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의 길은 관 속에 들어가야 가는 길입니다

 

어떻게 참선 공부를 해 나가야…

질문 생활 참선이라는데 일상생활 하면서는 어떻게 참선 공부를 해 나가야 하겠는지요.

답변 행주좌와 어묵동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거일동이 참선 아닌 게 없습니다. 지금은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시대에 맞추어서 우리는 참선을, “눈 하나 깜빡거리는 것도 참선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일체를 쉬어라. 놔라. 맡겨라. 물러서지 마라. 그리고 감사해라. 너의 몸뚱이는 네 주인의 시자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 시자는 주인에 의해서 움죽거릴 뿐이니 너는 쉬어야 된다. 너와 더불어 모든 일체를 다 바로 쉬어라.” 하는 거죠. 그것은 종 문서를 놓지 않고는 절대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접착불에서 나와서 모든 것을 구워서 내는 데 역점이 있는 것이 참 묘하다는 얘깁니다. 우리 인간도 마음에 한번, 바깥의 일을 모두 오관을 통해서 들여 가지고선 다 여기에서 납득이 돼 가지고서 딱 설계를 하거든요. 내가 한다는 결정을 해 가지고 내지요. 이것은 구워 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생각 없이 일을 시작하진 않거든요. 그와 똑같은 문제죠. 그래서 하나를 주판을 놓을 줄 알면은 만 개도 놓을 수 있고 천 개도 놓을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없는 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질서를 지키고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날짜도 달수도 해년도 이렇게 이름을 지어 놓고 지키는 거다 이겁니다. 그것도 역시 아니라는 건 아니에요. 그것도 거기 포함된단 얘기죠. 질서를 지키는 것도 당신네 마음이요, 질서를 안 지키는 것도 당신의 마음들이니까. 그래서 잘 지키는 것만 정법이 아니고 잘 안 지키는 것이 사도가 아니고, 즉 사도나 정도가 둘이 아닌 그 하나의 근본에서 정당히 나오는 지혜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오는 거 내치지 말고 가는 거 잡지 말고
그냥 편리하게 사람의 도리로 사는 거,
이거 잊지 마세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만심이 있어요. 아상이 있고. 그래서 자기를 위시하고 자기를 일으켜 세우고 자기가 했다 그러고 자기가 가졌다 그러고, 저놈 땜에 망했다 그러고, 저놈 때문에 난 살았다고 하고, 이렇게 하는 까닭에 내 진정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한번 놓고 되돌아서 나를 보는 예가 없어요. 어떠한 잘못된 점이 있어도 저쪽으로 내가 저 사람이 돼 보는 그런 여유가 있어야 할 텐데 여유가 없어요. 그냥 막바로 들어가는 거죠. “너!” 이럭하고….

그러니 어찌 이 한마음의 도리를 알 수 있으며 이 평등한 균형이 잡힌 이 진리를 알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천차만별로 이렇게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는 이 모래알 같은 광대무변한 도리를 어찌 한생각에 주판을 다 놓을 수가 있겠느냐? 그 한생각에는, 근본에는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근본 도리가 하나만 풀리면은 다 수학이 놔지는 거예요. 주판이 다 놔져요. 그러니 어디에 붙여도 도 아닌 게 없고, 어디에 붙여도 법 아닌 게 없고, 어디에 붙여도 진리 아닌 게 없는 겁니다. 그리고 어디에다 갖다 놔도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즐거움 아닌 게 없는 거고요.

그런데 우리뿐만 아니라 다 그렇겠지마는, 우리가 억겁을 거쳐 오면서 그렇게 자연으로 인해서 이것이 허망해서 쓸모가 없다고 그러지만, 만약에 이 허망한 이 시자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공부를 할 수도 없고, 또 근본 내 씨가 아니었더라면 내 이 콩나무가 안 났을 겁니다. 그러니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격이죠. 콩씨가 먼저냐 콩나무가 먼저냐. 이것도 먼저가 아니고 이것도 먼저가 아닙니다. 단지 그저 이 콩나무는 콩나무대로 콩씨가 열리고 또 움죽거리지 않는 거 같으면서 움죽거린다 이겁니다. 콩나무가 말하는 거 보셨어요? 들으셨어요?

