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와 공자의 여행

걸으며 세상을 보자
남해에 살다보니 도시에 살 때와는 생활 형태가 많이 달라졌다. 아름다고 고즈넉한 남해의 자연풍광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고, 어디든 바다가 가까워 파도가 춤을 추는 넓은 해양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즐거움이 생겼다. 다만 교통 사정은 썩 불편하다. 도시와는 달리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가까운 진주시로 간다거나 옆 동네를 가려면 시외버스나 군내버스를 이용하는데, 배차 간격이 꽤 성글다. 출근시간 무렵이면 15분 간격으로 진주행 버스가 있기도 하지만, 대개는 3, 40분 정도 터울이 난다. 군내버스면 더욱 멀어진다.
이렇다 보니 버스시간을 꼼꼼히 따져 집을 나서는 부지런함도 생겼지만, 가까운 곳은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하게 되었다. 요즘은 이 동네도 미세먼지가 등쌀을 부려 속 편하게 걷지 못하긴 하지만, 설마 미세먼지가 흡연보다 나쁘랴 싶어 괘의치 않는다. 담배를 끊어야 미세먼지도 걱정할 텐데, 그게 참 쉽지 않다. 자잘한 번뇌를 날리고자 피는 담배인데 이 담배가 또 번뇌가 되니, 역시 인생은 고해(苦海)다.

걸으면 생기는 ‘견문’
‘지혜’ 형성의 근간 되다
구도·제도 위한 여행 필요

그래도 건강도 챙기고 남해의 경치도 가까이서 맛볼 겸 짬이 나면 동네 주변을 걷는 일이 요즘은 잦아졌다. 동네를 휘 한 바퀴 돌면 한 20여 분이 지나가는데, 산과 들에는 꽃들이 한창이고-노란 유채꽃 행렬이 볼 만하다. 밭에는 수확을 코앞에 둔 마을이 파란 천을 깔아놓은 듯 바람에 나부낀다. 내가 사는 고현면에는 땅두릅이 특산물로 유명한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출하량이 상당했다.

시간이 괜찮으면 바닷가에 자리한 이순신순국공원까지 나가보기도 한다. 들길과 차길(4차선 도로가 개통되어 옛 도로는 산책길로 그만이다)을 천천히 3, 40분 걷노라면 공원 어귀에 닿게 된다. 작년에 개관한 순국공원은 조경도 아름답고 바로 바다에 닿아 있는데, 충무공의 나라사랑도 기리면서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이렇게 나는 남해에서, 짧지만 의미 있는 여행을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문화에는 ‘앉는 문화’와 ‘걷는 문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구별은 쉽게 말하면 농경문화와 유목문화로도 대응되지만, 조금은 차이가 있다. 앉은 상태에서 이뤄지는 문화와 걷는 상태에서 형성되는 문화가 있다는 말이다. 또 반드시 문화와 문화 사이의 변별점으로만 이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같은 문화 내에도 각기 다른 과정을 거쳐 발달하는 유형이 있다는 뜻이다.

서면 다소 먼 시야가 확보될 뿐이지만, 걸으면 공간 자체가 바뀐다. 더구나 위로 올라가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걷는 데는 제약이 없다. 사방팔방이 다 목적지가 되고, 이전에는 보지 못한 새로운 풍경을 접할 수 있다. 그러면서 거두는 게 많다.

범속한 인간인 나도 걸으며 얻는 게 많은데, 하물며 인류의 스승인 부처님과 공자는 말할 나위가 없겠다. 두 분 모두 넓고 넓은 영토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탓인지 꽤 긴 생애를 살면서 무던히도 걸어 다녔다. 인도는 아대륙(亞大陸)이라 불릴 만큼 광활하고, 중국 역시 드넓은 판도를 자랑한다. 더구나 2천 5백여 년 전에 살았으니, 걷지 않고 이동하기란 어려웠을 법도 하다.
걷고 또 걸으면서 두 분은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났고, 이런저런 견문도 쌓아나갔다. 폭우를 뚫고 걷기도 했고, 땡볕에 비지땀을 흘리며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그런 풍찬노숙(風餐露宿)이 두 분의 삶과 생각을 기름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구도와 교화의 여행을 한 석가모니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는 동안 얼마나 먼 거리를 걸으며 여행했을까? 직접 인도에 가서 성지 순례를 했다면 지식이 탄탄해졌을 텐데, 나는 아직 인도에 가 본 적이 없다. 누군가 인도에 가려면 돌아올 생각은 잠시 접어두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인도의 매력에 빠지면 도저히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게 두려워 인도 여행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원히 머무는 불상사(?)가 생긴다고 해도 꼭 가보고는 싶다.

부처님의 여행 경험을 담은 책을 찾다가 법륜 스님이 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정토출판, 2010년판)가 눈에 띠었다. 부처님이 태어나 왕자로 산 카필라는 지금 네팔의 타라이(Tarai) 지방이라고 한다. 히말라야 산맥이 끝없이 이어진 산골짜기 왕국에서 유성출가(逾城出家) 전까지 지냈다. 출가하고 6년 뒤 긴 수행과 고행 끝에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곳은 네이란자라 강가였다. 여기서 6주 동안 머물다가 바라나시로 가는데, 600리, 250km 떨어진 곳이었다.
이때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여행은 열반에 드시는 쿠시나가라까지 부단히 이어졌다. 29살에 출가해 깨달음을 얻은 35살부터 열반에 드시는 여든 살까지 45년은 세월로도 길지만, 무수히 많은 지역과 나라에 발자취를 남기면서 자신의 깨우침을 전하는 교화의 나날이었다.

