자세·마음가짐 달라져
예상보다 빠르게 37번 도착
본존 5불, 이색 천장화 유명


내 걱정도 무심하게 스님은 벌써 일어나셨는지 빈 침낭과 짐만 있을 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짐을 싸고 길을 나선다. 아직 아침 해도 뜨지 않았고 하늘만 어슴푸레 밝아 있었다.

이른 새벽인데도 휴게소 옆의 채소직판장엔 벌써 신선한 채소며 과일이 들어와 있었다. 근처 농지에서 직접 가져오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어정쩡하게 나오는 나를 보곤 토마토를 나르던 할머니가 오셋타이라며 주먹만한 토마토 두 개를 손에 쥐어 줬다. 답례로 오사메후다를 드리니 직판장 문 위를 가리키며 “순례자님! 우린 이미 잔뜩 붙여 뒀으니, 다른 좋은 곳에 줘요”라고 웃어보인다.

문 위를 보니 순례를 100회 이상해야 쓸 수 있는 비단 오사메후다부터, 금색, 은색까지 다양한 오사메후다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할머니께 다시 내 것을 돌려받곤 토마토를 한입 베어 물고 길을 나선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 5시다.

이곳 휴게소는 순례할 때마다 노숙 장소로 사용한다. 늘 좋은 인연을 만나는 곳이 되다 보니 이쯤 되면 무슨 명당자리가 아닌가? 궁금할 정도다. 첫 번째 순례 때는 도시락을 오셋타이 받았고, 두 번째 순례 때도 먹을 것을 오셋타이 받았다. 세 번째엔 나가사키에서 왔다는 부부에게 아예 제대로 한 끼를 얻어먹었고, 네 번째엔 정진하는 스님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멀리 동이 터오기 시작하고, 차도 옆을 끼고 걷는 순례길은 한적했다. 어제 스님께서 다라니를 지송하시면서 걷는 것이 생각나서 나도 진언을 외우면서 걸어 보자하곤 염주를 꺼내 쥐었다. 어떤 진언을 염송해야하나 하고 잠시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참회의 본존인 금강살타(金剛薩)보살의 백자진언(百字眞言)을 10만 번 염송하겠노라 마음먹은 바가 있었으니, 순례에 겸해 염송해보자 마음을 먹었다.

금강살타보살을 정수리 위에 관상으로 모시고 진언을 염송하면서 악업이 정화됨을 명상한다. 원래 백자진언은 길이도 길고, 발음도 어려워 처음엔 여러 번 끊어서 염송했지만 점차 익숙해지니 한 호흡에 진언을 염송할 수 있었다.

염송하면서 걷는 방식도 조금 바꿨다. 보통 걷다가 힘들면 쉬거나 시간을 대충 정해두고 쉬었다면 진언을 54번 염송하면 가볍게 쉬고, 108번을 염송하면 쉬기로 마음먹었다. 걸음수를 세어보니 진언 한 번에 10발짝 정도 나아갔다. 108주로 염송을 하니 나중에 수를 더해보면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있겠다며 혼자 슬며시 웃었다.

진언 하나로 걸음걸음에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진언이 틀릴까, 호흡이 흐트러질까 마음을 챙겨가며 걷는다. 혹여 관상하는 내용이 틀릴까 정신을 집중한다. 자연히 몸의 자세나 걸음도 반듯해진다. 왜 진작 염송을 하지 않았을까 조금 후회될 정도였다.

이와모토지 본당 천정에 그려진 다양한 천정화들.

정진하며 2시간을 부지런히 걷다보니 어항으로 유명한 토사쿠레(土佐久쟉)에 도착했다. 이곳의 어시장은 코치현의 명물인 ‘카츠오 타다키’가 맛있기로 이름나 있다. ‘카츠오 타다키’는 가다랑어를 두껍게 회를 쳐 겉만 살짝 직화로 익힌 요리인데 코치에 와선 꼭 먹어볼 만한 음식이다. 이전에 어느 순례자에게 이곳에서 제일 맛집이라며 가게 전화번호까지 받아두었지만 이른 아침이라 포기했다. 대신 길가의 순례자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배낭을 내리고 발우에 미숫가루를 담았다. 새벽에 받은 토마토까지 곁들이니 평소보단 좀 더 풍성한 아침상이다. 아침운동으로 조깅을 하던 할아버지 한 분이 휴게소로 들어오신다. 순례자 휴게소로 지어진 곳이지만 누구든 쉬어갈 수 있는 장소니 배낭을 얼른 옆으로 치워 자리를 만들었다.

“순례자 씨!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 출발하시나요?”
“출발은 새벽에 하고 지금은 아침을 먹으려 합니다.”
“역시, 순례자들은 아침이 이르네요!”