여러분이 내가 하는 소리를 내가 들을 줄 안다면 바로 콩나무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어떤 식물이나 동물이나, 무생물이나 유생물이나 모든 것을 다 들을 수 있어요. 돌의 말도 들을 수 있고 흙의 말도 들을 수 있어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가고 올 수 있고. 그래서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오관을 통해서 내가 부릴 줄을 알아야지 내가 오관을 통해서 내가 말린다면 아니 되느니라.” 이건 바깥으로 보고 듣고 바깥으로 돌지 말라는 소립니다.

그래서 예전에 한암 스님께서, 내가 그때에 스무 살도 못 될 때예요. “스님, 얼마만큼 가면은 죽습니까? 죽으려고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아요.” 하니까, 내 몸뚱이가 죽는 줄 알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그렇게 가는데 죽어라, 죽어라, 자꾸 ‘죽어라’ 그러거든요. 이거 몸뚱이가 아주 죽어 버리라는 줄 알고 그냥 차 속에도 들어가고 막 그랬단 말입니다. 근데 안 죽어져요.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서 곧장 “스님, 얼마만치 가면 죽습니까?” 하니까 눈을 뜨고 푹 자라는 겁니다. “눈을 뜨고 푹 자야만이 죽느니라.” 그러거든요. 그거예요, 바로. 여러분이 눈을 뜨고 푹 자지 않으면은 통과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이 하나하나 움죽거리고 이러는 것은, 즉 말하자면 이 전자자동기, 이게 그대로 돌아가는 거죠. 내 마음에 의해서 스위치만 눌렀다 하면은 그냥 자동기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 자동기로 돌아가는 이 자체는 우리 이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물질과 더불어 이 세상의 진리가 전부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업식이 녹아져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질문 마음이 넓어지면 누구한테 어떤 말을 듣는다 해도 상처를 받지 않을 테지요. 저는 공부를 한다 하면서도 자꾸 상대의 말에 자꾸 속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업식이 다 녹아져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겠습니까.

답변 우리 몸속에 있는 그 의식 자체가 악업 선업이 뭉쳐서 인간이 됐는데, 그것들 모두가 내 마음의 지배를 받아야만 되겠죠. 그런데 내 마음을 악으로 쓴다거나 선으로 쓴다거나 그런다면 그대로, 악으로 생각하면 악으로 같이해 주고, 선으로 쓴다면 선으로 같이해 줍니다. 우리가 지구 벌레라고 합시다. 우리 몸속에 들어 있는 벌레와 같이 이 몸을 집으로 삼고 사는 내 생명들과 같이 우리도 지구의 벌레로서 이렇게 산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금 지구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오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항상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고 서로 이렇게 해야만 되기 때문에 지구도 수명을 오래도록 둘 수 없는 그런 경지도 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문제도 없을 수 없죠. 그러니까 여러분의 이 몸도 그렇습니다. 지구와 같이 안에서 파워가 일어나고 싸우고 이런다면 이 몸뚱이가 벌써 망가집니다, 세포가 굳어지고. 우리는 몸에서 벗어나고 지구에서 벗어나고 세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느 분들은 나 하나가 금방 깨쳤다고 해서 한 소식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 소식 얻은 게 아닙니다. 갓난아이 금방 낳아 놓고선 “너는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해서 네 멋대로 살아라.” 이러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금방 깨친 사람은 어린애 금방 낳아 놓은 거와 같아서 그걸 부모가 길러서 또 가르쳐서 사회인이 될 때까지는 부모의 보조가 필요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깨쳤으면 그때서부터 실험으로 들어가고, 즉 말하자면 체험으로 들어가고 연구로 들어가는 겁니다.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게 체험이 된다면 바로 당당하게 내 그 생명 안으로는 내 생명체들을 모두 한마음으로 굴려서 지배하고, 바깥으로는 마음들을 조절해서 지배하고, 그렇게 해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해 놓고, 그다음에 또 한 가지는 세 번 죽으면서, 즉 죽는다는 것은 “나를 내 주인공에 놔라. 컴퓨터에 놓아라.” 하는 얘기나 똑같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버려라.” 이러는 게 아니라 입력을 하는 겁니다. 과거에 입력이 돼 가지고 지금 현실에 이렇게 고생을 하니까, 지금 고생하는 것을 바로 입력을 다시 한다면 앞서의 팔자 운명이라는 그 언어가 없어지고 업보가 없어지고 녹아진다 이 소립니다.