초전법륜(初轉法輪)의 땅 사르나트와 영산회상(靈山會上)의 공간 라즈기르, 먼저 세상을 떠난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에 올랐다가 석 달 동안 설법한 뒤 하강하셨다는 상카시아, 사위성(舍衛城)이 있던 쉬라바스티, 열반의 땅으로 가던 길목에 있는 바이샬리 등, 지금의 인도 북부 지역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여행을 했던 공간이었다. 이렇게 유적이 있고 행적이 알려진 곳만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사이사이 이름 모를 땅과 골목, 산과 강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거리를 지금 따지기는 어렵겠지만, 줄잡아도 수천 킬로미터는 훌쩍 넘고도 남았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 길고도 긴 시간 동안 멀고도 먼 거리를 여행을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중생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깨달음의 법열(法悅)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여행을 외면할 수 없었다. 번뇌에 찌든 사람을 만나면 그 사연을 들어 적절한 진리를 설해 풀어주셨고,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는 자비의 손길로 치유의 문을 여셨을 것이다. 또 깨달은 진리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면서 정진(精進)의 벼리도 가다듬었을 것이다.

석가모니의 위대함은 깨달음 자체에 만족해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찾아진다. 깨달음의 실체를 이론과 실천으로 단단하게 완성하는 노력에도 게으르지 않으셨다. 병의 증세를 보고 다양한 처방을 하는 명의(名醫)처럼 수많은 중생의 모래알보다 많은 번뇌를 씻어내는 데는 깨달음의 고갱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못 배운 사람과 똑똑한 사람, 권력을 쥔 사람과 부림을 당하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며 욕심 많은 인간 등 사람의 인성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 다르다. 그런 사람들에게 적절한 설법과 비유로 깨닫게 하려면 수많은 인격의 내면을 이해해야 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책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셨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결국 그 길고 긴 여행에서 왔다고 믿는다.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뼈와 살, 피가 흐르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구도와 교화의 여행길이 석가모니를 오늘날까지 위대한 스승으로 사람들이 숭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짊을 가르치고 권력을 얻는 여행을 한 공자
공자 역시 여행의 거리라면 누구 못지않았다. 공자는 춘추시대 노(魯)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의 산동성 곡부(曲阜) 인근이다. 젊어 고생을 많이 한 공자는 15살에 처음 학문에 뜻을 두어 30살에 나름의 경지에 올랐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19살 쯤 처음으로 말단 관리가 되고, 학문과 지식을 넓히는 한편 하급 관료를 전전하면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공자가 첫 여행을 시작한 것은 35살 되던 기원전 517년 경인 듯하다. 노나라에 내분이 일자 이웃 제(齊)나라로 갔다. 제경공을 만나 정치에 대해 토론했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악(韶樂)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 해 뒤 귀국했고, 노나라에서 횡행했던 가신(家臣) 집단들을 경계하기도 하고 조언도 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고자 모색했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정치이론가였고, 이론이 실현되려면 고위 관료가 되어야 했다. 잘 나가는 가문 출신이 아니었던 공자는 어쨌거나 자신을 밀어줄 후원자가 필요했고, 여러 사람들에게 그 역할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공자의 인정(仁政)은 당시 권력자들에게 그렇게 듣기 좋은 듣고 싶어 하는 노래가 아니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공자는 55살이라는 늙은 나이에 제자들을 데리고 철환천하(轍環天下)의 길에 나섰다. 자신의 정치철학을 받아들이고 권력을 쥐어줄 군주를 찾아 대책 없는 여행길에 올랐던 것이다.

공자가 이 기간 동안 지났거나 찾은 나라는 위(衛)나라를 비롯해 진(晋)나라, 조(趙)나라, 송(宋)나라, 정(鄭)나라, 진(陳)나라, 채(蔡)나라 섭(葉) 지역 등이었다고 기록에는 전해진다. 이들 나라를 번갈아 오가면서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권력을 주어 정치를 맡기지 않았고, 오히려 시련과 불운만 잇달았다. 그렇게 선각자의 길은 괴롭고 힘든 법이다. 끝내 공자는 권력을 쥐고자 했던 뜻을 포기하고 만다.

여행을 떠난 지 14년이 지난 기원전 484년, 68살의 노쇠한 나이로 공자는 귀국길에 올랐다. 이후 공자는 후학을 통해 자신의 뜻이 미래에는 이뤄질 것을 기약하면서 학문을 정리하고 교육하는 일로 말년을 보낸다. 그 사이 많은 제자들이 관직으로 나갔고, 그중에는 꽤 높은 관직과 권한을 쥔 사람도 배출되었다. 애제자 자로(子路)의 처참한 죽음을 목도한 공자는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기원전 479년, 73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여행은 득의의 나날이라기보다 좌절과 수모, 위기가 연속된 환란의 길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시련에 주저앉지 않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의지와 철학을 더욱 단단하게 정립했다. 공자가 조국에서 편안하게 관리로 일생을 살았다면 지금의 공자 철학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여행이란 사람을 담금질하고 생각을 붙들어 매는 의미 있는 경험이다. 인생길이 여행길이란 통속적인 경구도 있듯이 앉을 때와 걸을 때를 가리는 지혜가 우리 삶에서 참으로 소중하다. 앉아서는 명상을 하고 걸으면서 사색을 하자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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