할아버지는 내가 먹는 미숫가루를 보곤 신기한지 무엇을 먹느냐고 물어봤다. 그땐 미숫가루라는 말을 일본어로 몰라 열심히 설명했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먹는 것인데 여러 곡식을 볶아서 빻은 것이라고 하니 2차 대전 전후 많이 먹었던 ‘핫타이코(はったい粉)’가 아니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할아버진 요즘 일본에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환자식으로 쓰여서 큰 마트에 가면 판다고 말해주셨다. 덕분에 미숫가루가 떨어져도 살 구석이 생겼다. 이후로 종종 미숫가루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핫타이코’라고 설명했다. 할아버지의 설명대로 젊은 사람들은 이름조차 처음 들었다는 사람이 많았다.

아침을 먹고 다시금 길을 나섰다. 차도를 따라 계속해서 걷는 길. 고갯길을 하나 더 넘어야 오늘 참배할 37번 이와모토지(岩本寺)가 있는 지역에 들어설 수 있다. 다시 진언을 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렇게 진언을 600번 좀 넘게 했을 때가 되어서야 고갯마루에 올랐다.
차도 옆으로 닦인 순례길이라 길은 편했지만 오르막은 여전히 버거웠다. 배낭을 내려놓고 숨을 고른다. 염주에 달아둔 계수기를 헤아려 보니 아침부터 1,200번 정도 진언을 염송했다. 이렇게만 정진하면 순례가 끝날 쯤엔 10만 번을 다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긴다.

아직 점심도 되지 않은 시간, 다시 지도를 펴서 이와모토지까지의 거리를 재본다. 13~14km 정도인데 이제 오르막도 없고 거의 평탄한 길들이 이어지니 잘하면 3시간 남짓해 도착할 듯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점심을 조금 넘겨서 이와모토지에 도착한다. 만약 상태가 유지된다면 5시쯤 오늘 목표로 하는 사가온천(佐賀溫泉)에 도착한다. 순간 내가 시간을 잘못 계산했나 하고 지도를 다시 살펴본다. 어젯밤 오후 7시를 좀 넘어서야 도착할 거라 생각하고 일찍 길을 나섰는데 예상 도착 시간이 너무 이르다.

잠시 지도를 보던 중 무릎을 탁치곤 이유를 알아챘다. 원래 내가 생각했던 출발보다 좀 더 이르게 출발한 데다가, 진언을 하며 걷다보니 쉬는 시간이나 걷는 것이 일정해져 속도가 더 붙은 것이다. 이 역시 불보살의 가피려니 하며 잠시 손을 모으곤 출발한다. 이왕 이리 된 거 오늘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 볼 심산이다. 

예상한대로 1시를 좀 넘겨 37번 이와모토지에 도착했다. 이와모토지는 본존불이 다섯인 재미난 사찰이다. 원래 근처에 있던 니이다 신사(仁井田神社)를 지키던 작은 사찰이었으나 코보대사가 다섯 구의 불상을 조각해 봉안하면서 이와모토지가 됐다고 한다. 불상이 다섯 구인 이유는 니이다 신사에 모시는 신이 5위(位)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찰을 순례하다보면 이렇게 신사와 절이 하나로 연계된 신불습합(神佛習合)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와모토지의 재미난 볼거리는 본장의 천정화이다. 본래 사찰의 천정화로는 절의 연기 설화나 풍경과, 비천상과 같은 모티프로 제작되지만 이곳은 다르다. 지역 화가들에게 그저 사찰의 천정화로 쓰인다고만 알려주고 각각 나무판 1장에 자유롭게 그려달라고 한 것이다.

그 결과 아주 이색적인 천정화가 탄생했다. 전통적인 풍경화나 불보살과 같은 그림은 물론, 유화로 그려진 정물화나 추상화, 인물화 등이 모인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마릴린 먼로의 초상화가 그려진 나무판. 엄숙해야할 법당의 천장이 화려하게 수놓였다.

참배를 마치고 납경을 받고선 벤치에 걸터앉아 점심을 먹는다. 잠시 이와모토지의 츠야도로 오늘 일정을 끝낼까도 고민했지만, 시간도 너무 이르고 츠야도가 너무 열악하기에 1시간 정도 여유롭게 쉬고서 산문을 나섰다. 나서는 찰나 멀리서 누군가 손을 흔든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어제 같이 묵은 스님이시다. 후다닥 뛰어가서 인사를 드리니 당신은 오늘 여기서 일정을 마칠 생각이시란다. 아마 이렇게 엇갈리면 다시 뵙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스님, 스님 덕에 저도 걸으면서 진언을 외우게 됐습니다.”
“그래요? 아주 좋은 일입니다. 행자(行者)라는건 수행하는 이란 뜻도 있지만, 길을 가는 이라는 뜻도 있으니까. 걸으면서 수행이라니! 아주 문자대로의 순례자가 됐네요!”
“감사합니다 스님. 정진하겠습니다.”
“감사는 코보대사께 해야지! 그분 덕에 우리가 이리 걷지 않나?”

역시 시코쿠는 길 자체가 수행도량, 걸음걸음이 정진이란 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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