지금 우리 몸뚱이가 살아서 지금 이렇게 움죽거리면서 가기도 바쁘고, 옳게 가기도 바쁘고, 나 발견하기도 바쁘고,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도 바쁘고, 둘이 아니게 나투는, 우주 천지가 전부 가설이 돼서 직결돼 있다는 그 사실도 연구하고 탐험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싸울 새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욕을 해도 그렇고 나하곤 상관이 없는 거죠. 죽인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어요. 내가 바빠요, 지금.

인간에까지 올라온 것도 천 년을 공을 닦아서 온 겁니다. 그래서 사람 하나 되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돼 가지고도 거기서, 즉 말하자면 진화해서 승진을 못한다면 여기서 빙빙빙빙 끝 간 데 없이 돌다가 또 미해져서 잘못되면 짐승의 허물도 쓸 수 있는 거죠. 만약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의식만 가지고 있다 보면 아, 두 부부가 자는 그 의식만 가지고 있으니 거기 아무 데나 들어갈 수밖에요. 그래서 그 모습을 가지고 나온다면 사람의 모습이 없어지고 그 짐승의 모습으로도 나올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분명히 있으나 우리는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건 왜냐하면 과거는 지금 짊어지고 나왔으니까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깐 없으니 오늘날에 지금 앉아서 모두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생활을 하는 거를 한번 지켜보면서 여유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잠재의식 쪽으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라 이거죠.

이 종교라는 것도 지금 가톨릭교 기독교 불교 할 거 없이 전부 바깥에서 숭상하고 바깥에서 끄달리고 바깥에서 구하고 그러니, 전부 그게 미신들이지 뭡니까? 사람이 미신 노릇을 하면 미신이 있는 거지, 사람이 미신 노릇을 하지 않는데 귀신이 어딨습니까? 우리가 귀신 노릇을 안 한다면 귀신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인간의 도리를 그대로 참답게 해 나가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고 당당하게 자유스러울 수 있고 당당하게, 돈을 쫓는 게 아니라 돈을 내가 없으면 끌어다 쓸 수 있는, 즉 말하자면 만물의 영장으로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으며, 또는 법신이 될 수 있으며,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사니 화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뭐든지 내가 사는 대로 그대로 여여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 것은 그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재료가 다 돼 있다는 사실, 여여하다는 사실, 청정하다는 사실,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다는,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 근원을, 근본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견을 아주 작게 써서 ‘요거는 요거는’ 이러고는 그냥 자꾸 따로따로 가르니 그것이 지혜가 넓어질 수 있겠습니까?

가족들이 속을 썩여요

질문 제가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남편은 남편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하나같이 속을 썩이네요. 마음공부도 한다고 하는데 제가 공부를 제대로 안 하는 건지 크게 변하지 않아요. 도움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자기를 놔두고 상대를 믿는다면, 자기 빼놓고 상대를 믿는 것이, 그 믿는다고 하더라도 대신 살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똑바로 아시고, 똑바로 행하시고, 진짜로 믿어야 그 도리가, 무궁무진한 도리가 바로 나오고 ‘이 세상에 우주 천체가, 은하계나 태양이나 돌아가는 이 우주 천체가 이 우리네들 살림살이와 똑같구나. 수명이 짧고 길고 그럴 뿐이지 그것은 똑같구나.’ 하는 거를 느낄 거예요, 아마.

그리고 가정에서도 남편이 잘못하더라도, 예를 들어서 화투를 잘한다, 술을 잘 먹는다 그래서 속이 썩는다 이러더라도, 그리고 하루 이틀 안 들어온다 이러더라도, 자식이 잘못하고 안 들어온다 이러더라도 입으로 욕을 하고 그걸 말로다가 끌려고 그러면 절대 끌리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마음인데, 둘이 아닌 주인공인데 너만이 그렇게 안 하게 할 수 있잖아!’ 하고서 열흘이 됐든 스무 날이 됐든 들어오면 부드럽게 말해 주고 “그 스무 날이나 다니면서 몸 해쳐지면 어떡하느냐.” 외려 위로를 해 주는 거죠. 그러면 이렇게 생각이 들겠죠. ‘저 사람이 부처가 됐나?’ 얼른 쉽게 말해서. ‘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게 생각하는 대로 입력이 되면서 ‘에이! 뭐, 해 봐도 만날 그 타령이고….’ 인제 그때는 하기가 싫어져요, 또. 그래서 안 하는 거예요. 안 먹게 되는 거고요.

자기가 스스로 하기 싫고 스스로 먹기 싫고 그래야 안 먹는 거지 남이 먹지 말란다고 안 먹고 남이 욕을 한다고 그거 듣나요? 마음으로 고장 난 건 마음으로 이끌어 가야 돼요. 그리고 보이는 데서도 부드럽게 해 주시고요. 자식도 그렇고 부부지간에도 그렇고 부모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업이 그냥 입력된 게 다 없어지고 새 입력이 들어가서 모두 물러서게 하죠, 녹여 버리고. 용광로에다 다 넣듯이.

지금 아상이나 아만이나 이런 게 말로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게 습관이 되고 관습이 돼 가지고 그냥 남을 섭섭하게 하기가 일쑤입니다. 어떠한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주인공에다 맡기지 상대방을 가지고 ‘네가 잘못해서 이렇게 됐느니, 네가 미우니’ 하고 원망하고 이러지 마세요, 절대로. 그것 참견하다 보면 자기가 가는 길을 잊어버려요. 도의 길은 관 속에 들어가야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탓을 하고 그런다면 물질세계에 사는 거기에 얽매이는 거지, 그게 도의 길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 몸뚱이가 통입니다. 통 안에는 별의별 그 모든 생명들 의식들이, 즉 저희들이 살아온 그 의식들이, 차례차례로 업보며 유전성이며 다 가지고 있는 생명들이 살고 있다고요. 그러니 이게 팥죽과 같지요. 팥죽 방울 나오듯 하는 거죠. 그 통에는 팥죽이 들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그 팥죽 방울을 나오지 않게 하려면 불을 첫째 물려야 합니다. 불을 물리면 팥죽 방울이 나오지 않잖아요.

지금 우리는 죽은 세상을 공부하러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 산 세상은 공부 다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세상을 다 알아야 보이지 않는 데서 산 세상을 둘 아니게 이끌고 나가죠. 그러니깐 ‘죽어야 너를 본다’ 이런 소리예요. 근데 죽으러 가는 놈이 이것 탓하고 저것 탓하고…,

내가 왜 이 집 짓는 데도 상관 안 하느냐. 이거 봐요. 부처가 있으면 할 거고 없으면 고만이지 나한테 꼬리표 붙여 놨습니까, 그 절 지으라고? 돈이 없어도 그놈이 있으면 할 거고 돈이 있어도 아니면 못할 거고 그런데 아, 그놈이 하는 거를 내가 시자로서, 둘 아닌데 왜 그렇게 걱정을 합니까? 그런데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걱정을, 걱정할 거나 안 할 거나 다 한단 말입니다, 그냥. ‘왜 공부가 안되느냐.’ ‘왜 답답하냐.’ 이런 것도 걱정이죠. 그것도 그놈한테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딴 놈한테서 나오는 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만 아상을 끊으려고 하고 이런대서야 어떻게 끊어집니까, 그게? 물 흐르듯 하는 건데.

물에는 바로 똥물이나 구정물, 핏물, 고름물, 흙탕물, 맑은 물 다 섞인 게 한바다예요. 바다라면 그걸 다 가라앉혀서 그냥 아무것이 들어가도 바닷물이지 똥물이라고 안 그럽니다. 더군다나 그 한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똥물이든 핏물이든 젖는 것이 법의 도리다. 젖는 거. 어디에나 다 젖죠. 그러니 똥물에 젖는 거나 맑은 물에 젖는 거나 핏물에 젖는 거나 젖는 거는 매일반인데 이거는 내버리고 저거는 갖고 이럭하면 그 젖는 도리를, 크게 생각해서 광대하고 무변한 그 도리를 절대 납득할 수가 없죠.

그리고 죽으러 가는데, 만약에 사찰에서 무슨 일을 주지라든가 뭐, 그 아랫사람이 뭐를 했는데 이거를 그거 서로 얘기를 안 하고 한 것도 있고 얘기를 하고 한 것도 있고 이렇다 하더라도 그거를 개의치 말고 부드럽게, 부드럽게 아이, 형님이 되면 “형님!” 아우가 되면 “아우, 그건 나한테 이렇게 말 좀 하고 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잖어!” 이렇게, 이렇게 하면 “아이 형님, 이럭하고 이러이러해서 그랬어요.” 하고 얘기를 할 때 다 풀리는 거예요, 그게. 그런데 그거를 그렇게 안 하고 꽁하고 여기다가 넣어 둔단 말입니다. 넣어 두니까 같이 사는 것도 밉고 같이 보는 것도 뭐 그렇고, 왜, 그런 게 있잖아요, 어색한 게. 그런 게 자꾸 싹튼단 말입니다. 싹트게 되면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그때는 다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이렇게 헤어져 버리죠, 마음이. 그러면 육체도 ‘어이구, 내가 이럭하고 살면 뭘 해.’ 그러곤 이쪽으로도 떠나고 싶고 저쪽으로도 떠나고 싶은 그런 충격이 드는 거죠. 우린 비구니만 그런 게 아니라 비구도 그렇고 비구니도 그렇고 우리 일상생활 하는 사람도 그렇고, 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그럭하고 어떤 사람은 그럭하지 말라 이러는 게 아니에요.

옛날에는 그 상대방이 얼마만큼 다져졌나 그걸 보기 위해서 고승들끼리 문답을 하죠. 어떤 사람은 가다가 말고 일행이 뚱그렇게 그려 놓고선 그 안에 들어가서는 “너 여기 그어 놓은 데 들어오면 그냥 안 둔다.” 하니깐 아무 소리 없이 가서는 그 뚱그렇게 그려 놓은 거를 발로 쓱쓱 지워 버리고선 합장을 하더랍니다. 그 소리 어떠세요? 그만큼 되려면 지금 우리 중들도 어떻게 집을 짓든지, 어떻게 되든지 그건 서로 좋게 얘기해서 좀 거슬리면 “이건 이렇게 이렇게, 제 생각에는 이러이러하는 게 좋다고 생각이 되는데 형님은 어떠세요?” 또 아우가 그랬으면 “나는 이렇게 이렇게 생각했는데 아우는 어떠냐?” 하고 이렇게 해 나간다면 얼마나 화목하고 또 얼마나 그것이, 즉 말하자면 죽은 세상의 도의 길을 걷는다고 하더라도 손색이 없죠. 가고 옴이 없이 왕래하면서 가고 오고, 함이 없이 일체 법을 다 행하니까 말입니다.

이 생활 속에서 행 하나하나 하는 것이 다 참선입니다. 그렇게 하고 들어가야지 만일에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한다면 그 길을 당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사도 놓고 가야 된다 이겁니다. 잘된다 못된다 이런 말이라는 건 필요 없어요. 실질적으로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하고 이러면서 보람 있게 살아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고생하지 말고 아파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어차피 인생으로 태어나서 한 번 다 죽는데 그걸 뭘 그렇게 연연하고 그렇게 사십니까. 그저 오는 거 내치지 말고 가는 거 잡지 말고 그냥 편리하게 사람의 도리로 그냥 사는 거, 이거 잊지 마세요.

이 마음도리 이해하려면

질문 불교 공부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불법의 이치를 이해해야 믿음이 생길 것 같은데 이 마음 도리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할는지요.

답변 여러분이 진짜 생활 속에서 우리가 살아나가는 그 도리를 알려면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무조건 여러분을 믿어야 합니다. 무조건 자기 자신 주인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만약에 병이 있다면 ‘야, 영원한 친구여! 병이 난 것도 바로 너가 있음으로써 났으니까 병을 낫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어, 이 친구야! 심부름을 이 몸뚱이가 잘하게 하려면 아, 다리를 낫게 해야 될 거 아니야!’ 아니, 다리뿐이 아니죠. 모든 게 다 그래요.

그렇게 해서 차근차근히 해 나간다면 그게 실험도 되고 바로 체험도 되고, 그렇게 하나하나 해서 그 탑을 쌓아 올라가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짓는데 벽돌 뭐, 무슨 소리 하고 그러나요? 그냥 갖다 놓으면 집어서 벽돌 쌓죠. 서까래 갖다 놓으면 그냥 올려놔요, 아무 소리 없이. 또 탑을 쌓을 때도 돌 갖다 놓으면 그냥 쌓아요. 그러니까 아무 소리 없이 그저 생활 속에서 여러분이 탑 쌓듯이 하나하나 쌓아 올라가다 보면 스스로서 봉오라지는 올라가게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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